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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이 되었을 때였다.
아킬레우스가 돌아오기 전 미리 칼리에를 보내고, 막사 바깥에서 아킬레우스를 기다리던 해인은 예상하지 못한 방문자를 마주했다.
“바깥에 나와 계시는군요.”
“……에우도로스?”
평소라면 이 시간대에 이쪽에 올 만한 사람은 아킬레우스나 파트로클로스뿐이다. 아킬레우스야 본인의 막사가 여기였으니 당연했고,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곁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가장 많은 탓이었다.
지난번 물자가 들어왔던 날 보고를 위해 포이닉스가 잠시 기다린 적이 있었지만 그 일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다른 부관들은 보통 전투가 끝나면 각자 막사로 가서 휴식을 취했지, 지금처럼 지휘관의 막사 앞에 찾아오지 않았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해인을 마주하며 에우도로스가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움직이셔도 됩니까? 어제…….”
말끝을 흐리며 그가 옷자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해인의 발목을 눈짓했다. 순간 멈칫한 해인이 함께 그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에우도로스는 지난밤 해인이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직접 목격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괜찮아요.”
해인은 다시 고개를 들고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그녀는 오늘 아침, 상처가 없어졌다는 것 정도는 아킬레우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밝혀도 별다른 문제가 없으리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굳이 목격자들을 찾아다니며 손수 멀쩡함을 증명해 보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안부를 물어본다면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해인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예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뿐이고, 하루 만에 없어진 상처쯤이야 굳이 예언을 신경 쓰지 않고도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게 상상 이상으로 잘 통한다는 것을 이제는 해인도 실감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잘 생각해 보면 해인은 냇가에서 씻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칼리에에게도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전적이 있었다. 그랬던 주제에 계속해서 다친 척을 하고 있는 건 양심적으로도 어려웠다. 환자 취급을 당하는 부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칼리에와 리노스, 텔라몬과 같이 주변에 오래 머무는 주변 사람들이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게끔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새벽의 일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부상 소식을 따로 들어 알고는 있던 리노스와 텔라몬이 괜찮으냐는 질문을 했을 때도, 해인은 본인이 아침에 내렸던 결론대로 적당히 둘러대며 무사함을 증명하고 상황을 넘어갔던 차였다. 이제는 그 대상이 에우도로스가 된 것이다.
“하지만…….”
“실은 빨리 나아요.”
“예?”
해인은 괜찮다는 듯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쳤던 쪽의 발을 보란 듯이 땅에 내디뎠다.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손을 뻗던 에우도로스는 해인이 정말로 멀쩡하게 서 있자 금세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빨리 낫는다고요?”
“네, 그러니까……. 어떤 분의 호의 덕분에요.”
잠깐의 침묵 후 에우도로스가 말뜻을 이해했다. 이름 대신 어떤 분이라고 했지만 그게 적어도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약간 허탈한 듯, 하지만 동시에 안도감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군요.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아주 아끼시나 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관장하는 영역에 생긴 균열을 완벽히 보수하기 위해 안배해 준 요소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해인은 상처가 빨리 낫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지, 시간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해인은 굳이 말을 덧붙이는 대신 적당히 수긍했다.
“감사한 일이죠.”
포세이돈이라고 말하지 않고 ‘어떤 분’이라고 표현한 탓에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 호기심이 들기는 했으나, 에우도로스도 상대가 먼저 밝히지 않으려는 것을 굳이 알아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키는 대로 캐내도 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며 몰라도 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해인이 괜찮다는 사실이었으므로, 그는 훨씬 편안해진 목소리로 화제를 바꿨다.
“그렇다 해도 이미 가져온 걸 안 드릴 수는 없으니, 여기.”
말을 잇는 내내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가 해인에게 불쑥 무언가를 건넸다.
“……꽃?”
“예, 꽃입니다.”
심지어 여러 송이였다. 해인은 약간 당황하며 에우도로스가 내민 꽃다발을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무슨 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금방 꺾어 온 듯 향이 짙었다. 해인이 꽃을 내려다보자 에우도로스가 설명했다.
“전날 못 볼 꼴을 보셨잖습니까. 그것도 있고, 날이 따뜻해지다 보니 진영 주변에 새롭게 많이 피었더군요. 그렇지만 그걸 보러 가기는 힘드실 것 같아서 좀 꺾어 왔죠. 부상이야 괜찮다 해도, 멀리 나가는 게 내키지 않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의가 의심스러워질 만큼 상당한 배려였다.
해인의 입장에서야 가까운 친척인 그를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기원전이라는 시대를 생각해 보면 그녀의 기준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겨도 할 말은 없었다. 얼마든지 저의를 의심해 볼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마주 본 에우도로스의 눈에 별다른 사심은 비치지 않았다. 해인이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에우도르스는 한마디 더 첨언했다.
“감사의 의미기도 합니다.”
“감사요?”
그가 씩 웃으며 답했다.
“대충 들었습니다. 그냥 다치신 게 아니라 우리 지휘관을 구해 주느라 다치신 거라고요. 부관으로 있는 사람들도 못 한 일을 해내셨죠.”
아킬레우스를 구했다는 건 상당히 인상적인 말이었다. 적어도 해인에게는 그랬다.
……물론 애초에 막사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킬레우스가 해인과 대화하느라 방심할 일도 없었을 테니, 위험한 상황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가 어떻게 되었든 지금은 그와 관련된 일이 그럭저럭 잘 끝난 뒤였다. 듣기 좋은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해인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렇게라도 보니까 좋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우도로스는 그것이 용건의 전부였다는 듯 산뜻하게 답했다.
뒤이어 해인에게 인사하고, 근처에 있던 리노스와 텔라몬에게도 눈짓으로 인사한 그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다시 해인을 돌아보더니 장난스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참, 혹시 왕자님이 그 꽃의 출처에 대해 물어보시면 오해하지 않게 잘 말해 주셔야 합니다. 여차하면 그걸로 또 팔찌 만들어서 손목에 걸어줘 버려요.”
그 말에 해인은 그대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웃느라 미처 대답하지 못했지만, 웃는 낯이 긍정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건 에우도로스도 잘 알았다. 장난스럽게 말하기는 했어도, 지휘관에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던 그는 비로소 완전히 안심하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법한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킬레우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자리에 멈춰 서 에우도로스와 해인의 대화를 지켜본 건 에우도로스가 해인에게 꽃을 건네던 순간부터였다. 하지만 언제부터 보았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킬레우스가 눈을 가늘게 뜨는 것, 해인이 웃는 것, 마지막으로 에우도로스가 떠나는 것까지 확인한 파트로클로스는 속으로 조금 한탄했다.
‘지난밤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정신 차리고 다니기에 아가씨께서 잘 달래 놓았다 싶었더니.’
……물론 정신을 차리고 다녔다 해서 아킬레우스가 완전히 평소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전날 해인이 말했던 대로, 그의 입장에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을 때 듣게 된 고백이었던 탓이었다. 해인은 서로에게 미안한 일이 있으니 같이 잊고 넘어가자고 했지만, 아킬레우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만 좋은 조건 같다는 생각이 여전했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죄책감과 기쁨이 혼란하게 섞여 들어 심정이 복잡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킬레우스의 머릿속을 읽을 수 없고, 간밤에 막사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선에서는 어째서인지 한순간 기분이 좋아 보이다가도 잠시 후 돌아보면 심각해져 있는 등 그저 이상한 상태에 불과했다. 다만 집중해야 할 순간에는 집중하고 넋을 빼놓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가공할 만한 성과라 생각했을 뿐이다.
‘……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에우도로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나중에 알아봐도 될 일이다. 지금 여기에 계속해서 머물러 봤자, 문제가 생긴 연인들 사이에 끼인 불쌍한 외부인이 될 뿐이라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그는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빨리 자리를 뜨자.’
최근 몇 달간의 경험으로 얻게 된 직감이었다.
“나 먼저 가 볼게. 보고 사항은 내일 정리해서 줄 거고, 아가씨한테 안부 전해 줘!”
그는 아킬레우스가 듣거나 말거나 제 할 말만 재빨리 내뱉고 몸을 돌렸다. 어차피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붙잡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파트로클로스의 짐작대로 아킬레우스는 그가 떠나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겨 막사 앞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서자 인기척을 느낀 리노스와 텔라몬이 먼저 그를 돌아보았다.
“아, 오셨습니까.”
그들이 건네는 인사에 해인도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이내 반갑다는 듯 웃어 보이는 얼굴에 반사적으로 마주 미소 짓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게 얼마나 자연스러웠을지는 아킬레우스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도 에우도로스가 몇 주 내내 지휘관의 막사에서 지냈던 여성에게 이성으로서의 의미를 담은 선물을 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건네주었다고 한들 그에 따른 의미는 별것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거슬리는 것은 늘 존재했다. 원래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이성적이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래서였다.
“아킬레우스, 왔…….”
무어라 이어지려는 말을 끝까지 듣는 대신, 그는 해인의 지척까지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꺾어 깊게 입 맞췄다.
감싸 안은 몸이 멈칫하며 굳는 게 느껴졌다. 해인은 당황한 듯 제대로 응해 주지 않았으나 아킬레우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그는 보통 밀어내면 밀려나 주던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깨에 손이 올라와도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서 상대가 밀어낼 틈조차 주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눈을 감지 않은 덕분에 아킬레우스는 새파란 눈동자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을 한 해인은 다음 순간, 무심코 손에서 힘을 풀어 버린 듯 들고 있던 꽃들을 떨어트렸다.
발치로 꽃들이 흩어졌다. 굳이 아래쪽을 보지는 않았지만 기척과 눈치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아킬레우스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허리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줘 해인의 발을 땅에서부터 떨어트렸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 팔로 허벅지를 받쳐 안고, 주변의 시선들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꽃은 그대로 바닥에 버려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