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77)화 (77/149)

***

이후 며칠은 별다른 일 없이 그저 흘러갔다. 다만 지휘관과 그 바로 아래의 부관들이 긴장하고 있는 탓인지,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진영 내부의 분위기도 조금씩 경직되고 있었다. 내내 진영에서 머무르기에 그런 분위기의 변화를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사람 중 하나인 해인은 드물게도 막사 바깥에 나와 있었다.

그래 봤자 고작 막사 문 바로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았을 뿐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거의 막사 안에서 머물렀기에 그조차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요새 진영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해인은 곁에 자리 잡고 선 리노스와 텔라몬을 올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그들은 최근 들어서야 겨우 이전의 자연스러운 태도를 되찾았다. 물론 이전에 비해 더 철저히 긴장을 놓치지 않고 사방을 예민하게 경계하고는 했지만, 적어도 해인이 냇가에서 화살 통을 발견했던 그날과 그다음 날처럼 보는 사람이 안쓰러워질 만큼의 어색함은 사라져 있었다. 역시 시간만이 답이었던 것이다.

“예, 아무래도 긴장감이라는 건 감추려 해도 잘 감춰지지 않는 것이라 그런 듯합니다.”

해인의 물음에 리노스가 선선히 동의해 왔다. 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옮았다는 뜻이군요.”

정확한 표현이었다. 텔라몬이 쓰게 웃었다.

“맞습니다. 윗사람들이 날 서 있으면 아랫것들도 같이 예민해지는 법이니까요.”

해인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제가 대부분 없어지거나 유명무실해진 현대에서도 인간 사회는 늘 권력 관계에 의해 돌아가고는 했다. 그러니 신분이 아직 존재하는 이 시대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이런 식이면 오히려 이쪽이 더 손해겠어요.”

해인은 시선을 돌려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처럼 진영 전체가 계속 긴장한 채로 지내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말 암살자가 나타나는 것도 안 될 일인 건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습니다. 본래 비겁한 수단은 당하는 쪽을 곤란하게 만드는 법이지요.”

해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새파랗고 깨끗하다. 햇빛에 눈이 부셔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그녀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달을 생각했다.

사실 최근 며칠간 해인은 평소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현상을 하나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달의 주기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아르테미스에게 제사를 지냈던 날 달은 하현달과 그믐달의 사이 어딘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하루마다 달은 당연히 점점 가늘어졌고, 그믐달이 되었다가, 이제는 삭월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다 보면 곧 달빛이 완전히 한 번 사라지고 다시 초승달로 차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믐달이나 삭월이나 초승달이나, 결국 밤에 달빛이 거의 없어서 어두운 건 마찬가지야. 내가 암살자였으면 이날들 중 하루를 잡아서 일을 치렀을 것 같은데.’

솔직히 아주 빤한 일이기는 했다. 암살이라는 단어의 뜻 자체가 ‘몰래 사람을 죽이는 것’ 이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덤벼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방심하고 있을 때 덮쳐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의미인데, 그러려면 당연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어야 일이 쉬울 터였다.

‘이 정도 생각은 누구나 하겠지만.’

때문에 아무에게도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암살자는 영화에서나 종종 봤던 해인이 떠올린 생각이었으니 이런 일을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이곳의 사람들은 당연히 앞서서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해인은 자신이 매번 달의 모양을 확인하고, 그를 바탕으로 이런 생각들을 할 만큼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킬레우스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이 일에 그녀의 의지와는 별개로 말려들어 버린 것에 이미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드러내 놓고 말한 적은 없으나 해인이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해인으로서도 그가 어째서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마음에 둔 사람을 불길한 사건에 엮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자신이 그에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쑥 깨달을 때마다 해인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당연하게 여길 수 없는 그 마음을 외면하지 못해서, 혹은 외면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태연을 가장하며 지냈다.

그렇잖아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을 사람에게 자신의 불안마저 얹을 수는 없었다.

***

저녁이 되어도 진영의 분위기가 미묘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나름대로 무난했던 분위기를 아는 입장에서는 티가 났다. 모두가 제대로 된 영문을 모르고도 조금씩 행동을 자제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계속 전투가 이어지니까 부상자나 사망자가 늘어나는 탓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지 우울한 이유였다. 해인은 한숨과 함께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킬레우스가 부관들과 논의할 것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으니, 그가 없을 때 오늘도 달이 어느 정도 기울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해인은 막사의 천만 살짝 걷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달은 완전한 삭월이다.

사실상 달이라고 부를 만한 게 보이지 않다 보니, 달빛도 전혀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밤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달빛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시대인 탓에 사방이 몹시 어두웠다. 어제도 오늘처럼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해인은 바로 앞을 지키고 있는 리노스와 텔라몬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천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자리를 비웠던 아킬레우스가 다시 막사로 돌아왔다.

“해인.”

인기척과 함께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해인은 익숙한 얼굴을 보고 반사적으로 약간 미소 지었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이유 모를 오싹함이 흩어지고 그 자리를 미약한 안도가 대신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기는 했으나, 해인은 그와 단둘만 남겨졌을 때 불편해했던 얼마 전까지의 자신이 떠올라 혼자 약간 머쓱해졌다.

“무슨 일 있나?”

겉옷을 벗어 의자에 내려 두던 아킬레우스가 해인의 표정이 약간 애매해진 것을 그새 눈치챈 듯, 여상하게 물었다.

해인은 최근 들어 그가 함께 있을 때면 자신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랬던 탓에 고개만 들면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금처럼 아주 작은 변화가 생겼을 때 자신이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면, 아킬레우스는 그대로 넘어가지 않고 꼭 이유를 확인해 왔다.

“아니요, 아무것도.”

“정말로?”

“그냥 다른 생각을 좀 했어요.”

적당히 둘러대며 해인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둘 모두 지금과 같이 별 내용 없는 간단한 대화는 잘만 나눴지만, 암살 위협 문제와 관련해서는 며칠째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망친 사람은 결국 잡지 못했고, 해인이 발견했던 화살 통의 주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처음 발견했던 두 명 외에는 더 이상의 간자가 진영 안에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그 이상의 새로운 사실이 없으니 아킬레우스는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해인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더 늦어지고 보통 모두가 잠들 만한 시간이 되었을 때쯤에는 그들도 다를 바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해인은 이제 곁에 몸을 눕히는 인기척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등잔불이 꺼지고 잔잔하게 타오르는 화로 하나만이 엷은 빛을 발했다.

막사 벽으로 아른거리며 흔들리는 불 그림자를 보며 해인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자고 싶지는 않네.’

몸이야 매번 비슷한 상태였으니 피곤함의 정도를 결정짓는 것은 뇌의 과로 여부인데, 최근에는 돌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빈도수가 다소 줄어들어서인지 이전만큼 피곤하지가 않았다.

물론 크로노스가 대체 뭘 바라는 것인지는 여전히 짐작하지 못하고 있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던 그 말을 그대로 믿는 게 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해인은 스스로를 가끔 설득하고는 했다.

눕기는 했지만 한참 눈을 감지 않고 있던 해인은 곁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어느새 고르게 변했음을 눈치챘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이전 새벽에 홀로 깨어났을 때 한번 봤었던 아킬레우스의 잠든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도 생각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와 감고 있을 때는 눈매가 다른 사람 같다. 눈가를 한번 쓸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손대면 깨겠지.’

괜히 깨우고 싶지도 않았고, 깨면 그 상황을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해인은 다른 움직임 없이 잠든 얼굴을 그냥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간혹 일렁이는 불꽃의 빛이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사방이 고요한 덕분인지 그 광경으로부터 깊은 밤의 나른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평화를 생각한 것은 아주 잠깐이다.

문득, 해인은 바깥으로부터 기묘한 술렁임을 감지했다.

소리라고 하기에는 정말 들린 것인지 아닌지도 판별하기 힘들 만큼 작았다. 착각인가 싶기도 했다. 그도 아니면 바람이 잠깐 세게 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니, 그랬으면 천이 흔들리기라도 했겠지.’

문을 대신하는 천이 두껍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람이 불 때 전혀 흔들리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만큼의 이질감이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하지만 며칠 내내 ‘암살’ 위협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내심 긴장한 채 지냈던 덕분인지 금세 신경이 곤두섰다. 차라리 착각이기를 바라며 해인은 슬쩍 몸을 일으켜 막사의 문을 응시했다. 한참 아무런 낌새가 없어 조금 안심하려던 찰나였다.

천이, 조금 흔들렸다.

그러고는 틈새가 약간 벌어지며 그 사이로 우연처럼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아킬레우스.”

방금 전까지 나른한 평화로움 따위의 생각을 했던 것이 한순간에 거짓말 같아지고 말았다. 깨우지 않으려 했던 이에게 손을 뻗으며 해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잠들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킬레우스가 곧장 눈을 뜨고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는 했으나, 그 역시 그다지 깊이 잠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실은 해인이 몸을 일으켰을 시점부터 반쯤 정신이 들어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해인의 안위부터 확인했고, 다음 순간 그녀가 보고 있는 막사의 문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천을 거둬들이고, 막사 안쪽을 확인하려 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