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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흘렀다.
한 개인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전쟁은 흐름에 올라타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해인이 리노스와 텔라몬, 두 사람과 나눴던 대화대로였다. 테베는 계속해서 승리로부터 밀려나며 패배 일직선로를 밟아 갔다.
테베의 성벽은 그 나름대로 높고 튼튼하기는 했지만 트로이의 것처럼 신의 힘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애초부터 평야에 위치한지라 자연이 베푼 천혜의 요새도 없었으니, 오로지 인간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었다. 성벽의 일부가 쓰러지고 공성전의 균형도 깨진 순간, 연합군은 앞서 합의했던 대로 전투를 일시 중단했다. 그리고 테베의 왕에게 항복 권유를 보냈다.
딸을 보내어 혈맹으로 맺은 신의를 지키는 대신 나라의 끝을 맞이할 것인가, 신의를 버리더라도 목숨이나마 확실히 보장받을 것인가.
에에티온 왕을 존중하여 건네는 항복 권유였으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굴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테베의 왕 에에티온의 심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듯이, 늦은 봄에서 이른 여름으로 접어들어 화창한 날 오전의 일이었다.
이미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당분간의 유예도 함께 건넸다.
테베도 이대로 전쟁을 이어 가면 결국 그 끝에 남는 것은 폐허뿐인 패배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선하듯 내민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므로, 그날 전투는 양측의 합의를 거쳐 아직 해가 하늘 높이 떠 있을 시간임에도 이르게 끝이 났다.
한시적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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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과 테베 사이에서 오간 한시적 평화에 대한 합의가 끝났을 무렵, 해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또 늦게 일어났네.”
눈을 뜨자마자 비어 있는 옆자리를 확인한 해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최근에는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잦아서, 지금처럼 일어나는 시간이 다른 때에 비해 늦어지는 날도 제법 있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한창 마음이 초조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다. 심지어 이번에 머릿속을 채운 건 단순한 고민이 아닌 모종의 두려움이었으므로, 간혹 악몽을 꾸기까지 했다.
“하…….”
작게 한숨을 내쉰 해인은 곧장 몸을 일으켜 옷부터 갈아입고, 테이블 위에 놓인 대야의 물로 가볍게 씻었다. 이제는 옷을 입는 것도 익숙해진 지 오래여서 늦게 일어났을 때는 칼리에를 굳이 부르지 않는 편이었다. 칼리에도 그 사실에 적응해 아침에 해인이 일어나 있지 않으면 지금처럼 테이블에 대야만 올려 두고 물러나고는 했다.
나가도 좋을 정도로 상태를 정돈한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막사의 천을 걷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차피 막사 안에 그대로 머무르느냐, 아니면 나가느냐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으니 사실상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한 걸음 내딛자마자 제법 따가워진 햇빛이 곧장 눈을 찔러 왔다. 어느새 해가 떠 있을 때는 거의 여름처럼 느껴질 만큼 기온이 높았다.
무심코 눈가를 가리려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어?”
예기치 못하게, 해인은 막사 앞에 선 낯선 사람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은 성격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웃으며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무어라 말을 걸던 중이었다. 그러다 해인과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상대의 회색 눈동자가 놀란 듯 커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누군지 알 길이 없던 해인은 멈칫하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헉, 아가씨.”
말을 걸어 오던 상대의 이상 반응과 동시에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감지한 리노스와 텔라몬이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로 선 해인을 발견한 둘은 급히 대화 상대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런 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리노스만 뒤로 슬쩍 빠져나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주무시고 계신 줄 알고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리노스가 목소리를 낮춰 해인에게 사과했다. 그는 힐끗 뒤를 눈짓하며 말을 덧붙였다.
“저분은 왕자님께 용건이 있어서 오셨다는데, 아직 왕자님이 돌아오지 않으셨다 해도 스스로 막사 앞에서 기다리겠노라 말씀하셔서……. 다른 곳으로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리노스가 사용하는 단어들로부터 해인은 낯선 이가 높은 신분의 사람임을 짐작했다.
“아니에요. 그건 제게 사과하실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누구시기에…….”
말끝을 흐리며 해인은 다시금 상대를 힐끗 응시했다. 그는 햇빛을 똑바로 받으면 밝은 주황색처럼 보이는 적갈색 머리카락에, 흐린 날의 하늘 같은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지만 적당히 준수하고 친근한 인상으로 호감을 주기 쉬운 낯이었고, 나이는 리노스와 텔라몬, 두 사람과 비슷해 보였다.
해인의 물음에 리노스는 그제야 해인이 저 사람과는 완전히 초면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듯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바로 정확한 사실을 알려 주려 했다.
“아, 그렇군요. 저분은 바로 옆…….”
“내 소개를 하는 거면 내가 직접 하고 싶은데?”
이어지던 말을 끊고 불쑥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해인은 어느 사이에 근처로 다가온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텔라몬이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
끝까지 듣지 못한 말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해인은 주변의 반응을 슬쩍 확인했다. 리노스와 텔라몬은 난처해 보이는 기색이기는 했으나, 상대를 경계하고 적대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니 위험한 인물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남자는 확실히 조금도 위협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말이 끊긴 리노스는 찰나에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입을 다물고 반걸음 물러났다.
그런 그에게 씩 웃어 보인 남자는 이윽고 해인을 돌아보며 원하는 대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자, 아름다운 아가씨. 안녕하신가.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텔레마코스의 아비 되는 오디세우스라고 한다네.”
오디세우스. 아는 이름이다.
소개를 들은 순간 눈을 크게 뜬 해인은 몹시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킬레우스처럼, 그는 해인이 현대에서부터 이름을 알던 몇 안 되는 인간 영웅 중 한 명이었다.
‘이 사람이…….’
해인이 아는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이타카라는 작은 나라의 왕인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와의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키클롭스(외눈박이 거인)인 폴리페모스의 섬에 우연히 들르게 된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폴리페모스는 식인을 하는 괴물이었고, 오디세우스의 일행은 그에게 붙잡혀 모두 먹이가 될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오디세우스는 특유의 지혜를 발휘해 폴리페모스를 실명시키고 부하들을 모두 잃기 전 탈출에 성공하지만, 기껏 섬을 떠났으면 그대로 끝까지 잘 도망치면 되었을 일을 마지막에 자신이 누군지 이름을 밝혀버려 스스로의 앞날을 망치게 된다.
자신을 실명하게 만든 이의 이름을 알게 된 폴리페모스가, 오디세우스를 벌해 달라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작정하고 십 년 동안 바다를 떠돌게 만들 사람…….’
……폴리페모스의 아버지는 포세이돈이었다.
포세이돈이 나오는 탓에 제법 자세하고 꼼꼼히 읽은 이야기여서인지 아주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물론 이 이야기도 늘 그랬듯 해인이 진실 여부를 완벽히 판별할 수 없기는 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이 이야기는 미래에서도 꽤 유명한 축에 속한다. 그가 고향까지 돌아가며 겪는 모험을 엮은 책마저 존재할 정도인 것이다. 미래까지 남아 있는 아킬레우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이곳에서 확인한바 거의 실제였던 것처럼, 해인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는 유명세와 정보의 진실성은 분명 관련이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탓에 그만 미묘한 기분이 되어버린 해인은 천천히 소개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다.
“네, 안녕하세요……. 해인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그에게 함부로 아무 섬에나 내리지 말고, 만약 내리게 되거든 외눈박이 거인을 조심하라며 조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인? 특이하고 아름다운 이름이로군. 이름만큼 눈동자도…….”
넉살 좋게 말을 잇던 오디세우스가 별안간 멈칫하더니 홱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사적으로 그가 돌아본 방향을 향해 시선을 옮긴 해인은 곧장 이유를 알아차렸다. 애초에 오디세우스의 진짜 목적이었을 아킬레우스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해인.”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가 미처 아는 척을 하기도 전 해인에게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섰다. 마치 보호하듯 해인과 오디세우스의 사이에 위치한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뭐 하고 있었어?”
우호적인 관계의 옆 진영 지휘관이 눈앞에 있음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구는 태도였다. 당황한 해인은 얼떨결에 생각할 틈 없이 답했다.
“아, 저분과 인사를…….”
“어쩌다?”
“그냥 우연히요. 나왔더니 바로 앞에 계셨어요.”
그 답에 그제야 엷게 미소 지어 보인 그는 그제야 주변을 한번 가볍게 둘러보더니, 자연스레 해인의 앞을 완전히 막아서며 비로소 오디세우스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차피 오디세우스에 대해서는 특별히 궁금한 것이 없었기에, 시야가 막혔어도 그에 대해서 해인은 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그보다는 테베에 온 이후 언제나 해 질 녘에 돌아오던 사람이 갑작스레 한낮에 돌아온 이유가 더 의아했다. 앞을 가로막은 아킬레우스의 등을 올려다보며 해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한편 오디세우스는 질문을 들었음에도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벌어진 찰나의 광경에 당황하고 있었다.
‘방금…….’
그가 아킬레우스의 진영까지 방문하게 된 목적이라고 해 봐야, 사실 별것 없었다. 테베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작전에 대해 짧게 이야기할 것이 있었고, 그 김에 직접 방문해 이전에 언질을 주었던 첩자 내지 암살자에 대해서도 사정을 조금 물어볼까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킬레우스의 막사 앞에 도착했더니, 바로 그 막사에서 나오는 묘령의 아가씨와 갑작스레 마주칠 줄은 그도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킬레우스의 막사에서 나온 여자다.
한눈에 보더라도 포로의 신분은 아니었다. 깨끗하고 약간 앳된 얼굴은 어딘지 예민한 기색을 띠고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거기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은 없었다. 심지어 막사 앞에 있던 이들은 알고 보니 막사를 지키는 게 아니라 그 여자를 지키는 호위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호기심조차 안 되는 사람인 모양이군?’
오디세우스는 머리 좋은 사람답게 금세 진정하고 확신했다.
누구에게든 결코 손대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아킬레우스에게는 그런 면이 없는 줄 알았는데, 틀린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방금 전 보였던 모습 역시 일부러 보란 듯이 내보였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예민하게 날을 세울 만큼 중요한 사람이니, 여기저기 함부로 말 옮기고 다니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이 아킬레우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만약 적대적인 관계의 장군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얼어붙었으리라고 오디세우스는 장담할 수 있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상황을 이해하고 표정을 정리한 오디세우스는 순순히 용건만 해결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적대를 감수하기에 아킬레우스는 아까운 인맥이다.
전해야 할 이야기를 모두 전하고, 물어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사정도 조금이나마 들어 모든 목적을 달성한 오디세우스는 머뭇거림 없이 바람처럼 아킬레우스의 진영을 떠났다.
그러나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며 그는 머리 한구석으로 해인의 존재를 분명히 기억해 두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아킬레우스가 죽고 못 사는 여자라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과는 별개로, 그저 가볍게 생각하고 넘겨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일 것 같다는 직감이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