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87)화 (87/149)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 끝에 해인은 겨우 입을 뗐다.

“……괜찮습니다.”

물론 어이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상대는 신이었다.

물론 해인이 여기서 화를 내면 크로노스는 그조차 얼마든지 수용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의욕까지 생겨나지는 않았다. 아킬레우스에게도 말했듯, 해인은 자신이 뛰어들기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약간 허탈한 기분으로 웃고 말았다.

“말씀대로 제가 나서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사실을 감춘 것조차도 아니게 되었겠죠. 시간을 고정해 주셨던 덕분에 어차피 상처는 흔적조차 안 남았기도 하고요.”

“그렇더라도 그 정도의 부상은 처음이었을 텐데…….”

크로노스가 유감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 걱정 어린 태도가 진심이 아닌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크로노스를 향한 경계심을 무의식중에 상향 조정했다. 화를 내지 않는 것과 경계심을 세우는 것은 별개였다.

처음 포세이돈의 신전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질 때쯤, 해인은 그가 자신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확신을 완전하게 유지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해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도 시간의 균열을 보수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변의 사항이다. 그러니 만에 하나 신변을 위협할 만한 일이 더 벌어진다 해도, 이번처럼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의 규모일 것이다. 게다가 언어를 통하게 해 주고, 몸의 시간을 고정해 준 것처럼 위험을 모면할 수단도 준비해 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해인은, 크로노스가 왠지 무언가를 더 감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심쩍은 기분을 속으로 누르며 해인은 크로노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도 끝까지 유감스러워 하는 어조를 유지한 그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표정을 바꿔 무언가를 생각하는 낯을 했다. 말을 고르는 것처럼도 보이는 모습에 해인은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크로노스가 생각을 끝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이제 네 꿈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려고 했던 이야기들을 해 주어야겠군.”

크로노스는 잠깐 동안 해인을 내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눈빛에 해인은 의아한 낯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에 대고 희미하게나마 웃어 준 시간의 신이, 이내 조용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운명이 새로운 장소와 함께 다가오고 있구나. 그리고 너는 해야 할 일을 아주 잘해 주었단다.”

마치 예언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입을 연 순간, 직전과 분위기조차 다소 달라졌다. 게다가 그의 말 자체도 해인에게 있어 아주 중대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가벼운 의문만을 갖고 있던 해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잖아도 그녀는 아킬레우스의 죽음과 자신의 귀환 모두 트로이에서 벌어질 일이라고 확신 어린 짐작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동시에 팀블레에서 테베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한 적은 없으며 사건 또한 벌어진 적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크로노스의 말은 사실상 그에 대한 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결코 친절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장소와 운명이 다가온다는 알림은 그녀의 짐작이 틀리지 않다고 힘을 실어 주고 있었으나, 맡은 바를 잘해 주었다는 칭찬은 확신과 별개의 혼란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크로노스 님, 제가 해야 할 일을 잘 했다고 하셔도, 여기에 와서 지금까지 무언가를 한 적은…….”

고작 두 개의 문장만으로도 순식간에 초조해진 해인은 급히 말꼬리를 붙잡고 질문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에 대해서는 대답해 줄 수 없다는 듯 단호해 보이기까지 한 태도였다. 아무리 꿈속이라도 예언의 영역은 여전히 넘어가면 안 된다는 의미 같았다. 해인이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자 크로노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스스로는 무엇을 했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제는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 나로서는 안심이 되는구나.”

“크로노스 님.”

“물론 어떻게 흘러갈지는 끝까지 지켜볼 테니 걱정 말거라. 하지만……. 이제는 정말 네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단다.”

시간의 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음 순간 최후통첩이라도 하듯 속삭였다.

“곧 트로이에서 다시 보자꾸나.”

꿈의 마지막이었다.

***

깨어난 직후 해인은 한동안 넋을 놓은 채 꿈을 곱씹었다.

다소 늦게 일어난 것인지 아킬레우스는 없었고 막사 바깥도 조용했기에 외려 더 정신을 빠르게 차리기가 어려웠다.

크로노스를 실물로 마주한 것도 아니고, 꿈이라는 형태도 없는 공간 속에서 나눈 대화이다 보니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제법 시간이 소모됐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현실감이 없다 해서 단순한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크로노스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던, 깨기 직전에 들었던 그 말이 너무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곧 트로이에서 다시 보자고…….’

그건 어떻게 생각해봐도 해인의 귀환이 트로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돌려서 확언해 준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그녀 혼자서도 나름대로 확신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따져보면 결국 짐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완벽한 사실로 변화했다.

그러나 정작 해인은 자신이 뭘 했는지도 깨닫지 못한 마당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그 외에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느니, 새 장소와 함께 운명이 다가오고 있다느니, 하나같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에 부족하지 않은 발언들만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런 거 진짜 싫어.’

해인은 홀로 머리를 짚었다.

“곧…….”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사실 해인도 알고는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녀가 지금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질 이유는 없었다. 크로노스가 의미심장한 말들을 하고 가긴 했어도, 하나하나 정리해보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까지는 없는 발언들이었다.

‘……돌아가게 될 건 원래 알았으니까. 언제일지 전혀 몰라 막연했던 게 조금 덜 막연한 정도로 약간 구체화됐을 뿐이지. 예전에 포이닉스 님으로부터 테베 다음엔 트로이로 진격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비슷해.’

게다가 뭘 했는지 스스로 짐작 가는 게 없더라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를 했다면 그걸로 충분한 일이다. 이제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그대로 내려놓으면 된다. 운명이 다가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이미 예전부터 줄곧 각오해 왔던 것이었으니, 한낱 인간답게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모든 게 완벽했다.

……완벽하지만 해인의 정답은 아니었다.

처음 이 땅에 떨어졌을 때, 해인은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는 했다.

문제는, 그때로부터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새 비합리적으로 변화해 버린 본인 그 자체였다.

이제 해인은 자신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돌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딘지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기가 약간 구체화됐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이나 복잡한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변명할 말도 없었다. 심지어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미 예정되어 있을 누군가의 죽음을 고민하고 걱정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 일과 관련 없는 제삼자가 알았더라면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소모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그걸 알아도 그만둘 수 없으니까 문제인 거지만.’

해인은 고작해야 몇 시간 전이었을 어젯밤의 기억을 무심코 되새겼다.

등허리를 감싼 팔의 체온, 부드러운 별빛 아래서 더 선명하게 빛나던 눈동자, 그리고 마치 할 말이라고는 오로지 그것밖에 없다는 듯 속삭여 오던 고백.

영원할 것만 같은 순간이었지만 영원을 약속할 미래는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마음만은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해서, 곁에 있는 그때만큼은 우습게도 불안하지조차 않았다.

‘……그래서 혼자 있으면 지금처럼 온갖 생각이 다 드는 걸지도 모르겠네.’

깊이 한숨을 내뱉은 해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복잡했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이 꿈을 통해 얻은 것은 돌아가게 될 시기가 아주 약간 구체화된 것, 그리고 굳이 표현하자면 이유도 모르는 사이 졸지에 받게 된 부담 면제 정도다. 예전이었다면 후자의 것에 기뻐했을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곧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착잡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막연했던 헤어짐이 선뜻 다가온 느낌은 거의 불쾌할 정도였다.

‘그런데…….’

헤어짐을 떠올린 순간, 해인은 문득 드는 생각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킬레우스의 운명도, 해인의 귀환도, 모두 트로이에서 벌어진다고 확정된 지금이다. 이제까지 해인은 이 두 개를 완전한 별개의 문제로 취급해 왔다. 어느 쪽이 먼저일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두 개를 겹쳐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결이 다른 문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 개 모두 시기가 정확하게 확정되자, 해인은 불현듯 기묘한 의혹에 휩싸이고 말았다.

‘굳이 나를 아킬레우스의 곁에 붙여둔 건 크로노스 님이잖아.’

포세이돈의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에도 아랑곳 않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며 열심히 설득하던 시간의 신이 떠올랐다. 해인은 침대에 앉은 그대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하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름이 끼쳤다. 해인은 뒤를 이어 떠오르는 생각을 막지 못했다.

‘……혹시 내 귀환과 그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나?’

답해 줄 존재 없는, 아득하게 두려운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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