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8 깊이
깊은 물속에서 점점 얕은 가장자리로 향하듯, 조금씩 정신이 깨어났다.
어렴풋이 잠에서 깬 해인은 누군가 침대 맡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내려다보는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과 동시에, 이 장소에서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인은 눈을 조금씩 깜빡였다. 시야로 금빛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아킬레우스.”
“응.”
이름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답해 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막사 안이 환한 것으로 미루어 날이 밝은 지는 제법 된 듯했다. 다만 그럼에도 아킬레우스는 여태 갑옷을 입지 않은 키톤 차림이었다. 그 광경에 해인은 약간의 생경함을 느꼈다. 그녀가 이 시간대에 깨어난 것은 이전에도 몇 번 있던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아킬레우스가 지금처럼 침대 맡에 앉아 해인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보통은 막사 바깥에서 부관들이랑 있을 시간대인 것 같은데…….’
선명해진 시야에 담긴 상대의 모습을 재차 확인한 해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몸을 약간 틀어 비스듬히 고쳐 앉은 아킬레우스가 고개를 기울여 해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몹시 가깝고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쉽게 하기 힘든 접촉이었음에도, 아주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일어나자마자 확 가까워진 거리에 해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미 전날에는 더한 것도 한 마당이었다.
해인은 자신이 결국 선을 넘어가기를 택했음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게다가 새삼 되짚어 보면 그들은 침대도 같은 것을 사용한 지 오래였다.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그랬으니 이미 충분히 이상했던 거리감인데, 심지어 그때와 달리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걸 기어코 알게 된 이후인 것이다…….
납득하고 받아들인 해인이 중얼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네요.”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틀어 아킬레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뺨에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이제까지 최선을 다해 상대의 마음을 외면해 왔으니, 그런 짓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상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 행동에 정작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아킬레우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긍정했다.
바깥은 이 시간대에 늘 그랬듯이 다소 소란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힐끗 문가를 곁눈질해 본 해인은 다시 가까이 붙으려는 아킬레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원래 나가 있을 시간 아니에요? 늦지 않아요?”
“안 늦어. 내가 서두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할 이들은 아니니까.”
물론 그런 만큼 파트로클로스가 더 바빠질 테니, 그는 조금 짜증을 낼 수도 있다. 다만 아킬레우스는 원래부터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고 살지 않았다.
더구나 오늘은 파트로클로스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의무병까지 나간 후 막사 안에 남겨진 해인과 아킬레우스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길이 없겠지만, 일단 그는 지난 새벽 해인이 다쳤었다는 사실만큼은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일로부터 고작해야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지휘관이 좀 서두르지 않는다 해서 말을 덧대기는 어려운 아침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야 어쨌든, 해인은 자신을 끌어안아 오는 팔을 거부하지 않았다. 몸이 들려 상대의 다리 위에 앉혀져도 마찬가지였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어깨에 뺨을 기대며 그의 등 뒤로 마주 팔을 둘렀다.
기댄 어깨 너머로 침대 발치에 풀려 있는 붕대가 보였다. 그제야 해인은 자신의 발목을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언제 다쳤냐는 듯 멀쩡했다.
“붕대는 당신이 풀었어요?”
“맞아. 정말로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길게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손에 감아 보며 해인의 귓가에 입 맞춘 아킬레우스가 순순히 답했다.
“언제?”
“그대가 반나절이라고 했으니, 그 정도쯤 지났을 때.”
그 말은 결국 해인이 잠들고 나서도 최소한 반나절 정도는 계속 깨어 있었다는 소리였다. 해인은 약간의 헛웃음과 함께 상대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물었다.
“안 잔 건 아니죠?”
“그러진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그 말을 의심 없이 믿기에는 사건 직후 봤었던 아킬레우스가 상당히 불안정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나 태연하게 마주해 오는 낯 위에는 뜻밖에도 피곤이나 불안의 흔적 같은 것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건 지난밤 동안 알아서 마음을 가다듬은 덕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잠에서 깬 해인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새삼스레 얻은 확신이 주요했다. 심지어 지금도 자신의 품에 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만족감에 그는 상당히 여유를 얻은 상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인이 깨어나기 전까지, 침대 맡에서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는 지금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는 짐작하지 못한 해인이 한동안 눈을 마주하자 오히려 아킬레우스는 가볍게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해인은 결국 마주 미소 짓고 말았다.
***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완전히 전선에서 탈주해도 된다는 말과 같아질 수는 없었다.
미적거리던 아킬레우스가 더 이상 의무를 외면하지 못하고 출전한 이후, 남겨진 해인은 리노스와 텔라몬으로부터 전날의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낮 동안 해인을 호위한다는 임무를 맡고 있기에, 불침번에서는 제외되어 정작 전날 밤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그 자리에 없었다. 덕분에 이른 아침 일어나자마자 파트로클로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기겁하며 하루를 시작한 바였다. 지금 해인에게 말을 전하면서도 리노스는 해인의 상태를 살피듯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그 침입자들은 파트로클로스 님과 다른 부관분들이 제대로 처리하셨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그…….”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리는 리노스에게 해인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봤어요.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명이었는데, 그 사람도 혼자 탈출할 상태는 아닐 테니까 이번 문제는 이제 조금 안심해도 괜찮겠죠?”
그 살아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발목을 찌른 사람이었으나, 해인은 그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의외라고 여길 만큼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아킬레우스를 잠시 불안정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결국 오늘 아침에는 전부 괜찮아졌으니 결론적으로 그자가 성공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예, 예.”
그러나 ‘들었다’도 아니고 ‘봤다’는 답을 듣게 된 리노스는 순간적으로 당황해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그를 대신해 텔라몬이 입을 열었다.
“……간자를 들여놓는 것 자체가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명예롭지도 않은 일이라 지원하는 사람을 골라내기도 어려우니 제가 생각하기에도 아마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을 놓으면 안 되겠지만, 아마 조만간 테베를 떠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해인은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조만간 떠나요?”
“예.”
겨우 진정한 리노스가 말을 이었다.
“저희 둘은 이번 전선에는 나서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오늘 듣기로는 최근 며칠간 우리 진영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전황은 상당히 순조로웠다고 합니다. 테베가 몹시 밀리고 있다더군요.”
해인은 미묘한 낯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테베가 밀리고 있다는 건 연합군에게 있어서는 좋은 소식임이 틀림없다. 언젠가 포이닉스도 테베로부터 승리를 거두면 그다음은 트로이로 진격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상대인 트로이로부터도 승리한다면, 연합군의 십 년에 걸친 전쟁은 끝을 맺는 것이다.
‘그렇지만 트로이에서는…….’
전쟁이 끝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아킬레우스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니 해인은 차마 잘 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찰나에 표정을 일그러트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해인은 오늘 아침의 아킬레우스를 떠올렸다. 그러자마자 순간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가 죽게 되겠지.’
언제까지 여기에 있게 될지조차 모르면서 선을 넘기를 택한 건 자신이었으니, 운명이 언제 들이닥치더라도 해인은 그것을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분명 생각했다. 그러나 결심했다고 해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이 먼저일까, 아니면 내가 떠나는 게 먼저일까.’
문득 떠오른 귀환 생각에 해인은 크로노스의 얼굴을 새삼 상기했다.
그러고 보면 기원전의 땅에 도착해 포세이돈의 신전에서 마지막으로 본 이후, 해인은 그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며 해인을 기원전으로 던져 놓은 존재치고는 상당히 무책임한 태도였다.
‘……종종 살펴보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진짜 보기만 할 거라는 이야기셨나.’
무언가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은 그는 다만 해인이 아킬레우스의 곁에, 전장에 있어야만 돌아갈 수 있는 사건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 바 있었다.
‘……여기서 지내며 알게 된 거지만, 진영도 엄밀히 말하면 전쟁터의 후방이지.’
크로노스도 분명 해인이 전장에서 무기를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가 말한 요건들은 테베에 온 이후로는 사실 늘 충족하고 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귀환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한 일은 전혀 없었다. 테베에 온 이후 벌어진 가장 큰 일은 바로 어제의 암살자 사건이었는데, 이것과 그녀의 귀환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당연했다. 졸지에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해인이 개인적으로 한 일을 따져 보면 거의 전무했다.
하지만 해인은 최근 크로노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게 이득이지 않겠느냐고 스스로를 설득하고는 했다. 그 생각을 바탕으로 하면,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건 크로노스가 말한 전장이 이곳 테베의 앞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뿐이었다.
‘어느 쪽이 먼저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귀환과 관련된 일도 트로이에서 일어날 거야.’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폈다.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임에도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애써 평소 같은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해인이 질문을 꺼냈다.
“……언제쯤 결착이 날까요?”
“그건 아직 확실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테베의 에에티온 왕은 적장이지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 그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곧 항복을 권유해 볼 예정인 모양이더군요.”
“존중의 의미로 항복이요?”
“예, 그리고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도시들을 점령할 때 그랬듯 성벽을 넘어가겠지요.”
“……그렇군요.”
존중과 항복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부디 쉽게 항복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머리 한구석을 차지했다. 이기적인 생각임을 알면서도 트로이로 향하는 것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거부감이 거대한 탓이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마치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맞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이제는 훨씬 더 때가 가까웠다.
해인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마음에 담았던 사람과 연인이 되었다는 설렘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상황이 도무지 평범하지 않았다.
당장 저 멀리 보이는 테베의 성벽이, 새삼스럽게도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