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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78)화 (78/149)

다음 순간 눈이 마주쳤다.

모르는 자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확인할 것은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그대로 침대 근처에 세워 두었던 검을 드는 것과 동시에 막사의 문으로 달려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작도 전에 들켰음을 직감한 침입자는 그대로 아킬레우스에게 마주 달려들었으나,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그대로 발끝에 차여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아악!”

한밤의 고요를 깨고 비명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날카로운 소음에 해인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사이 아킬레우스는 쓰러진 이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뒤따라 들어오려던 또 다른 침입자에게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사람 둘을 반쯤 제압하며, 그는 막사를 완전히 나가기 직전 짧게 해인을 돌아봤다.

“그대는 나오지 마!”

물론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나가지 않고 안쪽에 가만히 있는 것이 돕는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해인은 자신이 그를 깨운 이후 고작 몇 초 만에 급변한 상황에 황망해져서 뒤늦게 침대를 벗어났다. 깨우자마자 저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해인이 깨우지 못했더라도, 침입자가 침대 가까이 다가오면 곧장 눈치챘을 것 같았다.

해인은 머뭇거리며 문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사실은 이것도 그리 현명한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방금 전 아킬레우스가 뛰쳐나간 반응 속도를 보면 침입자들이 막사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거의 없어 보였다.

문가에서 애매하게 떨어진 거리에 선 채로 해인은 바깥에서부터 새어 들어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발자국 소리, 웅성거림, 그리고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날카롭게 울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서서히 소음들이 잦아들고 조금씩 흩어지다가, 어느 순간 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이쪽은 죽였으니 저자만 묶어라.”

“다 죽이지 않으십니까?”

아킬레우스의 대화 상대는 낯선 목소리였다. 아마 근처에서 불침번을 서던 병사인 듯했다. 아킬레우스의 나지막한 답변이 이어졌다.

“하나쯤은 살려 두면 어딘가 쓸 곳이 있겠지.”

“알겠습니다.”

뒤이어 무언가를 집어 던지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몇 번 이어졌다. 여러 명이 급하게 움직이는 듯 부산스러운 기척도 넘어왔다.

“다 묶었으면 내가 감시하고 있을 테니, 다들 가서 내 부관들을 깨워 와.”

“예!”

아킬레우스의 명령을 듣자마자 곧장 여러 명의 한 목소리 같은 대답이 따라왔다.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도 한 명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내 제각각 흩어지는 듯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오다 잦아들었다.

상황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짐작하기에는 충분한 말들이었다.

“끝났나 보네…….”

지난 며칠간의 긴장과 진영에 머무르던 경직된 공기가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의 속도였다. 그러나 어쩌면 그 정도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대비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빠르고 순조롭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처 몰랐지만, 듣는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듯 그제야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바깥은 고요했다. 해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이 정도로 제압이 빨랐으니 아킬레우스는 아마 무사할 것이다.

……알지만, 그럼에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천을 슬쩍 걷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해인,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천이 펄럭이는 소리에 돌아본 아킬레우스가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그의 발아래에는 두 명의 침입자가 쓰러져 있었다.

해인은 대답 대신 무심코 시선을 내려 쓰러진 이들을 확인했다. 묶인 사람은 한 명뿐이고, 그는 아킬레우스의 발치에 조용히 엎어진 채였다. 움직임은 없었지만 이미 안에서 병사들과 아킬레우스의 대화를 들었기에 그저 기절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살려 두고 어디든 써먹겠다는 말처럼 상처도 그리 깊지 않아 보였다.

다만 그 근처에 쓰러진 다른 한 명은 상처가 제법 깊었다. 안에서 들은 대로, 이미 죽었다던 사람일 것이다. 그자의 몸 아래서 점점 넓게 번져 가는 얼룩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인은 그것이 피라는 것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그만 봐, 해인. 그만 보고 들어가 있으라니까.”

해인의 시선이 넓어지는 핏자국에 가는 것을 본 아킬레우스가 나직이 반복했다. 위험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이런 광경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에 나오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해인은 그제야 바닥에서 눈을 떼고 아킬레우스와 시선을 맞췄다.

“죄송해요. 갑자기 너무 조용해져서…….”

말끝을 흐리는 해인을 보며 아킬레우스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한동안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다 갑자기 조용해지면, 안에 있는 사람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으니 불안할 법도 했다. 아킬레우스는 묶여서 기절한 침입자의 몸을 넘어와 해인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선 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바꿨다.

“……정 불안하면 나와 있어. 어차피 곧 부관들이 올 테니까. 바닥으로만 시선을 두지 마.”

“아니에요. 제가 있어 봤자 번거롭기만 할 테고.”

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킬레우스가 멀쩡해 보이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불안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방금 전 보았던 번져 가는 핏자국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겨진 것은 조금 곤란했지만, 잊어버리려 애쓰면 잊힐 것이다. 게다가 확실하게 쓰러진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상황이 끝나긴 했다는 감상도 조금쯤 느낄 수 있었다. 해인은 막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다가, 머뭇거리며 아킬레우스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기색에 아킬레우스는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해인이 고민 끝에 물었다.

“……당신은 다치지 않았죠?”

이미 눈으로 확인했으니 반드시 필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본인에게서도 괜찮다는 답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 탓이었다. 다만 아킬레우스에게는 예상외의 질문이었다. 그가 멈칫하자 해인이 덧붙여 말했다.

“사실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래도요.”

“……그래, 다친 곳은 없어.”

“그게 제일 다행이네요.”

해인은 속삭이듯 답했다.

원하던 답도 들었으니 정말로 막사에 들어가려던 그녀는, 다음 순간 불현듯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아킬레우스가 방금 침입자의 몸을 넘어 해인에게 다가온 탓에 그는 기절해 쓰러진 자를 등 뒤에 두었다. 하지만 기절한 데다 묶여 있으니 문제는 없어야만 했는데, 그새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침입자가 끈을 풀어낸 채로 상체를 일으키고 있던 것이다.

다친 곳이 다리인 듯 완전히 일어서지는 못했지만 팔만은 자유로웠다. 침입자의 눈은 악에 받친 듯 번들거린다. 팔을 뻗으면 아킬레우스의 다리를 잡아챌 수 있는 위치에서, 침입자가 떨리는 팔을 들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칼이다.

짧은 찰나가 일부러 느리게 재생시킨 영상을 보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킬레우스는 여전히 해인을 보느라 그자를 등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도 병사들의 거친 손속으로 단단히 묶였다가, 혼자 힘으로 애써서 소리조차 내지 않고 끈을 풀어냈으니 기껏 든 칼을 제대로 휘두를 힘은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조금의 피해를 입혀 보고자 찌르는 방식을 선택한 모양이었는데, 그 위치는 아마도…….

‘……안 돼.’

벼락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내리꽂히듯 떠올랐다. 저대로라면 칼이 닿을 곳은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 스틱스 강물이 닿지 않은 단 한 곳, 발뒤꿈치였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느린 재생이 풀린 듯,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정상적인 속도로 되돌아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만 더 이상 무언가를 길게 판단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입을 열 틈도 없이 해인은 반사적으로 다급하게 한 걸음 뛰쳐나가 아킬레우스를 힘껏 붙잡아 끌어당겼다.

“조심……!”

그러나 손이 닿는 순간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쉽게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약간 휘청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그게 다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당긴 참이었으니 해인은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을 안듯이 붙잡아 오는 이에게 잘되었다는 듯 더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몸을 살짝 틀어서, 침입자가 찔러 드는 칼의 궤적에 본인의 다리를 밀어 넣어 막아섰다. 차라리 발끝으로라도 칼날을 차 낼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다음 순간, 칼날이 박혀 들었다가 빠졌다.

몇 초를 잘게 쪼개서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해인은 섬뜩한 감각과 함께 한 가지를 확신했다. 아주 조금, 정말로 조금만 늦었더라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해인, 이게 무슨.”

아킬레우스가 당황한 기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던 기색이더니 돌연 달려와 품으로 뛰어들 만한 이유를 짐작해 낼 수 없었다. 이럴 사람이 아니라 더 뜻밖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윽…….”

“……해인?”

억누르듯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해인은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데, 심지어 멀쩡하던 혈색이 사라져 갑작스레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킬레우스는 덮쳐 오는 불길함을 느끼며 시선을 더 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발목에서부터 흐른 피가, 발등까지 적시며 땅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해인!”

그는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으려는 해인의 허리를 팔로 감아 다급히 부축했다.

마침 저 멀리서부터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급히 오던 부관들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파트로클로스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바닥에 쓰러진 이들을 확인하더니 손에 헐겁게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손목을 힘껏 지르밟았다.

아킬레우스는 아니더라도 그가 아끼는 여자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점에서 저열한 만족을 느끼던 침입자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그 가운데 뒤를 이어서 도착한 부관들이 그들의 주변을 둘러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가씨께서는 어쩌다…….”

침입자의 비명과 신음, 그리고 저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한 부관들이 한마디씩 내뱉는 말에 의해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몇 초쯤 해인을 안아 든 그대로 굳어 있던 아킬레우스는 포이닉스가 그의 어깨를 흔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 짧은 순간 벌어진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옷자락을 꽉 쥔 해인의 손을 보았다. 고통을 눌러 참는 듯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것을 확인하자 다른 것을 더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다.

“……아무나 의원을 불러와.”

겨우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부관들의 사이를 헤치고 급히 걸음을 옮겨,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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