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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90)화 (90/149)

“제 말은.”

해인은 한숨을 삼켰다.

“……당신이 좋아서 힘들다는 뜻이었어요.”

“어째서?”

“언젠가는 두고 떠나야 할 테니까.”

이번에는 아킬레우스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해인은 조용히 속삭이듯 말을 이어 갔다.

“후회하지 않는다 해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떠올릴 때마다 불현듯 무서워요.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물론 그것마저 감당해야 할 몫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냥…….”

어떻게 보면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이 한 가지의 사실로부터 모든 게 비롯되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운명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귀환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침묵 끝에 아킬레우스가 중얼거렸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

해인은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긍정으로 볼 수도, 혹은 부정으로 볼 수도 있는 반응이다. 아킬레우스는 가만히 그 표정을 살피다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방금 해인이 토로한 것들은 아킬레우스도 늘 느끼던 것과 다름없었다. 언젠가 해인이 정말로 떠나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임을 상기하면 떠오르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모를 수는 없었다.

그건 오직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완벽히 같은 감정이었다.

때문에 해인의 말이 거짓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어서, 이어지는 입맞춤은 달래는 것처럼 느리고 부드러웠다. 그에 호응하며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목 뒤로 팔을 감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체온을 느끼면서도, 아킬레우스의 머릿속 한구석은 여전히 의문을 떨쳐 내지 못했다.

‘분명……. 무언가 더 있는 것만 같은데.’

완벽히 같은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드는 생각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눈을 내리떴다. 어째서 전부 말하지 않는지,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일인 것인지,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인지……. 온갖 의문은 기어코 마음을 다시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애써 막아 두었던 질척이는 감정들이 둑을 넘을 듯 찰랑였다. 상대를 붙잡아 두고 전부 가지고 싶은 마음이 절박할 정도였다.

느긋하게 이어지던 입맞춤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는 원래도 집요한 구석이 있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유독 더했다. 잠깐의 숨 쉴 틈도 없을 정도였다. 해인은 늘 그랬듯 오래지 않아 벅참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이전에 자주 그랬던 것과 달리 상대를 밀어내려 들지 않았다. 아주 뜻밖의 효과를 깨달은 탓이다.

온몸이 빈틈없이 닿아 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느껴지는 안정감이 있었다.

몸 위를 덮은 체온과 다소 벅찬 감각으로부터, 적어도 지금은 그와 떨어져 있지 않고, 동시에 그가 죽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직접적인 자극이 머릿속을 채우던 두려움을 어떻게든 쫓아냈다. 아킬레우스가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을 더 증폭시키는 요소였던 주변의 어둠은 어느 사이엔가 안락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이 멋대로 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인이 밀어내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아킬레우스의 눈 위로 이채가 스쳤다.

“……적어도 나와 있는 때는.”

한참 끝에 아주 조금 거리를 벌려 떨어지며, 그가 애써 단어를 만들어 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내게 전부를 줘.”

열 오른 눈을 마주하며 겨우 숨을 내뱉은 해인은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돌아간 뒤를 생각하지 마.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 이미 날 받아 줬잖아.”

뺨에 올라온 손 위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꺼지지 않은 의문들로 복잡한 머릿속과 혼란한 마음은 여전했으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답을 들을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것이라도 얻어 내고 싶었다. 그는 한숨처럼 속삭였다.

“날 좋아한다면, 그것만 생각해.”

그 말을 끝으로 아킬레우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왔다.

아킬레우스의 말투는 얼핏 명령형처럼 들렸으나, 정작 해인이 마주 보고 있는 눈빛은 명령보다는 오히려 허락을 구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해인은 아까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아킬레우스의 목과 어깨에 팔을 감고 그를 끌어당겼다.

질척하게 혀가 얽혔다 빠져나갔다. 뒤이어 턱선 위로 몇 번 닿는가 싶던 입술이 목으로 내려왔다.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이었지만, 그럼에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읏…….”

그러나 해인은 밀어내는 대신 아킬레우스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건 무언의 허락이었다. 그러자마자 입술이 닿았던 부분에 가볍게 이를 세운 듯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손이 옷자락을 밀어 올렸다.

모든 것을 듣고 싶지만 들을 수 없는 사람과, 차마 도저히 이야기해 줄 수 없는 사람, 둘 모두 서로가 절실하다는 공통점 하나만은 뚜렷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걸로 충분할 것만 같았다.

***

세상에는 함께 밤을 한번 보낸 것만으로도 뜻밖에 해결되는 문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해인과 아킬레우스의 경우에는, 사실 당연하게도……. 나란히 후자였다.

해인이 깨달았던 대로, 몸을 붙여서 체온을 나눌 때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실감되는 탓에 자연히 두려움도 흩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 말은 결국 붙어 있지 않을 땐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한번이나마 분명한 안정감을 누리고 나자, 떨어져 있을 때면 배로 기분이 혼란해지는 부작용마저 생겨났다.

아킬레우스의 입장에서도 절박함이 딱히 달래진 것은 아니었다. 뭘 해도 해인이 떠난다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해인의 정확한 내심을 알아내지도 못했으니 마음속은 변함없이 복잡했다. 그저 말한 것이 전부라고 상대를 믿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직감이 너무 기민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충족된 게 없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듯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마냥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런 마당에 테베에게 건넨 항복 제안의 유예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적어도 당분간은 전장에 나설 필요가 없어졌고, 해인은 원래부터 진영 내에서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불안정한 사람 두 명이 함께 지내고 있었으니, 할 만한 일이라고는 사실 불 보듯 뻔했다.

처음 몸을 겹쳤던 날 이후로, 그들은 인간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들만 충족시키면 남은 시간들은 전부 서로를 탐닉하는 것에 쏟아부었다.

저녁부터 늦은 밤이 되기까지 침대 위에서 얽혔다가, 아킬레우스의 팔을 베고 누워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해인은 문득 막사 벽에서 일렁이는 등잔불의 불빛을 보고 아주 새삼스럽고 뜬금없는 상념에 잠겼다.

‘……이래도 되나.’

오늘부로 아마 사흘째일 것이다.

나란히 이성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침대 위를 뒹군 기간을 떠올려 본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본인이 이에 대해 개탄할 자격은 없음을 그녀도 잘 알았다. 지난 며칠 내내 아킬레우스와 막사 안에서만 머문 것은 분명 그녀의 의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매번 생산적이지 못한 공포에 빠져 있기는 싫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명확하게 존재했으니, 이제 와서 뒤늦게 이성적인 척해 봤자 소용없었다.

‘그래, 이제 와서…….’

그리고 조금 더 스스로에게 냉정해지자면, 사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에 이어 지금도 체온이 느껴질 거리에 붙어 있으니 이런 생각을 뜬금없이 떠올릴 수 있는 여유가 그나마 존재하는 것이다. 해인은 그런 스스로가 어이없어진 나머지, 희미하게 한숨 같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작은 기척이었으나 귀신같이 알아챈 아킬레우스는 곧바로 이유를 물어 왔다.

“무슨 생각을 했어?”

“……며칠째인지 되짚어 봤어요.”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솔직하게 답해 주기로 결심한 지 오래다. 사실 이미 이전부터 그러고 있기는 했었다. 순순히 직전까지 하던 생각을 토로하며, 해인은 아킬레우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좀 뒤늦은 생각 같긴 한데……. 이래도 되나 싶어서요.”

그 말에 피식 웃은 아킬레우스가 해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안 될 건 뭐야.”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답한 그는 손을 들어 조금 흐트러진 해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뒤로 넘겼다. 뒤이어 손끝은 귓가를 향했고, 스치듯 귓바퀴를 어루만지더니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거기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던 해인은 그 손이 어깨를 지나 등허리에 닿아 온 순간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느 사이엔가 손길에서 담백함이 사라져 버린 탓이었다.

“아, 잠깐…….”

“응.”

무어라 말하려는 해인의 입을 입으로 막으며 그가 슬쩍 몸을 굴려 해인의 위로 올라왔다. 순식간에 천장을 가리고 시야를 채운 상대의 모습에 해인은 가볍게 눈가를 찌푸렸다. 가만히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또다시 이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해인은 한숨처럼 눈을 감으며 아킬레우스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상대의 절박함을 이해하는 탓이다.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은 아래로 내려가 목과 어깨에 낙인을 찍듯 머물렀다. 그사이 아킬레우스의 금빛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해인은 문득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아주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어느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을 모른 척하고, 받아 주지 않으려 회피하고, 연인 관계가 되는 것에 대해 몹시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이유.

‘끝이 정해진 관계가 언제까지 건강할지 장담 못 한다고 생각했었지.’

해인은 그때의 자신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지금 해인과 아킬레우스는 나란히 불안감에 빠져 있었고, 그것을 서로의 체온으로 달래 보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다른 생각 하지.”

“아……!”

그러나 생각이 더 이어질 수는 없었다. 집중하지 않음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아킬레우스가 불시에 깊이 몸을 겹쳐 온 탓이었다. 해인은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흠칫 떴다. 그러자마자 눈이 마주치고, 아킬레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속삭였다.

“똑바로 봐. 눈 피하지 말고.”

해인은 대답 대신 아킬레우스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팔에 힘을 줘서 상대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어차피 그녀도 이제 와서 지난 생각을 떠올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일찍이 실감하던 바였다.

느껴지는 감각에 생각을 온통 흘려보내며, 해인은 깊이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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