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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92)화 (92/149)

***

“해인.”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거의 힘을 주지 않은 채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오는 손길에 해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기억하기로는 새벽녘에 잠들었던 것 같은데, 막사 안이 불을 켜지 않고도 환한 걸 보면 어느새 날이 밝은 지도 오래된 모양이었다. 밤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난다는 기본적인 삶의 규칙이 오늘로 나흘째 소용없어지고 있다. 몸의 시간이 고정된 덕분에 피곤하다는 느낌은 주기적으로 없어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해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킬레우스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선명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이미 한참 전 잠에서 깼던 듯 시선 속에 잠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해인은 자신처럼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늘 체력이 남는 것 같은 아킬레우스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신기해졌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닐 것이다. 해인은 완전히 정신을 차린 뒤 질문부터 꺼냈다.

“무슨 일 있어요?”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잠들면 최소한 깨어날 때까지는 잠자코 기다리는 편이었지, 지금처럼 일부러 그녀를 깨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까지 안 했던 일을 한다는 건 평소와는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이 된다. 해인이 몸을 일으키자, 가만히 등을 받쳐 준 아킬레우스가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걱정해야 할 일은 아니야.”

“그럼?”

“그대가 데리고 다니던 그 어린아이 때문에.”

해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칼리에가 왜…….”

“가족이 찾으러 왔다는데, 어쩌면 그대가 그 애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싶어 할 수도 있으니 파트로클로스가 그대의 의견을 물어보라더군.”

말을 하면서도 아킬레우스는 사실 해인이 무슨 답을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크게 뜬 해인은 확인하듯 물었다.

“가족이 찾으러 왔대요?”

“그렇다던데.”

“그럼 가야죠. 제가 뭐라고 그걸 말려요.”

“그대가 뭐라니…….”

어이없이 웃은 아킬레우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칼리에라는 이름의 한 개인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아킬레우스가 해인에게 얹었던 몇 개의 짐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해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덕분에 당시에는 그저 선택받기만 하면 후회되지 않는 기억으로 남겨질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갔었으나…….

해인이 아니라 이야기한들, 결국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나아가 자신의 마음이, 언젠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 그녀에게 그리움으로 인한 고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런 걸 하나 덜어 낼 수 있는 셈이니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 해도 해인이 저렇게 미련 없는 태도를 보이자 기분이 다소 미묘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해인은 아킬레우스처럼 복잡한 생각을 배경으로 두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입장에서는, 기원전의 땅에 떨어진 이후 드물게도 고민할 필요부터가 없는 문제였다. 그러잖아도 칼리에를 곁에 두기 시작했던 것은 어린아이가 운 나쁘게 자유를 잃고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서다. 자유를 되찾아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서로는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없으므로, 그 약간의 어긋남은 미처 좁혀지지 못했다.

“바깥에서 파트로클로스가 그 아이와 기다리고 있던데.”

아킬레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가만히 알려 주었다.

***

그리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금세 막사의 천이 걷혔다. 파트로클로스는 고개를 들어 막사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온 이는 지휘관에 이어 역시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잠깐 주변을 살피는가 싶던 해인은 곧장 칼리에를 발견한 듯 그들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 뒤를 이어 아킬레우스 역시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본 파트로클로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칼리에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해인과 마주해 가까이 걸어갔다. 머뭇거리던 칼리에는 차마 파트로클로스의 뜻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발을 끌며 뒤따라갔다.

“아가씨.”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선 파트로클로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파트로클로스.”

“예, 좋은 오후입니다. 아킬레우스에게 앞서 전했는데,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시간을 많이 뺏으면 저기 막사 바로 앞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아킬레우스가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그는 인사 뒤에 다른 잡담 없이 바로 본론을 덧붙였다. 무례하게 들리지 않도록 어조를 좀 더 친절하게 바꾼 노력을 알아차린 듯, 해인은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맞춰 주었다.

“들었어요. 칼리에의 가족이 찾으러 왔다고요.”

말을 이으며 해인은 당사자인 칼리에를 돌아보고는 한 번 더 미소 지어 주었다. 그 모습에 잠시 고개를 기울인 파트로클로스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예, 그렇지만 줄곧 곁에 데리고 계셨으니, 만약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아니에요. 신경 써 주신 건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가족이 왔으면 당연히 따라가야죠.”

“엇.”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답에 오히려 당황한 건 파트로클로스였다. 그가 말을 멈추는 것과 함께, 곁에서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칼리에도 약간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둘을 한 번씩 번갈아 본 해인은 이내 칼리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을 응시하는 새파란 눈을 마주한 칼리에가 멈칫하자, 해인은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가족들도 너도 서로 많이 보고 싶었을 텐데, 더 기다려서 좋을 건 없잖아. 그렇지 않아?”

“아가씨…….”

칼리에는 흔들리는 눈으로 해인을 마주 보았다. 이곳에서 지내며 자신을 동생처럼 대해 주는 해인에게 정이 들었기도 하고, 동시에 그녀를 동경하듯 바라보기도 했지만, 가족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급적이면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부터 기다려 온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해인이 지금처럼 아무런 미련도 망설임도 없이 먼저 떠나기를 권유하자, 무언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해인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마침 해인의 의사가 명확함을 확인한 파트로클로스가 알아서 물러나 주었으므로, 해인은 칼리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칼리에.”

“네…….”

“여기 있으면 결국 포로일 뿐이잖아. 그런 경험은 더 길게 가져갈 필요가 없어.”

해인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운이 나빴던 거니까, 벗어날 수 있으면 당장 가서 자유롭게 살아야지.”

“……제가 도움이 안 됐었나요?”

“아니.”

자신 같았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알아차린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서운한 티를 숨기지 못하는 칼리에를 보며 해인은 손을 뻗어 스치듯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있어서 더 잘 지냈지. 그래서 지금처럼 망설이지 않고 가라고 하는 거야.”

말을 잇다 보니 뒤늦게 떠오른 사실도 있었다. 해인은 자신이 트로이에서 이 시대를 떠나게 될 것임을,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쓰게 되새겼다. 등 뒤에 아킬레우스가 있으므로 당장은 괜찮았으나 그 사실 자체가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눈을 내리떴던 해인은 이내 눈앞에 자신의 표정을 가만히 보고 있는 칼리에가 있음을 자각하고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조심하고, 잘 살고, 알았지?”

“……네.”

서운할 일은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칼리에는 해인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응?”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했던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포로로 잡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이 표정으로 명백하게 엿보이는 이들을 마주했을 때, 해인은 그들을 안타깝게 여겼고 또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지 잠시나마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자신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음에 초조한 나머지 결국 외면하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모른 척해 왔다. 그런 주제에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니 몹시 열없어지는 기분이었다.

“뭐가 고마워. 해 준 것도 없는데.”

“아니에요.”

칼리에가 제법 단호한 어투로 부정했다. 해인이 멈칫하자, 칼리에는 입을 우물거리더니 덧붙여 말을 꺼냈다.

“아가씨 덕분에 저는 사실 아주 안전하게 지냈어요. 어리면 다들 만만하게 보고, 또 저는 여자애니까……. 여러모로 위험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이 전혀 없었어요.”

“……음.”

그런 것도 무언가를 해 줬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심정에 해인은 복잡한 낯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약간의 위안이 되는 부분은 있었다.

현대에서 지낼 때는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으나, 이 땅에 온 이후부터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일이 잊을 만하면 일어나고는 했다. 포로로 잡힌 이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마냥 외면하기만 했었는데, 칼리에에게 그런 식으로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었다.

인사가 끝난 듯하자 파트로클로스가 다가왔다. 해인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동의를 얻은 그는 칼리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날 따라와라. 네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칼리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마지막이라는 듯 해인을 힐끗 돌아보았다. 해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 등을 살짝 밀어 주었다. 파트로클로스를 따라가면서도 칼리에는 몇 번인가 뒤를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해인은 이내 완전히 멀어져 그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헤어짐이면 마음이 편하지.’

이제 칼리에는 가족을 만나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것이다.

그런 막연하기 짝이 없고, 그저 낙관적이기만 한 믿음이라도 가질 수 있는 헤어짐은 축복이나 다름없음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해인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막사를 바라보자 그때까지도 막사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아킬레우스와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웃어 보인 해인이 천천히 다가가자, 당연하다는 듯 그가 팔을 벌렸다. 그 품에 자연스레 몸을 기대며, 해인은 한숨처럼 생각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가능성이 없음을 알기에, 그저 공허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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