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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72)화 (72/149)

***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왔을 때, 출전을 앞둔 아킬레우스는 잠시 시간을 내어 해인을 마주하고 전날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저녁부터 밤까지 긴 시간 동안 나눴던 대화 속의 주된 주제는 이번 사건 속의 부수적인 요소일 뿐, 진정한 문제는 결국 암살자의 존재 그 자체였다. 리노스와 텔라몬이 처벌받지 않았다 해서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해결을 위해서라면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아군들을 더 늘리는 게 옳았다.

“……그래서 오늘 저녁 회의가 있을 거야. 적어도 부관들은 그자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

어차피 이번 일을 몰랐으면 하는 존재는 포세이돈뿐이었으므로, 해인은 아무렇지 않게 납득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킬레우스의 부관들이니 이번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서 포세이돈에게 정황을 고해바칠 리가 없다는 확신도 있었다.

“네, 그게 맞겠네요.”

아주 당연하다는 기색의 대답에 아킬레우스가 피식 웃었다.

“정말 단 한 분만 모르게 되겠군.”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한 분’이 누굴 뜻하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고작 하룻밤, 시간으로 치면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아킬레우스를 보며 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유로운 건 상관없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처럼 사방이 트인 바깥에 선 채로 비밀이 담긴 농담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제 이유도 들으셨잖아요. 예외적인 경우니까요.”

이름을 정확하게 언급하지도 않았고, 근처에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킬레우스에게는 해인처럼 아무 곳에서나 내킬 때 포세이돈에게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포세이돈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리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괜히 마음이 불안해진 해인은 결국 속삭이듯 주의를 덧붙이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분을 더 언급하지 마세요…….”

“알았어.”

낮게 웃으며 대답한 아킬레우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서 리노스와 텔라몬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광경이다. 그들의 존재를 확인한 아킬레우스는 다시 해인을 돌아보았다.

“당분간은 진영 안에서만 지내. 미안하지만, 막사 주변을 많이 벗어나지도 말고.”

당분간이라고 했지만 달리 말하면 암살자가 잡힐 때까지다. 그러나 어제를 제외하면 어차피 단 한 번도 진영을 벗어난 적 없었던 해인은 유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 주변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자세히 파악하지 못한 위험이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해결될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하는 게 옳았다.

“네, 그렇게 해야죠.”

답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한 가지 더 당부했다.

“저 둘과도 떨어져 있지 말고.”

그는 뒤쪽을 가리키듯 가볍게 고갯짓했다. 아킬레우스의 어깨 너머로 리노스와 텔라몬이 오고 있음을 그제야 발견한 해인이 빙긋 웃었다. 새삼스러운 반가움이 번졌다.

“그럼요.”

환한 아침이라 웃는 낯을 더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꺼워서 아킬레우스는 무심코 희미하게 마주 웃었다. 더 이상 언급할 것은 없었고, 있더라도 지금의 모습을 보면 아마 해인은 알아서 잘 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고, 출전도 가까워 시간이 촉박하니 그만 대화를 끝내야 했으나 괜한 아쉬움이 발목을 잡았다.

“……다녀올게.”

가능하다면 곁에 있고 싶지만, 정말로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지못한 듯 꺼낸 말에 해인은 고개를 들어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사실 무엇이든 철저히 조심해야 할 사람은 해인 혼자만이 아니었다.

“당신도 조심하세요. 저녁에 봐요.”

건네진 인사에 아킬레우스는 조금 더 제대로 웃어 보였다.

저녁을 이야기하는 인사는 돌아올 곳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 기분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완전했다. 출전이 내키지 않는 마음은 여전하더라도 별개의 충족감이 차올랐다.

“그래, 저녁에.”

그 답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렸다.

해인은 멀어지는 아킬레우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성큼성큼 걷던 그는 곧이어 걸어오던 리노스와 텔라몬을 자연스럽게 마주했다. 당장 인사하려는 그들을 앞서서 만류하고 짧게 몇 마디 건넨 뒤, 그대로 스쳐 지나가 다시 멀어지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며 해인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리노스와 텔라몬은 해인의 앞에 섰다.

“아가씨.”

각오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처벌이 없어서인지 둘 모두 다소 복잡한 표정이었다. 해인은 모르는 척 그들에게 웃어 보였다.

“좋은 아침이네요.”

“예…….”

그들도 이번 결정에 해인이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더 캐묻거나 말을 보탤 수는 없었다.

처분에 대해서는 새벽에 전달받았지만, 방금 전 아킬레우스와 잠시 마주치며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런 처벌이 없는 대신, 더 주의를 기울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명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고 할 것이지만, 각오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였기에 마음가짐과는 별개로 태도가 묘하게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해인도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 부분인지라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해인에게는 칼리에가 있었다. 아침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리노스와 텔라몬보다 먼저 해인을 찾아왔던 칼리에도 사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게 굴며 해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해인이 평소처럼 대하자 금세 기죽음을 떨쳐 내고 괜찮아졌던 것이다. 어린아이의 회복력에 힘입어 해인은 조금 더 쉽게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은 막사 안에서 있을게요. 칼리에와 놀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리노스와 텔라몬의 복잡함을 끝까지 모르는 척 유지하며, 해인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굴었다. 가장 신분이 높다고 볼 수 있고, 그런 만큼 영향력이 큰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자 속으로야 어쨌든 겉으로 볼 때만큼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다.

약간은 묘한, 그러나 분명한 평화였다.

***

그날 저녁이었다.

늘 그래 왔듯 아킬레우스의 막사 앞에서 당일의 전투에 대한 보고 사항을 모두 전달한 파트로클로스는 곧바로 떠나는 대신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아킬레우스, 이따 있을 회의는 왜 소집한 거야?”

그는 아침부터 저녁에 회의가 있을 것이라는 말만 급히 전해 들었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다른 부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차피 회의 장소로 쓰일 곳은 자신의 막사였으니, 마침 옆에 회의를 소집한 상관이 있는 만큼 이유를 간단하게라도 알아 두고 싶었다.

“흠.”

아킬레우스는 짧게 침음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리노스와 텔라몬은 막사 문 바로 앞에 뻣뻣한 자세로 붙어 서 있고, 그 외의 병사들은 대화가 들리지 않을 법한 거리에 있다. 질문을 꺼낸 파트로클로스는 부관들 가운데서도 가장 믿을 만한 자였으니 본인이 알고 싶다면 먼저 이유를 알려 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는 가볍게 손짓해 파트로클로스를 가까이 불러오고는, 목소리를 낮춰 천천히 전날 일을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회의는 보통 좋지 않은 사유로부터 비롯되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설마 암살 위험까지는 예상을 못 했던 파트로클로스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흔들리는 눈을 감추지 못했다.

“……뭐? 아니, 지금 그러면.”

“목소리 낮춰.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허.”

파트로클로스는 탄식하듯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고민하듯 한참을 침묵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때, 그는 시선을 들어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회의는 부관들만 참석시켜? 가벼운 사안도 아니고, 직접 겪은 건 아가씨니까 괜찮다면 그분께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옳지 않나 싶은데…….”

아주 틀린 의견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재고할 것 없이 단번에 그 말을 기각하려 했다. 해인을 굳이 회의에 앉혀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별의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그는 이전 팀블레에서 있었던 연회 자리에도 해인을 데려가려 들었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때 아킬레우스의 행동을 말리려 들었던 파트로클로스가 지금은 해인을 회의에 동석시키기를 권하듯이, 단순 회의라면 합당한 이유가 있는 이상 대단히 문제가 될 일도 아니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아킬레우스가 신경 쓰는 문제는 다른 쪽이었다. 아무리 스스로 괜찮음을 피력한다 해도, 그 일은 해인에게 있어 본인도 모르는 새 목숨을 위협받았던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해인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았던 순간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안…….”

다만 그가 막 입을 연 순간, 막사의 천이 펄럭였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해인이 바깥으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막사 근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만큼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 모두 시선이 그곳으로 돌아간 것은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특히 방금 해인에 대한 말을 꺼냈던 파트로클로스는 약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해인으로서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막사 안에서 칼리에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가 끊긴 순간 바깥이 소란스럽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 나와 본 것뿐이었다.

막사 안에서는 전날처럼 작정하고 문가에서 서성이지 않는 이상 바깥에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까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해인 본인부터가 칼리에와 대화 중이었으니,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정말로 돌아와 있었다는 사실은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확실해진 바였다. 당연히,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전혀 몰랐다.

하필 상황이 공교롭게 돌아간 것이다.

바깥에 나온 해인은 두 사람의 눈길이 곧장 자신에게 꽂혀 들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갑작스레 막사에서 나왔으니 시선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왜 그러세요?”

인사라도 건네려 나왔던 것이었으나, 정작 꺼낸 첫마디가 질문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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