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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84)화 (8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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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막사 앞에서 아킬레우스를 배웅하고 몸을 돌린 해인은 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꽃들을 뒤늦게 발견했다.

깜빡 잊고 있던 것들이다.

그녀는 멈칫하며 꽃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전날 아킬레우스가 갑작스레 키스해 오는 탓에 에우도로스가 줬던 꽃들을 바닥에 죄다 떨어트렸고, 그에 신경을 쓸 틈도 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으니 남겨진 꽃들은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흩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꽃들은 지금 해인의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한곳에 모여 멀쩡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거…….’

바닥에 떨어트렸던 꽃들을 전부 주워 모아 저렇게 정리해 둘 만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두 명뿐이다. 해인은 머뭇거리며 눈을 굴려 근처에 서 있던 리노스와 텔라몬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아침부터 묘하게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가, 해인과 아킬레우스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자 그제야 눈 굴리기를 그만두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여상하게 넘겼던 그들의 태도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깨달은 해인은 순식간에 열없어지고 말았다.

‘어른 앞에서 보일 만한 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녀도 어른이긴 했지만 리노스와 텔라몬은 해인의 나이 두 배쯤 되는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조금 숨고 싶은 기분으로 해인은 천천히 꽃을 주워 들었다. 그녀가 멈칫했을 때부터 슬쩍 해인의 낯빛을 확인하던 리노스가 해인의 뒷모습에 대고 아주 온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에우도로스 님의 성의이니 만큼 모아서 근처에 두었습니다. 아마 상한 곳은 없을 겁니다.”

해인은 어색하게 그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혹시 해인이 민망해할까 봐 신경 쓰는 듯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였다. 그들의 배려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완전히 태연해질 수는 없었다. 해인은 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하다가, 결국에는 반쯤 도망치듯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테이블에 꽃들을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여기 안에만 있어야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면에 있어 해인의 낯은 그리 두껍지 못했다.

그 다짐대로 해인은 그날 저녁이 될 때까지 막사 안에서 칼리에와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암살자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는 거의 대부분 오늘과 별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날이 많이 따뜻해졌기에, 낮 동안에는 막사의 문을 막아 둔 천도 잠시 걷어 두어서 굳이 바깥에 나가지 않더라도 햇빛이나 바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의 절반이 지나고 군대가 돌아올 즈음이 되었음을 확인한 해인은 이번에도 아킬레우스가 오기 전에 칼리에를 먼저 돌려보냈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이후부터는 늘 칼리에가 아킬레우스를 마주치지 않게 신경을 쓰고는 했다.

막사 안에 혼자 남겨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은 점차적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이제는 누굴 기다리는 게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무섭네.’

아침부터 내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꽃의 얇은 잎을 만지작거리며 해인은 눈을 내리떴다.

처음 크로노스를 대면하고 그에게 이 일의 전말을 들은 이후, 그녀는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에 대해 언제나 깊이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많지 않아 한계는 명확했지만 최소한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을 놓은 적은 없었다. 깊이 생각하느라 자주 입을 다물고 침묵하다 보니 리노스와 텔라몬이 걱정스레 바라본 적도 실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는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줄었다.

‘그러고 보니…….’

깨닫고 보니 명백했다.

여전히 가지고 있는, 심지어 해결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더 고민하지 않는다는 건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겼거나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는 뜻이 된다.

‘내 경우에는 두 개 다겠지.’

전자의 경우처럼 정신적 여유가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벌써 두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이곳에 머물렀으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싫어도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이 땅에 적응한 김에 더 적극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해인은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크로노스는 원인이 아니었다. 그가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 말했었고, 해인도 그 말을 믿는 게 이득이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설득하고는 했지만, 사실 설득이 필요하다는 사실부터가 그 말을 무의식적으로는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해인을 지금처럼 무심코 상황에 안주하게 만든 주된 원인은, 부정할 수 없게도…….

“해인?”

“……아.”

해인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시간상 곧 돌아오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직전까지 떠올리던 사람이 어느새 실제로 나타나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놀라게 되는 법이었다. 크게 뜬 눈을 몇 번 깜빡인 해인은 그때까지도 내내 만지작거리던 꽃잎을 그제야 내려놓았다.

“언제 왔어요?”

“방금.”

짧게 답한 아킬레우스가 테이블을 짚고 몸을 숙이며 뺨에 입을 맞췄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넋을 놓고 있지?”

입맞춤과 동시에 질문이 따라왔다. 어투 자체는 여상했으나 지근거리에서 선명하게 이채를 띤 푸른 눈을 스치듯 마주한 해인은 그 속내가 말투만큼 잔잔하지는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되게 궁금해하네.’

어차피 별다르게 대단한 고민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이럴 때는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해인은 다시 허리를 펴고 바로 선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올려다보다 속삭이듯 대답했다.

“당신 생각을 했어요.”

아킬레우스까지 생각이 도달했을 때 본인이 눈앞에 나타난 셈이었으니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답에 아킬레우스는 어쩔 도리 없이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예전부터 해인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무슨 고민을 하는지 늘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알고 싶은 동시에 조금은 두려웠다. 아마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는 답을 듣게 될까 봐 꺼렸을 가능성이 컸다.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기어코 질문을 꺼냈긴 하지만, 내심 긴장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마당이었으니, 이런 답이 돌아오리라고는 예상조차 못 했다.

잠시 침묵하던 아킬레우스는 이내 반쯤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고작 한마디의 문장이라도 누가 뱉었느냐에 따라 받아들일 때의 기분이 다르다는 것을 이 정도로 절실히 느끼게 될 줄은 몰라서였다. 문득 상황 자체가 실감이 나지 않아 그는 자리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고 팔을 벌려 보였다. 그 행동에 해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의자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 왔다.

아킬레우스가 억지 부리듯 손을 뻗은 것이 아니라, 해인이 스스로 걸어 품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토록 안달 내던 사람의 마음이 정말로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정말로?”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없는걸요.”

“하하…….”

깊은 충족감을 만끽하며 짧게 웃은 아킬레우스는 이내 해인을 들어 안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연히 아킬레우스의 다리 위에 앉게 된 해인은 잠시 눈을 굴렸지만, 이제 와 벗어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완전히 몸을 기댔다. 안정적으로 등을 받쳐 안으며 아킬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도 바깥으로는 전혀 나가지 않았다면서.”

“그랬죠.”

“……그대가 안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든 점에서는 할 말 없지만, 행동으로 옮긴 자들을 잡았으니 막사 근처로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야.”

“음, 신뢰를 잃어서 같은 이유는 아니고요…….”

말끝을 흐리며 해인은 여전히 테이블에 놓여 있는 꽃들을 힐끗 응시했다.

저 꽃들을 볼 때마다 전날의 일이 생각나 민망해진 탓이라고 솔직하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어제 막사로 들어온 직후 ‘이런 행동’은 자제해 달라고 말했었다면 모르겠지만, 바라봐 오는 시선에 말문이 막혀 유야무야 넘어간 건 결국 해인이었다.

해인으로서는 짧게 바라본 것이 다였지만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아킬레우스는 그 찰나에 시선이 이동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해인의 눈길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린 그는 아까 전 막사로 들어왔을 때 스치듯 확인한 꽃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저건.”

해인은 입을 다물었지만 아킬레우스는 비상한 눈치로 금세 꽃의 출처를 알아차렸다.

“아직 있었군?”

금세 목소리가 묘하게 비딱해졌다.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잠시 동안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에우도르스가 꽃을 준 이유에 대해서는 전날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감정적인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리노스 님과 텔라몬 님이 모아서 막사 옆에 놓아두셨더라고요…….”

“……그들이?”

“에우도로스의 성의니까 챙겨 두었다고 하셨어요.”

달리 말하면 그 둘이 보기에도 에우도로스는 본인 입으로 말한 감사의 표시 외에는 다른 사감이 그다지 없어 보였다는 뜻이다. 아킬레우스는 잠깐의 침묵 끝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넓게 갖는 게 쉽지 않군.”

유감이라는 것 같은 어조에 해인이 작게 웃었다. 아킬레우스는 품에 안긴 이를 조금 더 힘주어 끌어당겼다.

아까 전 막사 바깥에 있을 때, 리노스와 텔라몬으로부터 해인이 오늘도 내내 막사 안에만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이전에 비슷한 일을 한번 해 보기도 했고, 그 경험에 따르면 어렵지도 번거롭지도 않지만 효과는 아주 좋은 일이니 지금처럼 대화를 좀 나누다 자연스럽게 권해 볼 생각이었는데, 테이블 위의 꽃을 보게 되자 해인이 꼭 받아들여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강렬해졌다.

“해인.”

“네.”

“나중에 해가 완전히 질 때쯤……. 바깥에 나가 보지 않겠나?”

“바깥이요?”

뜬금없는 말에 해인이 고개를 들었다. 되묻는 말에 아킬레우스는 설명을 덧붙였다.

“진영 밖으로. 내가 같이 나갈 거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약속해. 이번만큼은 신뢰를 깨 버리는 일이 없을 거야.”

안전 여부에 대한 설명이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길었다. 지난 사건들이 벌어지는 동안 해인은 거듭해서 괜찮다고 말했고, 아킬레우스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듯 굴었어도, 그가 정말로 그 일들에 대해 마음 깊이 태연하지는 않음을 드러내는 듯했다.

해인은 약간 난처한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다시금 말할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아킬레우스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으로라도 상대를 저 강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요.”

그 답을 듣고서야 아킬레우스는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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