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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 안,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가 앉혀 주는 대로 얌전히 자리를 잡으며, 해인은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옷자락을 있는 힘껏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아서였다. 옷자락을 놓자 직전까지 힘을 주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몸이 느끼는 통증 탓인지 계속해서 손이 떨렸다.
그러나 정작 해인은 아프다는 사실을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닿는 순간에는 분명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으나, 그 이후부터는 아마도 다친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로부터 심장 박동과 같은 속도로 둔탁한 통증이 어렴풋이 밀려오는 정도였다.
물론 정말로 그 정도만 아픈 것은 아니다. 상황에 의해 놀라고 당황한 머릿속이 고통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해인은 앉은 채 멍하게 생각했다.
‘어떡하지, 이 상황…….’
실혈 탓인지 생각의 흐름이 느렸다. 하지만 걱정거리는 명확했다. 고작해야 사고가 일어날 뻔했던 것뿐인 일로도 그토록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던 아킬레우스가 이번 일에 대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만약 포세이돈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화를 낼지, 주로 자신의 부상 정도보다는 타인들의 반응에 대한 것들이었다.
‘왜 이런 것만 걱정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해인 스스로도 그 사실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살면서 칼에 찔려 다치는 일이 흔한 것도 아니고, 이런 부상은 처음 입어 보는 입장이니 겁이라도 조금 먹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기이하게도 그런 방향의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해인은 애써 이유를 찾으려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분비되는 호르몬 탓인지 머리는 좀처럼 빠르게 값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포기는 하지 않았다. 순간순간 흐름이 끊기는 듯했지만 결국 해인은 마침내 합리적인 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나 어차피 반나절이면 안 다친 사람이 되는구나.’
고민한 보람이 있는, 한 줄기 빛 같은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너무 익숙하게 누리고 있던 탓에 무의식중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자 미처 바로 적용을 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반나절이면 몸의 시간이 되돌아가는 만큼, 지금의 상처도 반나절이면 어차피 없어지게 되어 있었다. 죽을 만큼 다쳐서 반나절이 흐르는 중 죽어 버린다면 소용없는 일이지만, 고작 이 정도로 사람이 죽지는 않을 테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확신한 순간 해인은 자잘한 고민들, 가령 포세이돈과 관련된 걱정들은 완벽히 걷어 낼 수 있었다. 반나절만 흐르면 몸에 남은 상처는 없어질 테니, 부상을 입었다는 증거도 없었다. 어떻게든 지난번처럼 알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어쩌면 아킬레우스의 죄책감도 조금은 덜 수 있을지 몰랐다. 해인은 지난번 그에게 자신이 미래에서 왔음을 설명할 때, ‘몸의 시간이 고정되어 있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하지 않았던 것을 새삼스레 되새겼다. 말하지 않았으니 아킬레우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반나절만 지나면 다친 적 없는 것처럼 되돌아간다고 알려 주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해인은 비로소 자신의 앞에 선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제법 오래 침묵하고 있었음에도 어떠한 반응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만 있는 상대의 반응이 그제야 의아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확인했을 때, 해인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그가 지나치게 평정을 잃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아킬레우스.”
만난 이래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이었다. 반사적으로 손부터 나갔다. 해인은 상대의 옷자락을 잡으며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아킬레우스, 진정해요.”
“……지금.”
“그렇게 당황하지 마세요.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아킬레우스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뭐가 괜찮아. 지금, 그대가…….”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 부관들이 두들겨 깨워 끌고 오다시피 한 의원이 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바깥의 부관들 사이에서 아킬레우스의 상태도 함께 살펴야 할 것 같다는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져 파트로클로스가 동행했다. 어쨌든 해인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아킬레우스가 그나마 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했던 사람이 파트로클로스였던 것이다.
“의원 데려왔어, 아킬레우스.”
한참 깊이 자다가 깨서 왔음에도 의원은 적당히 눈치를 살피고 다친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판별해 냈다. 재빨리 해인의 앞으로 다가간 그가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
“아가씨, 다치신 곳은……?”
“……이쪽이요.”
해인은 다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자연히 함께 시선이 딸려 내려간 의원은 바로 피에 젖은 발등을 확인했다. 자상이 생긴 발목에서부터 흘러내린 피였다.
“불을 좀 더 밝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파트로클로스가 얼른 움직여 화로의 불씨를 키우고 등잔불 여러 개를 밝혔다. 의원이 옷자락을 걷어 내고 상처를 확인했다. 뒤이어 그는 끌려 나오는 와중에도 용케 챙겨 온 약초와 치료 도구들을 꺼내 처치를 시작했다. 해인은 반나절이면 사라질 상처에 무언가를 덧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치료할 필요는 없다’ 따위의 말을 할 수는 없어 얌전히 있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심각한 낯을 하고 있다 보니, 도저히 입을 열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의원이 처치를 하는 동안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확인하고, 그의 어깨를 잡으며 위로를 건넸다. 다만 말하면서도 별로 통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금세 그만둔 그는 아킬레우스의 곁에서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파트로클로스는 힐끗 눈을 돌려 해인의 상태도 확인했다. 정작 부상도 입지 않은 아킬레우스는 혼비백산해서 넋을 잃었는데, 부상을 입은 해인은 낯빛이 창백하기는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멀쩡해 보였다.
‘울지도 않고, 소리 지르지도 않고, 기절하지도 않고, 아가씨도 여러모로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니까. 물론 진짜 그랬다간 아킬레우스가 두 배로 넋이 나갔을 테니 다행이다 못해 감사한 일이기는 한데…….’
그는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해인의 부상에 대한 미안함과 아킬레우스가 받았을 충격에 대한 걱정은 물론이고, 이 일로 포세이돈이 분노한다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상상 외로 의연한 해인의 낯을 확인하자 한 가지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일단 하나는 내 몫이 아니군.’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처치를 끝낸 의원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다 되었습니다.”
말을 꺼낼 정신도 없어 보이는 아킬레우스를 대신해 파트로클로스가 물었다.
“어떤가?”
“상처가 아주 얕지는 않지만, 그래도 회복 후 별다른 후유증이 남을 만큼은 아닙니다. 당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지혈 효과와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를 혼합해 붙였고 잘 감아 두었으니 아물 때까지 관리만 잘하시면 되겠습니다. 다만, 아마도 흉이…….”
말끝을 흐리며 의원이 해인의 눈치를 보았다. 파트로클로스도 아차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곱게 자란 사람에게 있어 흉터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해인은 태연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쏠린 시선들에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의연해 보이는 태도로 대답했다.
“아, 괜찮아요.”
“……그, 그러십니까?”
의원이 당황한 듯 되물었으나 해인은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네, 늦은 시간에 고생하셨어요.”
“예에…….”
자신만의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으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의원은 얼떨떨한 얼굴이 된 채 어색하게 답했다. 파트로클로스는 매번 자신이 무심코 생각하는 평범함의 기준을 깨는 해인을 잠시 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손짓으로 의원을 내보내고, 자신도 해인과 눈을 맞춘 뒤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덧붙이는 말은 따로 없이 막사를 나갔다.
다시 막사 안에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엮인 둘만 남겨졌다.
해인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단 상처를 감아 두자 의외로 당장 느껴지는 고통부터가 덜했다. 시간이 지나면 맨살에 약초를 붙여 둔 꼴이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안 한 것보다 나았다. 손을 내려다보자 떨림도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이만하면 확실히 괜찮았다. 그렇게 생각한 해인은, 고개를 들어 여전히 괜찮아 보이지 않는 사람을 다시금 올려다봤다.
“……괜찮으세요?”
부상을 입은 사람이 멀쩡한 사람에게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이기는 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너무 침착하지 않아 보이는 탓에 해인은 외려 더 침착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난 경험으로 아킬레우스가 이런 상황을 못 견뎌 할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던 바였다.
‘알면서도 이런 일을 벌여 놨긴 하지만…….’
사실 해인도 아까 전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막아설 판단을 했다는 것도, 찰나를 놓치지 않고 맞출 순발력을 낼 수 있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살면서 그 정도로 급하게,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던 적이 없었다. 다만 그때는 정말 급했다. 그대로 뒀다간 무려 삼천 년씩이나 지난 미래에서조차 언급되는 그의 유일한 약점에 칼이 박힐 위기였던 것이다.
‘그걸 빤히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잖아…….’
아마도 의미 없을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린 해인은 난처한 기분으로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였고 상대는 계속해서 서 있었던지라 시선의 높이 차이가 제법 났다. 거리도 정도껏이어야지 이만큼 차이가 벌어져 있으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미안해요. 이건…….”
해인이 머뭇거리며 이어서 그를 달래 보려 시도했을 때였다. 의원이 들어온 이후부터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아킬레우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왜…….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해.”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이어서 몸을 낮추더니, 해인의 앞에 무릎 꿇듯 앉아 다치지 않은 쪽 다리의 무릎을 짚어 왔다. 해인은 무릎을 감싸는 커다란 손에 멈칫했다. 답지 않게 차갑게 식어 있는 손은 심지어 가늘게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그 선명한 동요에 해인이 작게 숨을 들이켜는 찰나, 아킬레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단어 사이로 숨소리가 끼어든다.
“난 어차피 다치지도 않아. 그런데 대체 왜 그대가…….”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던 그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을 때, 해인은 아까부터 상대의 목소리가 흔들린다고 생각했던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