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블레에 있을 적에도 꼭 지금과 비슷하게 바깥으로 산책을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에 비해 날이 조금 더 서늘한 편이었고 들판의 꽃들도 허리 숙여 자세히 살펴봐야 보일 만큼 작았는데, 이제는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굳이 시선을 내리지 않고도 꽃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사방이 화려했다.
해인의 눈에는 전부 현대에서 본 적 없는 것 같은 묘하게 낯선 꽃들이었지만, 무려 삼천 년씩이나 시간의 차이가 나고 있으니 그 부분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며 품종이 변하고, 사라지고, 새롭게 생겨나며 자신에게 익숙한 꽃들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흥미로웠다.
천천히 근처를 둘러보던 해인은 무릎 높이까지 키가 큰 붉은색 꽃을 발견했다. 전부 낯선 꽃들 사이에서 묘하게 생김새가 익숙하다 했더니, 에우도로스가 꺾어다 주었던 꽃이었다. 다만 직전에 약속한 것도 있는 만큼, 해인은 곁에 있는 사람을 신경 써서 그 꽃에 오래 눈길을 주지 않고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우연처럼 테베의 성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테베와도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이네요.”
무심코 중얼거리듯 말한 것이었으나, 아킬레우스는 놓치지 않고 곧바로 대답해 왔다.
“그렇지. 그래도 연합군이 임시로나마 점령한 장소니까 괜찮아.”
“……음, 걱정되거나 불안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어요.”
날이 밝으면 전쟁터가 되는 땅과 아주 멀지만은 않은 장소임에도 이 정도로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이 신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킬레우스에게 몸을 돌렸다.
“아까도 잠시 생각했던 건데요.”
“응.”
“안전이라거나, 신뢰라거나……. 그런 부분에 대해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며칠 전에도 말했듯 당신의 책임감을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이미 끝난 일이고 보다시피 지금 저는 멀쩡하잖아요.”
“……강박이라.”
“그게 마음대로 안 될 수는 있죠. 알지만 제가 계속 이러는 건, 당신은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게 이미 많을 텐데.”
잠시 망설이던 해인이 작게 덧붙였다.
“거기에 제 문제까지 얹어 놓으면 짐이 너무 무거울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잠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하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해인이 설마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한숨처럼 부정했다.
“아니야.”
“아닌가요?”
“절대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해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내 의무가 있다고 한들 그것과 그대를 저울질할 수는 없지. 누구도 내게 있어 그대가 짐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걸.”
짐이라면, 오히려 최근 들어서는 그의 의무가 그 단어에 더 부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킬레우스는 눈을 내리뜬 채 지나간 시간들을 잠시 반추했다. 십 년 전, 예정된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해 돌파하고자 결심하며 스스로 짊어진 의무였으니 그것을 짐이라고 여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이상, 그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사감 같은 것도 어지간해서는 거의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그렇지 않음을, 확고했던 결심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음을 그는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전에 그런 적이 없었으니 달라진 스스로를 눈치채지 못할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렇게 된 이유도 알았다. 그건 모두, 잡을 수조차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다.
“나는…….”
곁에 있지 못할 때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언젠가 헤어져야만 하는 미래가 예정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한없이 초조해지고는 했다. 유독 해인과 관련된 일에 있어 침착함을 잃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떠오르는 것은 많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언어로 내뱉기는 어려웠다. 아킬레우스는 말문이 막힌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으로 깨달았다.
무언가 말이 더 이어질 것 같은 서두 이후로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음에 해인은 고개를 들어 아킬레우스의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 이미 밤이 된 지 오래였지만, 가까운 거리였으니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나와 같이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 속으로는 온갖 어지러운 감정들이 일렁였다. 마치 맑은 물 위로 일어나는 파문 같았다.
시선이 똑바로 맞닿았을 때, 아킬레우스는 미처 깨닫지도 못한 사이 읊조리듯 말하고 말았다.
“……그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한없이 복잡한 모든 감정을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정확한 문장이었다.
초조함이나 씁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결국에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가지들인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었다 해서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완벽하고 아름다운 요소들로만 채워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명백했다.
길지 않은 말 속에 담긴 복잡함을 전부 이해한 듯 해인이 팔을 뻗어 아킬레우스의 목을 감아 왔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건, 달리 말하면 본인 역시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이끄는 대로 아킬레우스가 순순히 고개를 내렸다. 가까워진 귓가에 대고 해인은 가만히 속삭였다.
“저도요.”
……이것이었다.
완벽하고 무결하게 아름답지 않아도 놓을 수 없는 명백한 이유,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깨달을 때 느껴지는 기쁨이다. 그건 다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대답하는 대신 가느다란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런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해인은 넓게 펼쳐진 지평선과 닿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별이 거짓말처럼 반짝이고 있다.
해인은 문득 직감했다. 현대로 돌아가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어째서인지 익숙한 천장이었다.
해인은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다음 순간 이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벼락같이 깨달으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막사의 천장도 익숙하기는 했지만, 지금 눈에 들어오는 풍경과 비하지는 못했다. 해인은 황망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천장은 물론이고, 주변의 풍경까지 모두 더없이 익숙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어릴 적부터 종종 방문하고는 했던 섬의 별장이었다. 그곳은 해인이 기원전의 땅에서 눈뜨기 전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현대’의 장소다.
하지만 해인은 아킬레우스와 진영 근처의 들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일 없이 그대로 잠들었던 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러니 눈을 뜬다면 보이는 것은 막사의 천장이어야 했다.
지금처럼 현대의 익숙한 별장 내부가 보이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왜…….”
무심코 흘러나온 아연한 중얼거림에 답이 돌아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단다. 이건 꿈이거든.”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어깨를 떨 정도로 놀란 해인은 급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익숙한 낯이었다. 기원전의 땅으로 떨어진 이후부터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던 신, 크로노스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크로노스 님?”
“오랜만이구나, 해인.”
해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시간의 신을 바라보았다.
“이게……. 꿈이라고 하셨나요?”
크로노스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해인의 표정을 읽고서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하긴, 네게는 낯선 상황일 테지. 자세히 말하자면 꿈은 맞지만……. 그래. 현대적으로 설명했을 때 네 무의식의 발현은 아니라는 뜻이란다. 내가 너를 보러 오기 위해 네 꿈이라는 형태를 취한 셈이지.”
“현대적으로 설명…….”
“어차피 너와 나 둘뿐이지 않으냐. 네가 이해하기에도 이쪽이 편할 테고.”
느긋한 어조에 해인은 천천히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상황이 완전히 납득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긴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탓이었다. 크로노스는 그런 해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 내가 분명 너를 종종 살펴보겠다고 이야기했었지.”
그는 문득 쓰게 웃더니 해인의 발치를 눈짓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전 네가 아킬레우스의 곁에 머물러야 된다는 말을 할 때는, 직접 나서지 않으면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실은 그런 미래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할 수 있던 말이었지.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포세이돈 님과 너를 안심시키려 사실을 감춘 셈이니,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마.”
그 말에 해인은 미처 잊고 있었던 크로노스의 발언 하나를 정말로 뒤늦게 상기해 냈다.
“아…….”
그러고 보니 포세이돈의 신전에서 만났을 때, 그는 분명 ‘해인이 나서지 않는다면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었다. 그때는 포세이돈과 해인 둘 다 그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부상의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나, 달리 생각해 보면 해인이 나서서 뛰어들 경우 얼마든지 부상을 입게 될 것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뒤따랐던 조언도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때는 그저 시간이 고정되었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정확한 설명을 해 주기 위해 일종의 예를 들 겸 조언해 준 것뿐이라 여겼던 말이었다. 해인은 천천히 그때 크로노스가 했던 말을 속으로 되짚었다.
‘지나치게 함부로 몸을 던지지는 말 것, 반나절 동안 살아 있지 못할 정도의 부상은 입지 않도록 주의할 것…….’
거의 두 달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조언의 함의에, 그녀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