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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89)화 (89/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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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가 돌아간 이후,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그러나 해인은 도저히 잠들 기분이 아니었다. 사실 최근 며칠 내내 그렇기는 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했다. 아킬레우스가 일찍 돌아온 이유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이 그 원인이었다.

‘테베에게 항복 권유를 했단 말이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이미 리노스와 텔라몬으로부터 한번 전해 들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승리는 연합군의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테베의 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조만간 그들에게 항복을 권유해 볼 예정인 것 같다던 이야기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달리 말하면 테베가 항복을 받아들여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결국 전투는 며칠 이내로 끝난다는 뜻이야. 그렇게 되면 이제 정말로 남은 건…….’

해인은 한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일어나 앉는 기척으로 혹시 아킬레우스를 깨웠을까 봐 잠시 숨죽인 채 상대를 관찰했다.

예전 암살자가 침입했던 날, 고작 이름을 한번 부른 것만으로 언제 눈을 감고 있었냐는 듯 멀쩡하게 깨어나던 모습이 떠올라 쉽게 안심할 수 없었다. 몇 십 초쯤 지켜보고, 깨어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나서야 해인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무릎을 세워 그 위로 뺨을 얹으며 그녀는 눈을 내리떴다. 어둠이 어깨 위로 내려앉고, 그와 함께 꿈에서 크로노스를 만난 뒤부터 며칠 내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장소의 이름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트로이.’

그 이름만 상기하면 엄습하는 근거 없는 두려움과 불길함이, 또다시 뒷목을 서늘하게 만든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문제인 만큼 가라앉은 기분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긴 했지만, 과연 아킬레우스가 정말로 눈치 못 챘을지에 대해서는 해인도 자신할 수 없었다. 함께 있을 때면 늘 따라붙어 표정을 지켜보는 시선을 과연 얼마나 속였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서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 끝을 건드려 보았다. 생각해 보면 매번 입 맞추고 끌어안고 뺨이나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도, 정작 밤에는 별다른 일 없이 같은 침대에서 잠들기만 하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해인의 기분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바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왜, 잠이 안 와?”

어떠한 예고도 없이 반짝 눈을 뜬 아킬레우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선명한 목소리였다.

그가 깊이 잠든 줄 알았던 해인은 짧게 숨을 들이쉬며 급히 손을 뗐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를 보며 피식 웃은 아킬레우스는 역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해인의 긴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어 보았다.

해인의 걱정대로, 그녀는 아킬레우스만은 제대로 속이지 못했다.

손 틈 사이로 마치 모래처럼 흩어져 빠져나가는 머리칼을 보는 아킬레우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분명 지난번, 밤중에 잠시 나갔다 온 다음 날부터다. 본인은 티 내려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때부터 해인은 내내 다른 무언가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표정만큼은 늘 그랬던 것처럼 괜찮아 보여도, 간혹 조용할 때 홀로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갈수록 못 숨기기도 했고.’

대체 어디서 갑자기 문제가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간단히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인 듯, 사방이 조용해지는 밤이면 해인은 지금처럼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홀로 침잠하고는 했다. 그 탓인지 차분하던 눈매에 조금씩 예민함이 매달리는 게 아주 잘 보였다.

실은 이미 지나가듯 이유를 물어보긴 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에 지난 경험을 되살려 당장은 더 캐묻지 않았을 뿐이다. 아까 전과 같이 밤이면 종종 일어나 앉아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을 전부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었다.

그러나 마음은 그만큼 여유롭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해인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생겼다는 정황이 불쾌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만 원래부터 그런 면이 많았던 사람인 데다, 처해 있는 상황이 간단하지는 않으니 깊게 파고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말할 때까지 캐묻고 싶긴 했으나…….

‘그런다고 말할 사람이었으면 차라리 편했겠지.’

해인은 스스로 말해도 괜찮겠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이상 말 안 할 사람이다. 캐물어 봤자 난처하고 곤란한 얼굴이나 보여 줄 게 뻔했다. 이미 한번 겪어 봤으니 잘 알았다.

물론 그걸 알고 있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지는 건 아니었다. 괜한 희생자가 바로 오늘 낮의 오디세우스였다. 비록 그가 속을 제대로 알 수 없어 꺼려지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무례하게 굴었을 만큼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니란 걸 알았다. 괜히 예민하게 굴었던 것을 아킬레우스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그럴 정도로 여유를 잃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용케 해인을 내버려 두고 있는 건, 예전과 같이 그녀가 먼저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심은 때로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이제까지는 아킬레우스가 아무리 무방비하게 있어도 건드리지만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던 해인이 처음으로 손을 뻗은 참이었으니, 그것을 핑계 삼아서라도 확실한 답은 듣지 못할지언정 뭐가 문제인지 물어나 보고 싶었다.

고작 한마디를 던지고는 홀로 생각에 잠긴 아킬레우스가 제법 오래 침묵하자, 겨우 놀람을 진정시킨 해인이 먼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제가 깨웠어요?”

“어차피 늘 깊이 잠들어 있지는 않았어.”

“그런가요…….”

미안한 듯, 혹은 난처한 듯 눈을 내리뜨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킬레우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불시에 해인의 팔과 어깨를 잡아당겨, 그녀를 자신의 몸 위로 눕히고는 꽉 끌어안았다.

“아, 잠깐…….”

약간의 당황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해인은 반사적으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상대가 벗어날 수 없도록 허리와 등에 감은 팔에서 힘을 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요새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전장에서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에서 아킬레우스는 무언가를 인내해 본 적이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해 본 적 없는 짓을 이 정도씩이나 끌고 있었으니 더 견디기 어려웠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건 해인이 사정을 말해 주길 기다리는 것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다.

언젠가는 해인이 반드시 떠날 것임을 아킬레우스도 이전부터 충분히 인지는 하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 매 순간이 아쉬운 것이다. 상대의 모든 것을 전부 알아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이번처럼 무작정 인내해야만 하는 일이 벌어지다 보니 최근 들어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들끓을 때가 지나치게 잦았다.

완전하게 가지고 싶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고, 어떻게든 곁에 붙들어 놓고 싶었다.

간단한 단어로 정제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상대를 다치게 할까 봐 최대한 눌러 놓고 있었지만, 도저히 쉽지 않았다.

“……말해 줘. 뭐가 그댈 괴롭게 만들지?”

묘하게 억눌린 목소리였다. 본인의 짐작대로 아킬레우스를 속이지는 못했음을 깨닫고 멈칫한 해인은 이리저리 눈을 피하다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

“아무것도…….”

“거짓말.”

확신 어린 어조였다. 아킬레우스는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빙글 몸을 돌려 위치를 바꿨다. 위로 올라 덮어 오며 그는 해인의 뺨을 쥐어 왔다.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말이라도 하는 게 낫잖아. 아니야?”

평범하게 묻는 것 같았으나 어쩌면 호소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힘줘서 붙잡지는 않았지만, 뺨을 감싼 손은 고개를 돌릴 수 없을 만큼은 단단했다. 해인은 애써 눈이라도 피해 보려 했지만 그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번 마주하면 쉽게 눈을 돌리기는 어려운 눈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그대가 말없이 무언가 생각하는 낯을 하고 있으면, 뭘 떠올리는 건지, 어떤 걸 고민하고 있는 건지, 그대의 머릿속을 전부 들여다보고 싶어져서…….”

말조차 다 잇지 못하고, 끝으로 갈수록 속삭이듯 내려앉는 목소리였다. 해인은 침묵했지만 결국 응시해 오는 시선을 이기지 못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지금, 매 순간이…….”

사실상 속삭이는 것과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 괴로워?”

해인을 똑바로 바라보던 물빛 눈동자 속으로 일말의 흔들림이 스쳤다. 사방이 어두워도 이 정도로 거리가 가까운 이상 그 동요를 모를 수 없었다.

해인이 뜻한 바는 아킬레우스를 다시 볼 수 없을 곳으로 돌아가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현실과, 그가 피하지 못하고 겪게 될 불운한 운명이 다가오는, 그리고 어쩌면 그 죽음과 자신의 귀환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이 순간’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킬레우스의 동요를 읽자마자 자신의 말이 그에게는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음을 인지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해 놓고 후회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아…….”

해인은 작게 탄식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만이 상대를 더 상처 입히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불운한 운명, 그리고 근거라고는 없는 두려움마저 낱낱이 실토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남는 것은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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