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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73)화 (73/149)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실에 더 의아함을 느낀 해인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을 미처 지우지 못한 파트로클로스가 엉겁결에 먼저 나서 수습을 시도했지만, 평정을 잃은 상황에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교성이 좋아 말을 서글서글하게 할 수 있을 뿐이지 거짓말까지 잘하지는 못했다.

결국 둘러대는 것에 실패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방금 한 말을 다시 한번 꺼냈다.

“아가씨, 실은 그게…….”

이제 와 말을 끊을 수도 없었던 아킬레우스는 팔짱을 낀 채로 파트로클로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찌르는 것 같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파트로클로스는 꿋꿋하게 말을 끝냈고, 그의 말을 전부 들은 해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저야 상관없어요. 말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직접 겪은 당사자의 이야기만큼 중요한 것이 없어서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으나, 사실 해인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면 파트로클로스도 거듭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되짚어 보니 아킬레우스가 내켜 하지 않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돌아온 건 파트로클로스를 오히려 당황시킬 만큼 태연한 목소리다. 그는 얼떨떨하게 확인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보시다시피 이미 무사히 빠져나왔고, 애초에 그렇게까지 대단한 충격을 받지도 않았거든요. 그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본 것도 아닌 걸요.”

살짝 눈을 굴린 해인이 덧붙였다.

“무엇보다 저 말고도 위험한 사람은 여럿 있을 텐데요.”

정확했다. 위협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신경질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킬레우스보다 더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해인을 보며 파트로클로스는 속으로 새삼스레 감탄했다.

그는 멍하니 해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슬쩍 아킬레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휘관의 표정에서는 여전히 못마땅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조금 멈칫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트로클로스는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세월에 힘입어 눈빛 따위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봐, 아가씨께서도 괜찮다 하시니 동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여기서 안 된다고 말하면, 기껏 나서 준 해인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아킬레우스가 모를 수 없었다. 말하게 두고 싶지도 않았지만, 해인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던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눈가를 쓸어내렸다.

결국 회의 참석 인원은 한 명이 더 추가되고 말았다.

노을이 거의 끝물에 다다라 지평선에만 주황색과 분홍색이 조금 남고, 나머지 하늘은 짙은 푸른색과 남색으로 전부 뒤덮였을 때 회의에 불러들인 모두가 모였다. 해인이 끼어 있는 탓에 테베에 온 이후 처음으로 파트로클로스의 막사가 아닌 아킬레우스의 막사가 회의 장소로 쓰였다.

여성이 연회 참석조차 불가능한 시대에서 회의에 동석한다는 건 그리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기는 했지만, 막사 바깥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파트로클로스가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언질과 함께 눈치를 주었기에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잠깐 놀랐을지언정 부관들은 금세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유가 있는 상황임에도 기어코 불편한 티를 낼 만큼 막힌 인물이라면 애초에 아킬레우스의 부관으로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에우도로스와 포이닉스는 그리 놀라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에우도로스는 오히려 반가운 얼굴로 해인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일 없으셨……. 아, 이게 아니지.”

실수했다는 듯 말을 멈춘 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인사말 자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에 적당히 대답하려던 해인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에우도로스가 바로 해명했다.

“별일이 있으셔서 아마 회의에 동석하셨겠지요. 이렇게 갑자기 소집된 회의치고 이유가 좋았던 적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해인이 피식 웃었다.

“그게 그렇게 되네요.”

“부정하지 않으시니 제 짐작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시지만, 불편하신 곳이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멀쩡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까지 대화가 이어졌을 때, 어느새 슬쩍 근처로 다가온 포이닉스가 에우도로스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아킬레우스의 막사고, 늦은 시간이다. 회의라는 원래의 목적 외로 해인에게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어서 좋을 게 없었다. 아무리 친척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 지켜야 할 것은 늘 존재하는 법이었다.

해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척 건드렸기에 해인은 포이닉스의 행동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에우도로스는 반사적으로 그것이 작은 경고임을 깨닫고 힐끗 뒤를 돌아보며 상대를 확인했다.

‘어르신께서 엄격하시군.’

별달리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한 반가움으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마저 자제시키려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고의 이유가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무엇보다 거부하면 그때부터는 모양새가 정말로 이상해질 것도 명확했기에, 에우도로스는 어쩔 수 없이 그쯤에서 물러났다.

회의를 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조용히 사람들을 불러 모은 탓에 테이블같이 거대한 가구는 따로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사람 수대로 스툴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 비밀을 유지하려 한다는 건 정말로 가볍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모두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인은 테이블에 앞에 늘 놓여 있던, 반쯤 그녀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곳에 앉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해인과 대화를 끝낸 에우도로스와, 그 외의 다른 부관들 역시 저마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두가 착석하고 약간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침내 막사 안이 완전히 고요해지자, 유일하게 앉지 않고 테이블 근처에 선 채로 전원을 지켜보던 아킬레우스가 기다렸다는 듯 본론을 내뱉었다.

“암살자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했다.”

정말 본론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에 부관들은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유일하게 먼저 이유를 들었던 파트로클로스만이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몇 초가 지나서야 다른 이들 역시 말을 제대로 이해한 듯 서서히 표정이 바뀌었다. 그 가운데 포이닉스가 가장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암살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목표는 아마 나, 혹은 오디세우스나 아이아스일 거야.”

“어떻게 확인하셨습니까? 진영 내에서는 아무런 사고도, 조짐도 없었을 텐데요.”

“그건…….”

아킬레우스는 말끝을 흐리더니, 힐끗 해인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막사 한구석에 치워 둔 화살 통을 가져와 포이닉스에게 건넸다.

“……해인이 어제 근처 숲의 냇가에서 이걸 발견해 가져왔어.”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어리둥절하게 화살 통을 받아 든 포이닉스가 그 안의 화살을 확인하고는 금세 굳은 얼굴을 했다.

“이건…….”

아킬레우스가 그랬듯 그 역시 단번에 화살의 출처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주변으로 고개를 빼서, 혹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이닉스의 손에 들린 화살을 함께 확인한 다른 부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테베의 화살이군요.”

“숲의 냇가라고요? 진영 근처에 있는 그 숲?”

“냇가에서 저게 왜…….”

사람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만큼 중얼거림은 금세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대신 시선들이 서서히 해인에게 쏠렸다. 다수의 눈길에 해인은 자신이 입을 열어야 할 순간임을 깨달았다.

“음, 그게.”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해인은 전날 아킬레우스에게 이야기했던 내용 그대로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파트로클로스에게 장담했던 대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말하며 조금 기분이 묘해지는 순간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아킬레우스 한 명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여러 명에게 자신이 신의 도움을 받았노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열없는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아르테미스가 자신을 보러 온 계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특히 문제였다.

본인의 입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활을 잘 다루고 영특해서 아르테미스 님이 탐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을 하는 건 누구라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나 해인이 힘겹게 그 말을 겨우 완성시켰을 때였다.

“어……?”

“그건…….”

파트로클로스와 포이닉스가 난데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내 어색한 듯 웃음 지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반응에 해인이 약간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게, 실은 그 말을 한 사람이……. 파트로클로스입니다.”

포이닉스가 어색한 웃음을 띤 그대로 대답했다. 해인은 뜻밖의 사실에 잠시 말을 잃었다. 전날 그녀로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던 아킬레우스는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누구의 발언이었는지를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기에, 해인으로서는 처음 듣게 된 사실이었다.

“……그, 여러 모로 감사합니다.”

찰나의 생각 끝에 해인이 어색하지만 진지하게 인사했다. 서늘한 흥미로 눈을 빛내는 아르테미스를 마주하고 있을 때는 누군지 몰라도 정말 과한 발언을 했다고 생각했었지만, 동시에 그 덕분에 아르테미스가 해인을 보러 온 것이었으니 실질적으로는 파트로클로스가 해인을 살려 준 것과 다름없었다. 파트로클로스는 다소 머쓱한 얼굴로 그 인사를 받았다. 다른 부관 몇몇이 작게 웃었다.

이후 분위기가 약간이나마 가벼워졌기에, 해인은 직전보다 조금 더 편하게 그 뒤의 일들을 마저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제의 일을 전부 전달한 해인이 마침내 말을 맺고 입을 다물자, 저마다 방금 들었던 내용을 곱씹어 보듯 막사 안으로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깨트린 건 에우도로스였다.

“……무엇보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포이닉스가 쓰게 웃으며 동의했다.

“예, 정말 다행입니다. 설마 아르테미스 님이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그는 힐끗 파트로클로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아슬아슬한 농담이 이런 행운으로 돌아올 줄은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포이닉스의 시선을 받은 파트로클로스는 여전히 머쓱한 듯 눈을 굴렸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겼던 것이 기어코 신을 불러냈다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아킬레우스가 그런 파트로클로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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