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9 폭풍
지휘관이 두문불출한 지 사흘에 이어 나흘째 되는 날, 진영에 방문자가 찾아왔다.
물론 그것이 특별한 일까지는 아니었다. 연합군의 진영은 대단한 기밀 장소가 아니었으니, 합당한 용건이 있다면 테베 시민이라도 방문은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잠시 전투가 멈추기 전부터도 방문자는 종종 찾아왔었다.
방문자들의 정체는 대부분 진영에 억류되어 있는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데려갈 용의가 있는 포로들의 친인척 혹은 친지들이었다. 값을 내고 데려가겠다면야 막아설 이유도 없으니, 보통은 온건하게 대우하며 챙길 것을 챙기고 돌려보내는 게 상식이었다.
이때 포로의 신분이 높으면 찾아오는 이들도 높은 신분인 만큼 지휘관에게 알려야겠지만, 현재 진영에 묶인 포로들은 전부 일반인이었다. 이들 정도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바쁜 지휘관을 불러낼 것 없이 파트로클로스나 포이닉스의 선에서도 얼마든지 처리가 가능했다.
다만 이번의 경우는 방문자가 데려가고자 하는 포로의 존재가 다소 특이했다.
“누굴 찾는다고?”
“갈색 눈, 갈색 머리카락의 어린 여자아이입니다. 키는 이 정도쯤이고, 이름은 칼리에인데…….”
“아.”
대략적인 인상착의와 이름을 듣자마자 파트로클로스는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저들이 찾는 게 누군지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다.
‘아가씨에게 붙여 드렸던 그 애 같은데.’
아킬레우스가 혹시 모른다며 같은 도시 출신의 포로들에게 뭐든 정보를 캐내 보라고 지시까지 했던 탓에 더 잘 기억이 났다.
당시 적당히 정보를 모아 종합해 본 결과, 그 애는 다른 곳도 아닌 팀블레 출신이고,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으며, 아버지가 하나뿐인 딸을 아주 예뻐했고, 집안 자체는 평범했지만, 먼 도시에 사는 친척이 아주 부유하다는 배경이 있었다. 마지막 요소가 조금 눈에 띄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평범했다.
‘아버지가 친척에게 몸을 피할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 잠시 도시를 떠난 사이 팀블레가 함락돼서……. 딸만 잡혔던 거라고 했었지.’
정황을 떠올리며 눈앞의 사람들을 다시 살펴보니 누가 누구인지도 금세 감이 잡혔다. 상대적으로 젊은 쪽이 아버지일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옷차림으로 미루어 그 부유하다던 친척 같다. 파트로클로스와 눈이 마주치자 아버지로 추정되는 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이 진영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제 하나뿐인 자식입니다. 그 애를 잃으면 먼저 지하 세계로 간 아내를 볼 낯이 없단 말입니다.”
곁에 앉아 있던 장년의 남성이 묵묵히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파트로클로스는 한숨과 함께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고작해야 어린 여자아이일 뿐이라면 그의 선에서 처리해도 상관없겠으나, 그 아이를 데리고 다니던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해인이었으니 이번에는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의사도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만약 해인이 그 아이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싶어 한다면 역으로 협상도 해야 한다.
자신의 막사에 두 명을 남겨 두고 바깥으로 나온 파트로클로스는 최근 며칠간은 일부러 쳐다보지도 않던 지휘관의 막사를 향해 제 발로 걸어갔다.
테베에 도착한 이후 당사자들끼리 그토록 복잡해 보이더니,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마자 저렇게 된 걸 보면 역시 무슨 사정이었든지 간에 끼어들 생각 말고 내버려 두는 게 답이었던 것 같다.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막사의 주변을 확인했다. 그 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럴 것 같았다.”
파트로클로스는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마음에 든 것은 독점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킬레우스의 성격상, 소리라도 들릴 만한 위치에 누군가를 세워 놓았을 리가 없었다. 진작 어디론가 물려 놓았을 것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과연 예상대로 길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의미가 있기는 한 건지 모를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병사들은 부지휘관을 발견하고 앉아 있던 의자에서 급히 일어나 인사를 건네 왔다.
“파트로클로스 님.”
“앉아 있었다고 뭐라 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마. 여기까지 쫓겨났나?”
“예…….”
“그럼 자네들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아무도 넘어오지 말라는 뜻이군. 고생이 많네.”
파트로클로스가 한숨과 함께 치하하자 병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오는 사람도 없어서요.”
“그래? 그럼 설마 내가 최초의 방문자인가?”
“아니요, 엊그제 포이닉스 님이 잠시 와서 점토판을 몇 개 전해 드리라 부탁하시고 가기는 했습니다. 파트로클로스 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파트로클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최초가 아니라니 좀 안심이 되는군. 다른 건 아니고, 혹시 아가씨께서 데리고 다니시던 갈색 머리카락의 어린 여자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아, 그 애요. 당연히 압니다. 어리다 보니 저희보다도 막사에 더 가까이 가는 게 허락돼서, 사실상 잡다한 일은 거의 다 그 아이가 맡고 있거든요. 지금은 식사를 가지러……. 아, 저기 옵니다.”
병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파트로클로스는 저만치서 큰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어린 여자아이를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까 전 만났던 남자로부터 들었던 인상착의를 확인차 다시 떠올려 보며 그는 칼리에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 안녕하세요.”
지척에 다다른 칼리에가 파트로클로스를 발견하고는 금세 겁먹은 듯 눈을 굴리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파트로클로스는 들고 있는 쟁반을 대신 들어 주라고 병사들에게 손짓으로 지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이름이 칼리에였지?”
“네, 네. 맞아요.”
“방금 듣기로 네가 막사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라던데, 말을 좀 전해 줄 수 있나 해서.”
그 말에 칼리에가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불안한 듯 막사를 곁눈질하는 걸로 미루어 봤을 때, 거기까지 하기에는 아무래도 지휘관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무력한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으므로 파트로클로스는 눈치껏 말을 바꿨다.
“아, 전하기 힘들면 가까이 가서 안쪽 상황만 좀 알아봐 줘도 되고. 개인적인 일로 바빠 보이거든 어쩔 수 없지만, 조용한 것 같으면 나한테 손짓을 보내 줘. 그럼 말은 내가 전할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대답한 칼리에는 다시 병사들로부터 쟁반을 건네받은 뒤 막사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병사가 말했다.
“파트로클로스 님 정도면 이렇게까지 할 것 없이 그냥 가까이 가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뭐……. 본의 아니게 뭘 듣는다 해서 날 죽이진 않겠지만, 안 그래도 예민한 사람 굳이 건드리고 싶지는 않거든.”
막사 앞에 덩그러니 위치한 스툴 위로 쟁반을 내려놓은 칼리에는 조금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이내 뒤돌아 파트로클로스에게 어색한 동작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행히 타이밍을 아주 못 맞추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대낮인데, 조용하다 해도 깨어 있긴 하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병사들에게 눈으로 인사한 파트로클로스는 성큼성큼 막사 앞으로 다가갔다. 칼리에의 앞선 보증대로 안쪽은 조용했다. 칼리에를 조금 뒤로 물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파트로클로스는 천을 앞에 두고 목소리를 냈다.
“아킬레우스?”
안쪽은 조용했다. 안 들렸을 리는 없으니 정말 이 대낮에 잠들어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재차 불렀다.
“아킬레우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불러 보고, 안 되면 칼리에를 찾으러 온 방문자들을 잠시 진영에 머물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되어서야 안쪽에서 희미한 기척이 들렸다. 파트로클로스가 반색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잠시 뒤 천이 걷히고, 오랜만에 보는 지휘관이 얼굴을 드러냈다.
“왜, 급한 일인가?”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본론이었다.
옷차림은 영 허술하지만 정작 시선만은 아주 또렷했다. 깨어 있으면서 처음 한 번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조그만 의심이 자연스레 피어올랐다. 파트로클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킬레우스를 바라봤지만, 사실 처음부터 별다른 기대는 안 했던 만큼 금세 의심을 접어 두고 협조했다.
“급하다면 급하지……. 사실 너보다는 아가씨께 전해 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불렀어.”
“해인은 왜?”
“저 애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는 그새 저만치 멀어져 병사들과 함께 있는 칼리에를 눈짓하며 조용히 말했다.
“가족이 몸값을 지불하러 왔는데, 아가씨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줄곧 데리고 다니셨으니 어쩌면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하실 수도 있잖아.”
“아…….”
납득했다는 듯 아킬레우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는 어딘지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은 태도로 대꾸했다.
“……잠시 있어 봐. 이야기해 볼 테니까.”
“그래.”
대수롭지 않게 수긍한 파트로클로스를 뒤로하고 아킬레우스는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등을 돌려 병사들과 칼리에에게로 다가갔다.
“칼리에.”
“예, 예?”
이름을 부르자 어린아이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봐 왔다.
“생각해 보니 이건 네 일인데, 아무 말도 안 해 주면 안 되겠지.”
파트로클로스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쓰게 웃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는 알아 둬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는 간략히 설명했다.
“네 가족이 몸값을 내고 널 데려가기 위해 왔다. 그들이 말하는 인상착의, 이름 모두 정확히 너와 일치하더군.”
“……네?”
분명 오랫동안 기다린 말이지만, 워낙 갑작스러웠기에 칼리에는 잠깐 멍해졌다. 어리둥절하게 파트로클로스를 응시하던 그녀는 상대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눈을 크게 떴다. 그 표정의 변화를 확인한 파트로클로스가 덧붙였다.
“다만 아가씨께서 계속 너를 데리고 다니셨으니, 그분께 말도 없이 너를 보내 버리면 서운해하실 것 같아서 바로 합의는 못 했어. 당장 얼굴을 볼 수는 없게 됐으니 이 점은 미안하군. 그리고 어쩌면 아가씨께서 널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네 가족과 네게 의사를 물어보고 조율해야 하니, 잠시 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어라.”
길게 이어진 말에 앳된 얼굴 위로 제법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였다. 파트로클로스의 눈에도 아주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근처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끼어들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 듯 몇 걸음 물러서서 입을 다물었고, 칼리에와 파트로클로스 역시 서로에게 더 할 말은 없었다.
자리를 뜰 수도 없던 그들은 한동안 침묵한 채 그 자리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