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 정도면 다들 상황은 파악했겠지.”
당연하다는 어조였다. 물론 사실이기도 했기에 부관들은 모두 긍정했다.
상황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 전부 이해했으니 이어지는 것은 대처에 대한 논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변 장군들의 성향, 그리고 연합군 내부의 정치적 관계를 잘 알고 있어야 했기에 해인이 끼어들기는 어려운 부분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일까지 손 뻗을 생각은 없던 해인은 자세를 조금 편하게 고쳤다.
‘어차피 아는 것도 없는데, 천천히 들으면서 정보라도 좀 수집해봐야지.’
……그러나 그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나온 화제는 옆 진영에 정보를 어디까지 전해 주느냐에 대해서였다. 의견을 내 보라는 듯 침묵을 지키는 아킬레우스와, 끼어들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기색인 포이닉스를 제외해도 인원은 다섯 명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의견이 한데 모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삼 분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지휘관 둘에게만 언질을 주고,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강 둘러대도록 하고, 세세한 참견은 안 하느니만 못한 바 가벼운 충고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낫겠다고 빠르게 이야기한 뒤 허락을 구하듯 아킬레우스를 보는 부관들을 보며 해인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 빨리?’
천천히 들어보려 했는데 들을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 해인을 알아차린 포이닉스가 하던 생각을 멈추고는 옆으로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논의가 빠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넘기는 것은 아닙니다.”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가볍게 미소 지은 포이닉스가 덧붙여 설명했다.
“빠른 이유는 암살자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저희 진영이 목표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지휘관을 제외해도 대부분의 이름값이 더 높은 탓이지요. 그럼에도 옆 진영에 굳이 이 일을 알려 주는 것은, 평소의 친분과 더불어 그들이 옆 진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아…….”
합리적인 이유였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해인이 중얼거렸다.
“하긴 그렇게 해야 그쪽도 만약을 대비할 수 있고, 이쪽이 위급해지면 도움을 청할 수도 있겠군요.”
“정확하십니다.”
포이닉스가 흐뭇한 얼굴로 칭찬을 건넸다.
그러나 그 때였다. 아킬레우스의 허락을 기다리듯 입을 다물고 있던 부관들 가운데, 메네스티오스가 갑작스레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해인이 있는 쪽을 돌아본 것이다.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직전보다 급격히 창백해진 낯의 그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저기.”
대화를 막 끝낸 해인과 포이닉스는 물론이고, 아킬레우스와 나머지 부관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 쏠렸다. 메네스티오스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희가 지금 옆 진영 지휘관들에게 알리느냐 마느냐를 떠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일을 겪으신 분이 아가씨이신데, 그, 포세이돈 님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시는지…….”
갑자기 들려온 아버지의 이름에 해인이 멈칫했다. 그리고 단순히 조금 놀랐을 뿐인 해인과 이유는 다르겠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부관들도 반응은 비슷했다.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중대한 문제를 마주한 다른 이들이 긴장하고, 전날 내려진 결론을 떠올린 아킬레우스가 쓴웃음을 걸쳤다. 메네스티오스에 이어 이번에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해인은 눈을 한번 굴린 다음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어요. 아마 모르고 계실 거고, 끝까지 모르시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 부관들은 모두 몹시 안도하고 말았다. 사실 그들도 이렇게까지 다행이라 여겨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찰나의 반응은 어쩔 수 없었다. 얼른 감정을 수습한 파트로클로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모두를 대표해 물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억지를 좀 썼어요. 그러니까 그분에 대해서는 계속 언급하지 말아 주셨으면…….”
“아.”
해인의 말에서부터 파트로클로스는 전날 밤의 일을 대강이나마 금세 짐작해 냈다. 아킬레우스는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했고, 해인이 그것을 말린 모양이었다.
상황을 깨달은 파트로클로스는 오랜 친우를 복잡한 눈으로 짧게 바라보았다. 보통은 서로의 의견이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다못해 아킬레우스가 처음부터 해인과 의견이 맞았어야 했다. 그가 지휘관으로서 사고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아킬레우스가 뜻을 꺾고 해인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파트로클로스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인사를 끝으로, 아킬레우스가 그제야 느릿하게 입을 열어 부관들이 앞서 모았던 의견을 허락했다.
뒤를 이어 나온 연합군 총사령관에 대해서는 앞의 주제보다도 더 빠르게 결론이 내려졌다.
“이쪽에는 함구해야죠?”
에우도로스가 짧게 말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연합군 총사령관은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이다. 거대한 세력을 갖추고 한 나라를 이끄는 군주이지만, 그는 그만한 권력을 갖고도 자신보다 일신의 무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아킬레우스를 늘 견제했다. 이번 일을 듣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는 부관들 모두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암살자가 있다면 첩자도 있을 수 있을 텐데, 그 정도로 관리를 소홀히 하면서 전쟁에 임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꼬투리를 잡으려 들겠죠.”
메네스티오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킬레우스가 대꾸했다.
“……하지만 첩자는 사실일지도 모르지. 내일 바로 조사를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조사를 누가 맡을 것인지도 빠르게 정해졌다. 포이닉스가 곧바로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당장 급하게 필요한 논의는 그 정도였다. 그 외에는 이 자리의 모두가 이 일을 함부로 퍼트리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 정도였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그쯤에서 회의는 더 끌지 않고 곧장 파장을 맞았다. 모두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는 그때였다. 옷자락을 정리하던 에우도로스가 막 생각났다는 듯 불쑥 말을 꺼냈다.
“참, 아르테미스 님께 감사하는 의미로 뭐라도 한 마리 바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멈칫했다. 특히 해인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해인의 반응과는 달리 다른 이들은 금세 다시 진지해졌다. 미처 잊고 있었다는 듯, 메네스티오스가 낮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아가씨도 구해 주셨고, 비겁한 위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역시 따지자면 그분 덕에 알게 된 셈이니…….”
포이닉스도 그에게 칭찬을 건넸다.
“잘 말했다, 에우도로스. 아마 양이나 염소 정도면 괜찮을 것 같군.”
이 자리에서 어리둥절한 건 신에게 제물을 바쳐 본 적이 없는 현대인 한 명뿐이었다. 해인을 제외한 전원은 에우도로스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수긍하고 있었다. 바로 내일 저녁 제단을 쌓고 불을 피우자는 이야기를 하는 기원전의 사람들을 보며, 해인은 자신이 정말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를 의심하고 말았다.
***
연합군 내 아킬레우스의 진영에서 회의가 끝난 이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 완연히 깊은 밤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사내 한 명이 깊은 숲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밤중의 숲속은 바로 눈앞의 시야조차 어두워 걸음걸음마다 극히 조심해야 했다. 등불이라도 들었으면 나았겠지만 그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숲 주변에는 연합군 소속의 장군이 셋씩이나 진영을 세웠고, 그는 그 세 명 중에서도 무려 아킬레우스의 진영에서 몰래 빠져나온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단독으로 군대를 끌고 팀블레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높으신 분의 명령을 받고 동료와 함께 팀블레로 슬쩍 이동한 테베의 간자였다. 아킬레우스의 군대가 팀블레를 무너트리고 포로를 잡아들일 때, 팀블레의 시민인 척하며 그들에게 붙잡혀 진영에 자연스레 숨어든 것이다.
‘짜증 나는군.’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 이후 몇 주째 이어지는 포로 신세가 달가울 리 없었다. 속으로 욕을 몇 마디 주워섬기며 그는 한숨을 삼켰다.
연합군이 진영을 세우기 전에는 애초에 테베의 성벽 앞에 위치해 있던 테베의 숲이었으니, 테베 사람인 그가 이토록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어쩌면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포로 대우를 참아 가며 몇 주를 버텼고, 이제 겨우 끝이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비병들의 눈까지 피해 힘겹게 숲으로 들어왔는데, 여기서 들키면 모든 게 허사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순조로웠다. 게다가 진영을 빠져나올 때는 병사들을 조심해야 했고, 숲까지 오는 길에는 혹시 지나다니는 전령이라도 마주치지 않게 주의해야 했지만, 숲에 들어온 이상 누군가와 맞닥뜨릴 염려는 적었다.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사내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사이 조금씩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표로 했던 장소인 숲 안 냇가의 상류 부근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소리를 따라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비로소 냇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마침내 이 늦은 시간에 숲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야 했던 이유인, 그의 동료와 접선할 수 있었다.
“여기.”
동료가 소리 죽여 그를 불렀다. 사내는 깊이 숨을 내쉬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 몇 걸음 먼저 다가온 동료가 불안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 별문제 없었나?”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인사도 없이 듣게 된 질문에 사내가 되물었다. 동료가 미간을 좁히며 머뭇거리듯 대답했다.
“그게, 실은 어제 웬 여자 하나가 냇가에 목욕을 하러 왔더군.”
“그런데?”
“어제 테네스가 물을 길어 갈 때 새벽에 나와 만나 무기를 받아 간 걸 알겠지? 자네들이 전한 대로 잡은 약속이었으니까.”
“그래.”
테네스는 사내의 또 다른 동료였다. 그 혼자만 팀블레에서 포로로 잡힌 것은 아닌 것이다. 테네스와 자신까지 해서 아킬레우스의 군에 숨은 간자는 총 둘이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동료는 그들에게 지금처럼 무기를 전해 주는 역할을 맡은 일종의 전달자였다.
동료의 말대로 테네스는 전날 아침 위장 신분인 포로답게 부려 먹히는 도중 살짝 빠져나와 품속에 무기를 챙겨 왔다. 서로 맡은 일이 다른 데다 둘이서 움직여 봐야 눈에 띄기만 하니, 지금처럼 서로 다른 날 다른 때에 접선해 무기를 받아 오기로 한 것이다. 포로로 잡혔을 때는 모든 무장을 해제 당한다. 하지만 거사가 가까워지는 지금은 당연히 무기를 다시 가지고 있어야 했다.
동료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밝을 때 돌아갈 수 없으니 숲 안에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고 말이야.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한낮에 내 화살 통을 냇가에 실수로 빠트렸지 뭔가. 떠내려가는 것을 찾으러 급히 가던 도중 그 여자를 보게 된 거야. 일단은 숨었는데, 내 화살 통을 확인하더니 그걸 챙겨서 돌아갔어.”
“뭐?”
“이렇게 되어 버린 거 죽이려 했는데, 갑자기 안개가 짙어져 놓쳐 버렸지. 뒤늦게 쫓아갔지만 아킬레우스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전차 뒤꽁무니만 봤어. 누군지는 몰라도 어린 계집종 하나에 호위도 둘이나 달고 다니던데.”
사내는 동료가 말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신의 딸이라던 그 여자일 것이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동료가 불안한 어조로 확인했다.
“자네가 포로로 잡힌 척하고 있는 곳이 아킬레우스의 진영이지. 들킨 것 아닌가? 그 안에 든 건 전부 테베 형식의 화살이었어.”
“……글쎄.”
그는 일반 병사도 아닌 포로였기에 대략적인 진영의 분위기는 살필 수 있을지언정 지휘관과 그 부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까지는 자세히 알기 어려웠다. 동료의 말대로 들켰는지 아닌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껏 간자로 숨어들기까지 한 입장에서 그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간자라는 역할 자체가 몹시 비겁하고 명예롭지 못한 수단이기에 더욱 그랬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도 제대로 아는 것은 없음을 스스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사내는 잠깐의 침묵 끝에 내뱉듯 말했다.
“고작해야 여자가 뭘 알고 그랬겠어? 그냥 떠내려오는 게 신기해서 주웠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별로더라도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후, 일단 진영 분위기는 어제나 오늘이나 별로 다른 걸 못 느꼈지만……. 그래, 여자는 몰라도 그걸 지휘관이 봤으면 눈치챘을 수도 있겠어.”
“내 잘못이다. 사과하지. 일이 잘못될지도 모르니 무기는 오늘 말고 후에 다시 받아 가는 게 어때?”
동료의 자책 어린 물음에 사내는 한동안 침묵하며 고민했다. 하필 그런 사고를 쳐서 일을 애매하게 만들어 놓았냐는 타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벌어져 버린 일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들키기 전에 다시 진영 안의 포로들이 지내는 막사로 돌아가야 했으니 화낼 시간도 없었다.
“됐어, 오늘 나오는 것도 어려웠는데. 잘 숨기면 그만이고, 오히려 들켰다면 도주해야 할지도 모르니 더 챙겨 놔야지. 포로들 수가 많아서 일일이 검사하기는 힘들 거야. 거사일도 얼마 안 남았는데, 후에 다시 받아 가러 나올 틈에 일 치르는 게 빠르겠군.”
“……그렇다면야.”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동료는 품속을 뒤져 내밀어진 손 위에 단도를 올려 주었다. 흐린 달빛조차 날카롭게 반사해 내는 날 선 비수였다. 그가 품 안에 단도를 숨기는 사이 동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정확히 뭐지? 대충 봐도 밤 시중이나 드는 노예로는 안 보이던데.”
“당연하지, 자네가 방금 호위 둘에 여종까지 달고 다닌다고 말했으면서 포로는 무슨……. 진영 안에서 도는 소문으로는 아킬레우스와 결혼할 여자라느니, 이미 아내라느니 하던데. 왜 이런 곳에 데려왔는지 정확한 사정이야 모르지만 아킬레우스가 아주 죽고 못 사는 모양이더군.”
그 말에 동료의 표정이 묘해졌다.
“……역시 그렇군. 그럼 그 여자를 죽이면 아킬레우스에게도 고통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