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76)화 (76/149)

“도망쳤다고?”

“예, 병사를 몇몇 뽑아 추격대를 급히 보냈지만 숲으로 숨어들었는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포이닉스는 고개를 숙이며 침통하게 말을 맺었다. 아킬레우스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아 위로했다.

“됐어. 피해 여부는?”

“둘을 가둬 두었던 막사 앞을 지키던 병사 네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들 중 두 명은 상처가 깊어 당분간 치료에 전념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둘은 경상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당분간 전선에서 빼야겠군. 네 명 모두에게 보상해 주도록 하고, 입단속 역시 제대로 시키도록. 그리고 도망친 자들은.”

말을 잇다 말고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떨떠름했다.

“……정말 내 진영에서 나왔군. 그것도 둘씩이나. 목표물이 나였던 것도 확실해졌고.”

곁에서 함께 듣고 있던 파트로클로스가 동의하듯 쓰게 웃었다. 그 와중에 그는 이 일을 아가멤논에게 알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더라면 어지간히 귀찮게 굴었을 것이다.

파트로클로스는 포이닉스의 말 안에 담겨 있는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본 뒤,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암살 같은 비겁한 짓을 하려고 목숨까지 희생해 가며 동료를 보내 주다니, 명예로운 대업도 아닌 주제에 각오는 제법이었군. 어쨌든 한 놈이 살아 도망쳤다는 게 문제겠지만.”

“그자는 부상을 입지 않았나?”

미간을 좁히며 아킬레우스가 포이닉스를 돌아보고 물었다. 답은 바로 돌아왔다.

“병사들의 말로는 그자 역시 경상을 입었다고 했지만,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는 정도였던 모양입니다.”

“흠…….”

어차피 배후에 대해서는 굳이 캐내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만큼, 그들을 굳이 살려 둘 필요는 없었다. 살려 두면 쓸 곳이야 있겠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도망칠 때 둘 다 죽였더라면 후환이 남지 않아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놓쳐 버린 이상 그 사실에 기준을 두고 차후를 대비해야 했다.

“그래도 한 명을 잃었으니 그쪽 입장에서도 전력 손실은 제법이겠지.”

아킬레우스의 말에 파트로클로스가 수긍했다.

“하긴, 예정대로 일을 행하기는 좀 어려울 거야. 물론 진영 바깥에 조력자가 더 있을지도 모르니 방심하면 안 되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서로를 잠시 마주 보다가, 이 이상의 대화는 지금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 무언으로 합의했다. 아직 상의해야 할 것들은 많이 남아 있었으나 때와 상황이 마땅하지 않았다. 포이닉스는 사방을 잠시 둘러보더니 아킬레우스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숲으로 보낸 병사들을 기다리며 상황을 미리 정리해 두고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저지른 불찰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어차피 그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원하는 일을 하도록 두는 편이 포이닉스의 마음에도 위안이 될 듯해 아킬레우스는 그의 청을 허락했다.

“그렇게 하도록.”

“감사합니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포이닉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하고 곧장 등을 돌려 뛰듯이 걸어 멀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 마주치는 시선이 있었다. 그는 작게 한숨 쉬며 시선의 주인에게 다가섰다.

“해인.”

“문제가 생겼어요?”

이름을 부르자마자 속삭이듯이 질문이 돌아왔다. 도중에 끼어들지 않았을 뿐, 아마 해인은 포이닉스가 여기에 왔을 때부터 계속 그들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찾은 거군요.”

지금처럼 문장도 아닌 짧은 단어 하나만으로도 절반 이상의 사실을 확신해 내는 모습을 보자, 아킬레우스는 문득 착잡해졌다.

그는 해인에게 이런 종류의 단어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달갑지 않았다. 전쟁터 근처에서 가지기에는 터무니없는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가급적이면 평화롭고 좋은, 해인에게 어울리는 것들만 들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기에는 너무 머리가 좋고 생각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자세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덜 불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아킬레우스는 결국 쓰게 웃으며 약속했다.

“지금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으니, 후에 막사에서 말해 줄게.”

해인의 생각에도 주변 상황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포이닉스의 표정을 떠올려 보면, 단순히 간자를 찾았다는 사실 외에도 무언가 더 문제가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네.”

머뭇거리며 나온 대답에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표정을 잠시 살폈다.

“당장은 너무 불안해하지 마. 차라리 잠시 잊어버리고 있어도 좋고.”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말처럼 완전히 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다른 곳에 쏠릴 만한 일은 곧 일어났다. 의식 준비가 모두 끝난 것이었다. 군에 속해 있던 프티아 출신의 사제가 의식을 주관해 진행했다.

다만 준비 과정이 길었던 것치고 본격적인 의식은 상당히 짧았다. 제단에 양을 붙잡아 눕히고 칼로 찌른 뒤, 목숨이 끊어진 양을 미리 피워 놓은 불 속에 던져 넣고 몇 마디 인사를 바치는 것으로 끝난 것이다.

해인은 양의 시체를 품은 채 크게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으나, 거대한 불꽃을 보고 있으려니 이 의식의 주인 되는 이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현대의 아르테미스 님은 어떻게 지낼까.’

그녀는 달의 여신이지만, 또한 야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흩어지는 야만과 발달하는 문명 속에서, 한때 자유롭게 숲을 뛰어다니던 여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

타오르던 불꽃이 잦아들 무렵 해인은 아킬레우스와 함께 막사로 돌아왔다. 그는 바깥에서 약속했던 대로 해인에게 상황의 전말을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말이 끝나자 복잡한 얼굴로 확인하듯 중얼거렸다.

“탈출이요…….”

“그래. 그들은 포로 신분이었으니, 그대가 숲에서 본 자는 아마 그들의 협력자였을 거야.”

해인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이닉스의 표정이 좋지 않을 때부터 단순히 간자를 발견했다는 사실 외에도 다른 문제가 더 있으리라는 짐작은 했었다. 그리고 지금 정확한 이유를 듣게 되자, 포이닉스가 어째서 그렇게 침통해했는지도 납득이 갔다.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매만지던 해인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킬레우스와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 포로라고 하면, 원래는 팀블레에서 살던 사람이 아닌가요?”

“팀블레는 테베와 멀지 않으니, 아마 테베 쪽에서 내가 따로 팀블레에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그곳에 잠입시켜 둔 것이겠지. 테베와 팀블레는 그대도 알다시피 한나절쯤 달리면 도착할 만한 거리니까. 제법 오래 준비한 모양이야.”

정작 암살 목표가 된 아킬레우스는 담담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해인은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사람 한 명을 암살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노력을 들였다는 사실에서부터 느껴지는 불쾌감 탓이었다. 해인의 얼굴을 본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매만졌다. 순간 멈칫한 해인이 반사적으로 표정을 풀자, 마치 그게 목적이었다는 듯 손은 곧 떨어졌다.

“어쨌든……. 도망친 자가 아직 잡히지 않아서 포이닉스가 추격대를 보냈어. 아마 아직 기다리고 있겠지. 우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장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을 끝으로 아킬레우스는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인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아킬레우스가 겉옷을 챙기며 덧붙였다.

“나는 잠시 포이닉스가 있는 쪽에 다녀올게. 그대는 막사에서 나오지 마.”

“……그럴게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함께 막사에 잠시 들렀던 것뿐임을 해인은 뒤늦게 깨달았다. 원래였다면 지금처럼 막사에 잠시 돌아올 일 없이 바로 포이닉스가 있는 곳으로 향해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바깥에는 리노스와 텔라몬이 있을 거야. 문제가 생기면 그들을 소리쳐 부르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당부한 뒤 아킬레우스가 막사를 나섰다. 남겨진 해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조금 펄럭이다 가라앉는 천을 응시했다. 상대가 번거로운 일을 감행하면서까지 정확한 상황을 말해 주었으니, 알고 싶은 것은 다 알았으므로 마음이 편해야 했다. 그러나 해인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가 한 모든 이야기들 중 한 가지가 손끝의 가시처럼 느껴진 탓이다.

이 모든 일이 아킬레우스 한 사람만을 해하기 위해 준비된 계획이라는 사실을 해인은 조용히 곱씹었다. 당사자는 개의치 않는 듯했으나 정작 해인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불편한 마음이 선명했다.

물론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기는 했다. 아킬레우스는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조차 작은 생채기 하나 없는, 발뒤꿈치를 제외하면 상처 입을 일 없는 몸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지.”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정말 아무런 염려 없이 마음을 잘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까지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해인은 시선을 돌려 타오르는 화로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다치지 않을 것은 알지만 그가 그 정도의 증오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 증오에는 이유가 존재할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해인이 보지 못한 일이니 달리 보탤 수 있는 말이 없기는 했다.

그러나 해인에게는 아킬레우스를 더 염려하게 되는 이유가 분명 존재했다. 그녀의 존재가 아킬레우스를 흔드는 그의 또 다른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쉽게 당하지 않도록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면 좋을 것이나, 현실적으로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쓰라렸다. 문득 느껴지는 무력감에 해인은 고개를 돌려 타오르는 화로의 불꽃을 응시했다.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가도,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것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이 교차했다. 마음이 복잡한 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