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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다 질 때쯤, 약속했던 대로 해인은 아킬레우스와 함께 막사 바깥으로 나섰다.
하늘은 지평선 끝자락에만 희미하게 빛이 남아 있을 뿐, 모두 짙은 남색으로 덮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남아 있는 태양의 흔적도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주변이 어두워진 만큼 진영 내부는 조용했고, 지나다니는 병사들도 거의 없었다. 해인과 아킬레우스가 걷는 동안 두 번쯤 마주친 병사 몇몇은 모두 잠깐 놀라다가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했다. 두 사람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명백히 키가 큰 탓에, 마주친 이상 몰라볼 수는 없었다.
가볍게 인사를 받아 주고 스쳐 지나가는 아킬레우스와 그 곁에서 나란히 걷는 해인의 뒤로는 어쩔 수 없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물론이고, 해인도 그에 대해서 굳이 신경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해인으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늦은 저녁의 온화한 공기가 더 인상적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런 한가로운 감상도 잠시였다. 애초에 제안을 건네 온 사람이 아킬레우스였던 만큼, 그가 이끄는 대로 가 주려던 해인은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쪽은 마구간 방향이 아닌가요?”
“맞아, 걸어가기에는 그대가 힘들 것 같아서.”
“말을 타려고요?”
이어지는 물음에 아킬레우스는 가볍게 웃으며 해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 내켜 하지 않는 기색인 것을 눈치채서였다.
그는 테베로 오는 길목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이유로 짐작했다. 해인은 승마에 대해서는 분명 본인 스스로 자신이 없다고 이야기했었다. 포세이돈이 해인을 대하던 태도를 떠올려 보면, 그가 말들의 신이기도 한 것과는 별개로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숙련되지 않으면 장정들도 말의 등에서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크게 다치거나 죽는 사람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포세이돈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을 테니, 그토록 아끼는 딸이 만에 하나 사고를 겪을 가능성을 애초에 원천 차단하려 들었다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혼자 말에 오를 일은 없어. 내가 같이 탈 테니까.”
“음.”
해인은 짧게 침음했다. 말에 타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잘못 짚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말에 혼자 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정황상 시간이 늦었으니 하인을 시켜 전차를 꺼낼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 와중에 해인은 자신이 지난번에 말을 제대로 탈 줄 모른다고 이야기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도 기억하는 것을 아킬레우스가 기억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 남는 것은 결국 방금 전 아킬레우스가 말한 것처럼 함께 타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해인은 분명한 유감이 존재했다. 그게 문제였다.
“……그것도 이미 해 봤잖아요.”
잠깐의 침묵 끝에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힐끗 올려다보며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 말에 아킬레우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다른 때도 아닌 처음 만났을 때 아킬레우스가 자행한 일이었다.
“별로였나?”
“……솔직하게?”
“그렇게 되물을 정도야?”
대화가 여기까지 왔으면 말을 아끼기 어려웠다. 해인은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하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눈앞으로 마구간이 보이기 시작했던 탓이다.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응.”
“솔직히 그때……. 말 등에 올랐을 때부터 손잡은 걸 조금씩 후회했어요.”
떠올리려고 하면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아킬레우스가 내민 손을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제대로 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상황에 떠밀려 그 손을 잡았고, 곧바로 말의 등 위로 끌어올려졌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말 등이 새삼스레 높더라고요…….”
그 외에도 불안정하던 균형감이나, 거세게 뺨을 스치던 바람까지 모두 다 생생했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복잡한 감상에 젖어 말을 내뱉은 해인은, 곁에서 멈칫하는 아킬레우스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 어디까지나 그때 그랬다는 이야기예요. 다른 게 아니라, 올라타자마자 당장 떨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어서.”
“……이번에는 다를걸.”
해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킬레우스가 고개를 숙여 해인의 눈가에 살짝 입 맞추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때는……. 내가 억지로 그대를 붙잡고 있었잖아. 그대는 내게 기대지 않았고, 그럴 정도로 날 믿지 않는 사람을 떨어트리지 않으려면 안정감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
해인은 약간 당황하며 가까이 다가온 아킬레우스의 눈을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눈동자가 무언가를 바라듯 엷게 빛났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싫어도 싫지 않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은 마당인데, 심지어 아킬레우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 해인은 그를 믿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할 바 없이 확실한 신뢰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인 해인은 결국 한숨처럼 긍정하고 말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럼 이 문제는 해결됐군.”
아킬레우스가 다시 허리를 펴며 산뜻한 어조로 답했다.
그들은 다시 걸음을 옮겨 마구간 앞으로 향했다. 울타리 앞 의자에 앉아 넋을 놓고 있던 하인이 가까워진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그가 순식간에 긴장하며 몸을 곧추세웠다.
“와, 왕자님.”
“조용히.”
당황한 탓에 목소리가 커지는 하인을 진정시킨 아킬레우스가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는 사이, 해인은 마구간 한편에서 필리아를 발견했다. 말은 오랜만에 보는 주인이 반가운 기색이었다. 다만 당장 마구간에서 꺼내 줄 수는 없으므로 해인은 가볍게 손만 흔들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 아킬레우스의 지시를 들은 하인은 필리아가 있는 곳과 다소 떨어진 곳의 울타리를 열고 들어가더니, 짙은 갈색의 말 한 마리를 끌고 나왔다. 가까이 다가온 말은 가만히 서 있던 해인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쩐지 친한 척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의아하게 말을 돌아본 해인은 이내 정말로 그 말이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녀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방금 전까지 이야기했던 문제의 첫 만남 당시 그들이 탔던 바로 그 말이었다. 다소 긴가민가한 기분에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자 그가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알아보나? 그때 그 말이 맞아.”
그는 힐끗 말을 눈짓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만회하려고.”
“아…….”
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킬레우스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무언가 거슬리거나 신경 쓰이는 것이 있으면 마음속에 꼭 담아 두는 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탓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말을 잘못한 해인의 탓도 분명 있었다. 그녀가 어이없이 웃는 동안 먼저 말 위로 올라탄 아킬레우스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해인은 눈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이전과 달리 근처에 있던 하인이 눈치 빠르게 발판을 가져다 놓아 말 등에 오르는 것도 체감하기에 훨씬 쉬웠다.
단숨에 끌어 올려져 아킬레우스의 앞에 앉게 된 해인은 낯설지 않은 높이에 무심코 웃었다. 허리 옆에서 뻗어져 나온 팔이 고삐를 쥐는 것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바로 저 모습을 보는 순간 후회를 시작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안장도 등자도 없는 말 등에 불안정하게 올라가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겁을 먹었었다. 그러나 이제 해인은 자신이 그 정도의 위기감이나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아킬레우스의 말대로 동승자를 향한 신뢰의 문제가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불편해?”
“……아니요.”
생각해 보면 그때, 아킬레우스의 표현대로라면 ‘억지로’ 해인을 붙잡고 있었을 때도 그는 도착할 때까지 해인을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완전히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해인은 약간의 긴장도 의식적으로 풀며 상대의 품에 등을 기댔다.
“잘 다녀오십시오.”
말의 상태를 마지막까지 확인한 하인이 둘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어딘가 흐뭇해 보이는 낯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가볍게 눈짓으로 답한 아킬레우스가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말은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걷기 시작하다가, 이내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이전에는 아킬레우스도 밤중에 잠시 빠져나왔던 것인 만큼 급히 돌아갈 필요가 있어 출발 직후부터 빠르게 내달린 감이 있었다. 그런 탓에 함께 타고 있던 해인은 다짜고짜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세찬 바람을 마주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때와 달랐다.
말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달려 나갔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는 동시에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없던 지난번과 달리, 안장도 없이 달리는 말 등에 올라타 있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점이 낯설기는 했다. 그래도 해인은 말에 오르기 전 아킬레우스가 했던 말대로 그를 믿었다.
각오했던 것보다는 확실히 안정적이고, 뺨을 스치고 머리카락을 훑으며 지나가는 바람이 기꺼운 정도였다. 해인은 눈을 내리뜨고 깊이 숨을 내뱉었다. 한동안 암살 건으로 인해 행동반경이 좁았던 것에서부터 비롯된 약간의 답답함이 완전히 흩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을 열면 혀를 깨물지도 몰라 침묵을 지키기는 했지만, 어색하기보다는 안온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려 도착한 곳은 진영에서 조금 떨어진 넓은 들판이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마자 시야를 꽉 채우는 들판의 풍경에 해인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 아킬레우스는 먼저 말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해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킬레우스가 어째서 여기에 데려오려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손을 잡고, 품에 안기듯 해서 땅에 발을 내디딘 해인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에우도로스가 여기서 꺾어 왔었나 보네요.”
그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등과 허리를 감싼 팔을 풀어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아마 그랬겠지.”
“알았어요. 그 이름 안 꺼낼게요.”
상대의 표정과 더불어 풀리지 않는 팔을 확인한 해인이 달래듯 덧붙였다. 아킬레우스는 입가를 슬쩍 비트는가 싶더니 고개를 숙여 해인의 이마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꼭 그렇게 해. 나도 부당한 이유로 부관을 차별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해인은 짧게 한번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가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발아래로 풀잎이 사박사박 밟히는 소리가 났다.
별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들판 위로, 꽃들이 온통 만발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