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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83)화 (83/149)

***

아킬레우스와 해인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본의 아니게 그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든 광경을 목격한 리노스와 텔라몬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멍하게 눈을 깜빡이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바닥에 버려진 꽃들로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에우도로스 님의 성의인데……. 수습이나 해 둘까?”

“그러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굽히고 앉아 주섬주섬 꽃을 한 송이씩 주워 들었다. 두 사람이서 줍는 만큼 수습은 금방이었고, 그들은 꽃을 다시 하나로 모아 막사 옆에 잘 놓아두었다. 리노스가 텔라몬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마도 대화하시는 걸 멀리서 보시고 잘못 생각하신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군.”

그들은 쓰게 웃었다. 아킬레우스를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덕분에 그들은 그가 한번 손에 쥔 것은 쉽게 놓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놓지 않는 걸로도 모자라, 완전히 자신이 소유해야만 만족해 할 만큼 독점욕이 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해인을 대할 때 의외로 유한 데다, 같은 막사를 쓰는 연인 사이라기에는 신체적인 접촉도 꽤 자제하는 기색이기에 사람을 상대로는 조금 달라지나 싶었는데, 방금 전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겠지?”

리노스의 물음에 텔라몬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뭘 걱정하나? 아가씨께서 어련히 설명하시겠지.”

“……하긴, 그건 이쪽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로군.”

“에우도로스 님이 난처해지거든 그때나 몇 마디 얹어 주면 될걸.”

“자네 말이 맞네.”

소곤소곤 대화를 끝낸 그들은 막사에서 천천히 몇 걸음 떨어졌다. 상관이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둘은 알아서 상황을 판단했다. 그들에게도 파트로클로스가 가지게 된 것과 비슷한 직감은 이미 생겨 있었다. 여기서 버티고 있어 봐야 할 일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었다. 아킬레우스가 돌아온 시점부터 그들의 오늘 임무는 끝났다고 봐도 좋았다.

“조용히 돌아가자.”

“그러자고.”

합리적인 제안과 빠른 수긍이 오갔다. 그들은 에우도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유유히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

바깥의 이들이 짐작한 대로 아킬레우스는 그들이 돌아가거나 말거나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아킬레우스가 갑작스레 입을 맞춰 왔을 때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것은 해인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왔으니 더 이상 보는 눈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해인은 자신을 테이블에 앉혀 놓고 다시 키스해 오려는 아킬레우스의 어깨를 다급히 밀어내며 타박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다른 사람? 여긴 없잖아.”

투덜거리듯 대꾸한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막고 있는 해인의 손목과 손등을 감싸듯 잡아채고는 손바닥 위로 입술을 묻었다. 숨결이 여린 피부에 닿는 감각에 흠칫한 해인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단단한 손아귀에 잡힌 손은 그렇게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손을 포기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 바깥에서요.”

“그게 뭐 어때서.”

“아니…….”

해인은 아연한 기분으로 아킬레우스를 바라보았다. 어투에서부터 묘하게 비뚤어진 심사가 드러나고 있다. 그녀로서는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바깥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이 모든 행동은 별다른 이유가 없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해인이 그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려는 찰나,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손바닥에서 얼굴을 떼어 내고는 눈을 들어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걸 모르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텐데, 그런 게 신경 쓰여?”

질문이었지만 대답을 들은 생각은 딱히 없었던 듯, 아킬레우스는 슬쩍 고개를 꺾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는 아직 입 맞추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가 답을 듣지 않으려 하는 것과는 별개로 해인도 할 말을 잃은 상태였기에, 그녀는 넋 놓고 있던 중 다시 입술을 겹쳐 오는 아킬레우스를 이번에는 밀어내지 못했다.

“으응…….”

빈틈없이 입술이 맞물리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혀가 얽혀 들었다. 비틀려 있는 심사는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은근히 티가 났다. 두 손이 얼굴을 단단히 붙잡아 고개조차 뒤로 뺄 수 없었다. 이유라도 알면 납득해 주겠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받아 주기에는 너무 집요하게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해인은 미간을 좁히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조차도 모른 척하려던 아킬레우스는, 숨이 벅찬 해인이 기어코 얼굴을 틀어 버리려 들자 그제야 내키지 않는 듯 떨어졌다.

“왜…….”

아쉽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유를 묻는 아킬레우스의 눈을 본 해인은 순간 멈칫했다.

동의 없는 행동에 대해 무어라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열 오른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떠오르던 단어들은 모조리 흩어졌다. 새삼스럽게도 아름다운 얼굴이다. 화내기도 어렵게 만드는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해인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며 되물었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죠. 왜 그래요?”

아킬레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겠어?”

“……응?”

이 상황에서 해명을 해야 할 사람은 아킬레우스라고 생각하던 해인은 또다시 당황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잠시 침묵했다. 정말로 모른다는 기색을 띤 해인의 표정에, 결국 이기지 못한 아킬레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쯤 되자 그도 아까보다는 이성이 조금 돌아온 상태였다. 해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뜬금없이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천천히 인정한 그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에우도로스와는 무슨 이야기를 했지?”

질문을 들은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찰나 동안 아킬레우스의 말을 이해하자, 그가 무엇을 문제 삼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짧게 탄성을 내뱉은 해인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킬레우스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조차 내리며 웃은 해인이 이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부터 봤어요?”

입매를 슬쩍 비틀면서도 아킬레우스는 순순히 답해 주었다.

“그대가 꽃을 받아 드는 것부터.”

정말로 공교로운 순간에 목격한 셈이었다. 해인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막사 바깥에서 들고 있던 꽃들을 죄다 떨어트렸다는 사실도 자각했다. 그건 조금 아쉬웠지만, 이미 떨어트렸으니 어쩔 수 없는 문제다.

그보다는 무엇 때문에 아킬레우스의 심사가 틀어졌는지를 알게 된 점이 중요했다. 떠나기 전 아킬레우스에게는 잘 말해 주어야 한다고 부탁했던 에우도로스가 오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상황을 해명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해인은 새롭게 납득했다. 손끝으로 아킬레우스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해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에우도로스는, 꽃이 핀 걸 봤는데, 제가 그걸 보러 가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싶어 가져왔다고 했어요. 어디까지나 감사의 의미로.”

“감사?”

해인은 기껏 그쳤던 웃음을 다시 입가에 매달았다.

“당신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하던걸요.”

“……하.”

물론 아킬레우스도 에우도로스가 이성으로서의 의미를 담아 해인에게 무언가를 건넸으리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라면 그 무언가가 보통 이성적인 감정이 있을 때나 선물할 만한 꽃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해 잠시 흩어졌던 이성이었다. 해명까지 들은 지금 다시 멀쩡해진 이성이 기능하자 아킬레우스도 약간은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인이 아직도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듣기 좋은 말이던데요. 당신을 구했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어요.”

아킬레우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해인이 테이블에서 내려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먼저 손을 뻗어 상대의 허리를 잡아 들었다. 그냥도 얼마든지 내려올 수 있는 높이였지만 해인도 굳이 거부하지는 않았다. 내려 주는 대로 바닥을 딛고 선 해인은 곧장 아킬레우스에게 한 걸음 가까이 바짝 다가섰다.

“오해할 수도 있을 만한 광경이었던 건 인정해요.”

묘하게 착잡해 보이는 낯을 하고서도 그는 가까이 온 해인이 까치발을 들고는 어깨를 짚어 오자, 금세 한 팔로 등을 감싸 지탱했다.

“그렇지만 양쪽 다 본의는 아니었으니까……. 그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죠?”

“……안 해.”

한숨 같은 답이었다. 해인은 작게 웃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기 이전부터 같은 침대를 사용하기도 했고, 고백한 직후 이미 입까지 맞춘 탓인지 지금과 같은 가까운 거리감에 해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스스럼없이 상대에게 몸을 기댄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입가에 살짝 입 맞추고, 상대가 멈칫한 틈을 타 단단한 어깨 위에 뺨을 기댔다.

조금 굳어 있던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움직이지 않자 이내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 품속에서 그녀는 문득 지난 일을 떠올렸다.

되짚어 보면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자신을 안아 드는 것만으로도 놀랐던 적이 꽤 많았다. 당장 처음 만났던 때만 해도 그랬다. 물론 그때야 말도 통하지 않았을 때니 어쩔 수 없었기는 하지만, 품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번 시도하다 제풀에 지쳐 그만둔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그 이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그가 손을 뻗어 올 때마다 당황했던 것이 그리 먼 옛날의 일은 아니었다.

그랬던 일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만족감이 마음속을 빈틈없이 채웠다.

‘……하지만 영원할 수는 없겠지.’

해인은 더 떠오르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지금과 같은 완벽한 순간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도 알 수 없는 마당이다. 그것을 스스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으며 숨을 내뱉었다.

눈앞의 사람이 좋았다. 그 탓에 오히려 우울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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