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힐끗 눈을 들어 동료를 응시했다. 그것을 더 말해 보라는 의미의 시선으로 받아들인 듯, 그의 동료는 약간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목적은 아킬레우스였지. 그런데 그 괴물 같은 놈이 아무리 셋이 덤벼든다 한들 제대로 타격이나 입겠나? 솔직히 그렇잖아, 심지어 이미 들켰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럴 바에는 그렇게 아끼는 여자를 죽여 없애서, 비탄에 잠기게 하면 전장에서도…….”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봤겠나? 그 여자는 혼자 있을 때가 없어. 항상 곁에 누군가가 지키고 서 있다고. 게다가 신의 자식이야. 듣기로는 바다 신의…….”
“제기랄.”
순간적으로 욕을 내뱉기는 했으나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다시 사내를 설득했다.
“그래도 여자니까 대단한 무력 같은 건 없을 거 아냐. 이제 와서 신을 두려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그건 그렇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내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 명예롭지 않은 일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조차 그리 높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이상 거칠 건 없었다. 게다가 달리 생각해 보면 아킬레우스도 어차피 여신의 아들이었다. 이미 신의 자식을 해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라고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어차피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침입할 작정이었으니…….”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병사도 아닌 포로 신분이었기에 해인을 제대로 보거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호위를 둘씩이나 붙여 놓는다는 것에서부터 그녀가 무력으로는 평범한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이 약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뒤이어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천천히 동료를 돌아보았다.
“……생각이 좀 바뀌었다. 힘들 것 같은 것은 변함없지만 자네 말도 그럴듯해. 우리는 어차피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목표로 삼았지. 그런데 그 여자, 밤에는 아킬레우스와 같은 막사를 사용한다고 들었어.”
“같은 막사를?”
“그래. 그 말은 즉 그놈의 막사에 들어가는 것만 성공하면 원래 목적인 아킬레우스도, 그 여자도 둘 다 공격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사내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자네와 나, 그리고 지금 진영에 있을 테네스까지 우리는 전부 셋이야. 두 사람이 아킬레우스를 막는 사이 한 명이 여자를 죽이는 데 성공하고 도망치면……. 자네 말대로 아킬레우스를 흔들 수 있겠지.”
“그래, 그거야. 게다가 같은 막사를 쓴다면 밤중에 할 만한 일이야 달리 없을 테니, 아킬레우스 역시 방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도 죽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거기까지는 너무 낙관적인 예측인 것 같았지만 사내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는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하늘을 괜히 한번 올려다봤다.
“그럼 그렇게 알아 두라고. 테네스에게는 내가 전하지. 일정은 바꿀 것 없이 원래 정했던 날 그대로 한다. 그날 밤이 가장 어두운 날이니까.”
“그러지.”
“다만 들켰을지도 모르는 만큼 좀 더 조심해야 하니, 혹시 날을 바꿔야 할 것 같으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기 숲길에 바뀐 일정이 쓰인 나무 조각을 숨겨 놓도록 하지. 항상 제대로 확인해야 할 거야.”
“……그래.”
그것으로 대화를 끝내고 그들은 헤어졌다.
다시 어둠에 숨어 진영으로 되돌아가며 사내는 품속에 든 단검을 새삼스럽게 매만졌다. 묵직한 무게감이 선명하다. 그러나 예상 못 한 위험마저 늘어난 상황 속에서, 몸을 지키고 대업을 이룰 유일한 수단의 무게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
다음 날 아킬레우스의 진영은 고요함을 가장한 채 수면 아래서 여러 차례 뒤집혔다.
포이닉스가 스스로 조사를 맡겠다며 나선 것은 다른 부관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자신이 전선에서 빠지는 게 다른 진영의 장군들에게도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기 편해서였다. 노인이 몸이 아파 전장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면 남들이 뭐 어쩌겠냐는 논리다. 진영에 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런 식으로라도 최대한 감추고, 철저히 처리해야 했다.
그는 믿을 만한 병사들을 이끌고 포로들과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병사들을 철저하게 확인했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 시작된 조사였고, 심지어 병사들에게만 맡겨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서 상황을 지휘했기에 조사 대상이 된 이들에게는 단어 그대로 때 아닌 봉변이었다.
한편 전날 회의 결과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소란스러울 것을 예상한 해인은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끼어들지 않고 막사 안에서 하루를 보냈다. 칼리에도 팀블레에서 잡힌 포로이다 보니 조사 대상에 포함되기는 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여자인 데다 해인과 함께 일을 겪었다는 점에서 정상 참작이 되어 몇 없는 예외가 될 수 있었다.
고요함을 가장한 한낮이 지나고 해가 저물자 군이 돌아왔다. 그때부터는 해가 떠 있을 동안의 조용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진영 안이 활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르테미스에게 제물을 바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다치지 않고 체력이 남은 병사 여럿이 숲으로 가더니 나무를 베어 와 제단에 쌓아 올렸다. 거기에 어디에선가 커다란 화로가 튀어나오더니 하인들의 손에 의해 옮겨졌다. 정작 일하는 이들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이것이 대체 어느 신을 위한 것인지 몰랐으나, 상관들이 지시한 이상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낮과는 달리 이번에는 막사 바깥에 나와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해인은, 그만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진짜 하네.”
정말로 날을 잡아 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제물을 바치려는 것이다. 눈앞에서 준비 과정을 전부 보고 있으려니 이제야 겨우 실감이 났다. 그때 해인의 혼잣말을 얼핏 들은 듯, 그녀의 앞쪽에서 일하는 병사들과 하인들을 지켜보던 파트로클로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요…….”
해인은 그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고개를 갸웃한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주변이 워낙 소란스러우니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해인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그녀의 등 뒤에 선 리노스와 텔라몬도 슬쩍 확인했다. 세 명 모두 해인과 키가 그리 많이 차이 나지 않는 덕분에 시야가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앞과 뒤 모두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으려니 괜스레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긴 하지…….’
겉으로는 별일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만약 정말로 습격 사태가 벌어진다면 가장 노리기 만만한 것은 본인임을 해인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별것 없는 무력을 가진 사람이 그녀라는 건 굳이 자존심 상할 이유도 없는 사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승마 말고 다른 운동 같은 거라도 배워 둘걸 그랬나.’
그러나 해인은 바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라는 전제만큼 의미 없는 것이 없었다. 특히 지금 그녀와 같이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하룻밤 사이에 삼천 년 전의 과거에서 눈 뜨고, 언제 돌아가게 될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심지어 목숨의 위협마저 걱정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고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 분명하다.
해인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쯤,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낸 아킬레우스가 해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옆에는 메네스티오스가 따라붙어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든 해인은 이내 시야에 비친 익숙한 얼굴에 반사적으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킬레우스는 그 얼굴을 보며 안위부터 물었다.
“오늘은 별일 없었나?”
“네, 정말 아무 일도요.”
그에게 대답을 돌려준 해인은 곁의 메네스티오스에게도 눈인사를 보냈다. 그는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에 답해 왔다.
그러는 중에도 준비는 계속해서 진척되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완성된 제단과 그 양옆에 놓인 화로에 이어, 저 멀리서부터 하인 몇 명이 제물이 될 양 한 마리를 끌고 왔다. 키가 비슷한 세 명만 근처에 있었을 때와는 달리 아킬레우스는 해인보다 제법 컸기 때문에, 그에게 시야가 가려진 해인은 직전처럼 완전한 시야로 양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곧 제물로 바쳐질 동물이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해인은 차라리 지금이 나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스듬히 선 채로 파트로클로스와 대화하는 아킬레우스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인은, 무심코 양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포이닉스를 우연히 발견했다.
‘……표정이 안 좋으시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음에도 금방 눈에 들어올 만큼 심각한 낯이었다. 그가 전날 자청해서 포로들을 조사해 간자의 여부를 판별해 내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해인은 한눈에 보이는 좋지 않은 표정에 멈칫했다.
포이닉스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기척을 느낀 듯 근처의 다른 이들도 그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포이닉스는 조금 더 걸음을 재촉해 아킬레우스의 앞에 섰다.
“포이닉스, 무슨 일이지?”
상대의 기색을 확인한 아킬레우스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포이닉스가 지금처럼 심각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잡아들였던 포로 중에 정말로 간자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미 좋지 않은 상황임을 상정하고 있으니 보다 자세한 사항을 이야기하라는 뜻과 같았다.
포이닉스는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뒤,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속삭이듯 전했다.
“무기를 소지한 둘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따로 묶어서 가둬 두고, 나머지 인원들 역시 조사하여 방금 막 끝냈습니다. 그 두 명 외에는 의심되는 자가 없으나…….”
그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토해 냈다.
“……조사가 이어지던 도중, 가둬 놓은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희생하여 다른 한 명을 기어코 도망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