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가 젖어 있었다. 정말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눈에 보이는 사실이 그랬다.
해인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가 눈물까지 보이리라고는 정말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녀가 아는 아킬레우스는 항상 무엇이든 거칠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고, 시선은 언제나 정면만을 향해 있었다. 지금처럼 자신의 약한 감정을 쉽게 드러낼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가 젖은 눈매로 올려다보자, 당황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니, 저는…….”
해인은 당황하며 손을 뻗어 그의 뺨에 댔다. 동요한 탓에 그것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친근한 접촉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도 안 다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걸 말 안 했던 것 같은데, 저는 몸의 시간이 고정되어 있어서 반나절마다 고정된 때로 돌아가요.”
다급하게 설명했지만 이게 정말 위로가 되기는 할지 이제는 확신이 없었다. 해인은 아연한 기분으로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젖어 있을 뿐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한 겹 물막이 덮여 있어서인지 평소에 비해 눈 색이 엷어 보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을 정면으로 볼 수 있던 해인은 찰나에 무언가 마음 깊이, 아득한 동시에 빠듯하게 차오르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타인의 상처에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가, 보통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똑똑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당신도 정말로 다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발뒤꿈치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 텐데. 아니에요?”
그 기묘한 감각을 견디며 묻자, 아킬레우스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와 그를 지켜보며 그 정보가 진실이라는 것도 확인한 바였다.
하지만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차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유일한 약점이 정말로 죽음의 원인이 되었기에 유명해져 먼 미래에까지 이름이 남았다고 하면, 지금 살아 있는 그에게는 좀 과한 불명예로 다가갈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해인 역시 그의 죽음을 그런 식으로 태연하게 입에 담을 자신이 없었다.
“그대로 그 사람이 당신에게 칼을 휘둘렀으면 발뒤꿈치에 닿았을 거예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래서 그녀는 아킬레우스의 의문에 대해 답해 주는 대신 하던 말을 이으며 젖은 속눈썹을 응시했다. 불과 며칠 전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단 한 번의 계기만 생긴다면, 더 이상은 걷잡을 수 없을 거라고…….’
변명의 여지 없이 스스로 자초한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그로 인해 상대는 눈물을 글썽이고, 바깥의 분위기는 굳이 내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뒤숭숭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조차 마음이 움직일 줄은 몰랐다.
‘이런 것도 계기가 되는구나.’
이제 와 깨닫기에는 조금 우스운 사실인 것 같기도 했다. 해인은 한숨처럼 속삭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요.”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내뱉기 전으로 사사롭게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다. 해인은 스스로 절벽으로 걸어가 한 걸음 내딛는 심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부터 빠르게 뛰기 시작한 본인의 심장 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다.
그 속에서, 해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좋아해요.”
말을 맺음과 동시에, 해인이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들어 올려 입술을 맞댔다.
체온만 잠시 스쳤다고 봐도 좋을 만큼 아주 짧은 접촉이었다. 해인은 다시 고개를 들고는 아킬레우스의 반응을 확인하듯 상대의 흔들리는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혼란한 낯이었으나 이내 눈 위로 희미하게나마 빛이 돌아왔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그 끝에 자신이 들은 말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한 아킬레우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해인이 그랬듯 속삭였다.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짐작도 못 하겠군.”
“제가요?”
“나조차도.”
그는 손을 뻗어 해인의 뒤통수를 붙잡아 끌어 내렸다. 해인이 순순히 고개를 내려 주자 그대로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숨결이 뒤섞이고, 코앞에서 또렷하게 시선이 부딪쳤다. 해인은 천천히 눈을 감고 허락하듯 입을 열었다. 그러길 기다렸다는 듯 두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혀가 얽히고, 혀끝이 입 안의 여린 곳을 문지른다. 해인은 작게 숨소리를 내뱉으며 손을 뻗어 아킬레우스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힘이 들어가서인지 어쩌면 밀어내는 것 같기도 한 느낌에, 맞닿은 입술을 떼어 내고 고개를 든 아킬레우스가 그새 확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싫어?”
해인은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뜨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아니…….”
답을 들은 그는 말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를 숙이며 한 손으로 해인의 턱을 잡고 눈가와 뺨, 그리고 입 근처에 짧게 입술을 문질렀다. 조금씩 상체가 뒤로 기울자, 아킬레우스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리고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턱을 잡았던 손을 내려 해인의 등을 감싸 안고, 반대쪽 손으로는 침대를 짚어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그는 상대를 완전히 침대에 쓰러트려 눕혔다. 그러자마자 다시 입술이 깊게 겹쳐졌고, 혀와 타액이 섞이며 서로의 숨결을 나눠 가졌다. 질척이는 젖은 소리가 한참 막사 안을 채웠다.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린 것은 기어코 숨이 모자라진 해인이 상대의 어깨를 정말로 밀어내고 나서였다. 잠깐씩이나마 떨어져 숨을 쉬기는 했지만, 그 짧은 순간조차 아쉬워하는 것 같은 상대의 끈질김에 패배해 버린 것이다.
느리게 밀려나 준 아킬레우스는 눈을 내리뜨며 해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벅찬 숨으로 인해 뺨이 달아오른 덕분에, 다친 직후 봤었던 창백함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려 해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
“……미안해.”
방금까지 그토록 집요하게 숨을 앗아 가며 입 맞춘 사람이 내뱉기에는 조금 뜬금없는 소리였다. 천천히 숨을 고르던 해인은 불과 며칠 전 지금처럼 이유 모를 사과를 들었던 적이 또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그때처럼 의아하게 물었다.
“뭐가요?”
닿은 이마를 떼고 상체를 일으킨 아킬레우스가 해인의 얼굴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는 다소 침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잖아. 심지어 난 그대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지. 그런데도 나는, 그 와중에 그대가 날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아킬레우스는 말끝을 흐렸지만 해인은 그 뒤로 이어질 내용도, 그리고 그가 어째서 갑자기 사과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미 그에게는 거대한 책임감이 존재했고, 충족되지 못한 책임감은 죄책감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 문제였다. 지금 아킬레우스는 기쁨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실망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정작 좋아하는 사람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으면서,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기뻐하게 되는 자신을 유감스러워 하는 것이다.
눈을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 모든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실은 모를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는 자신에 대한 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책적인 생각들이다. 해인은 손을 뻗어 아킬레우스의 뺨을 감쌌다.
“괜한 죄책감 갖지 마세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굳이 밖에 나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뛰어든 것도 저였잖아요. 이건 제 선택이에요. 그러니까 후회하지도 않아요. 어차피 할 이유도 없고…….”
잠시 말을 끊으며 그녀는 단어를 고르듯 침묵했다. 해야 할 말을 정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인은 이어서 조용히 덧붙였다.
“다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는, 이런 때 좋아한다고 말해서 저야말로 미안해요. 당신이 완전한 기쁨을 느끼기도 어렵게 만들어 놓고 내키는 대로 굴어서.”
“……해인.”
앓듯이, 혹은 탄식처럼 이름을 부르는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며 해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서로에게 미안한 일이 있으니까, 오늘 일은 같이 잊어버리고 넘어가면 어떨까 싶은데…….”
“그렇게 하고 싶어?”
“대신 제가 좋아한다고 말한 건 기억해야 해요.”
“……그건 평생 못 잊지.”
그쯤 되었을 때 해인은 약간 몽롱한 기분으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실은 이미 아까 전부터 점점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피를 꽤 많이 흘린 데다, 긴장은 풀렸고, 심지어 몸을 눕히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반나절이면 상처와 함께 완전히 사라질 피로겠지만 반나절이 흐르기까지 기다리기는 어려웠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해인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떤가요, 제안…….”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었기에 아킬레우스는 상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반나절이면 상처가 없어진다고 말은 했지만,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환자였다. 뭔가를 더 하기에는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쓴웃음과 함께 해인의 위에서 완전히 비켜 내려온 다음 곁에 자리 잡았다. 그는 손을 들어 해인의 눈 위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내게만 좋은 조건 같지만.”
커다란 손에는 어느새 다시 온기가 돌아와 있었다. 눈뿐만이 아니라 거의 이마까지 모두 덮는 손길이었다. 해인은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의원이 상처를 확인하느라 불을 밝힌 탓에 막사 안이 제법 환했기에, 체온과 함께 어둠이 찾아오자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몸도 몸이지만 머릿속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대신 내 모든 건 이제 그대 거야.”
잠결에 흔히 그러하듯 목소리가 조금씩 멀리 들렸다.
“그대가 어디에 있더라도, 언제나…….”
나직이 덧붙이는 말을 끝으로, 해인은 완전히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