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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71)화 (71/149)

“……하.”

침묵을 깨고 아킬레우스가 또 헛웃음을 뱉어 냈다.

냉철한 척 말하기는 했지만 양심이 전혀 찔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던 해인은 슬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양심의 문제도 문제였고, 동시에 이런 발언이 안 좋게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역시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말을 철회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알렸다가 얼마나 화내실지 나도 모르겠단 말이지. 말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삼천 년이라는 아득히 긴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겪은 여러 경험들로 인해 성격이 마모된 현대의 포세이돈은 과거에 비해 온화하고 침착해졌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해인이 무언가에 의해 위험해지는 일이 생기면 몹시 화내거나 불쾌해하며 근원을 철저하게 없애려 들었다. 관용 같은 건 그의 사전에 없는 단어였다.

그런 아버지의 성격을 너무 잘 알기에 해인은 도저히 이곳의 포세이돈에게 이번 일을 알릴 수 없었다. 현대보다 덜 침착하고 상대적으로 난폭하기까지 한 포세이돈이 이 일을 알게 되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감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포세이돈은 인간들의 전쟁에 지나치게 개입할 수 없을 테니 근본적 원흉인 테베를 무너트리지는 못할 테고, 그러면 결국 그의 분노에 가장 크게 피해를 보게 될 건 아킬레우스와 리노스, 텔라몬이라는 사실이다. 여러 사람의 앞날을 고려하면 다시 생각해도 이게 맞는 방향이었다.

“당신이 느끼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에요. 제가 내키지 않아서 그러는 것에 더 가까워요.”

해인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모든 걸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걱정이 과하셔서 가끔은 곤란할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직전까지의 당황이 무색하게도 짧은 순간 반쯤 설득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찾아온 절반의 동요 속에서 그는 미간을 좁혔다. 어지간하면 설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도 아닌 동질감은 사람을 쉽게 흔드는 힘이 있었다. 그에게도 걱정이 과한 어머니가 있는 탓에, 해인의 말을 그만 깊이 이해해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인 펠레우스가 아들에게 그저 너그러웠던 것과는 달리, 테티스는 자신의 필멸자 아들을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 그를 자신의 의도대로 통제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물론 그 모든 행위는 기껏 낳은 자식이 오래도록 살아남았으면 하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이란 방식에 따라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어린 소년에게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만큼 유쾌하지 못한 경험도 드물었다.

아킬레우스가 기어코 전쟁터로 뛰쳐나간 이후로는 테티스도 결국 포기한 듯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출전하기 바로 직전 스키로스에 아직 발을 딛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킬레우스는 늘 테티스의 시야 안에 있었다. 애초에 테티스는 에게해에서 머무르는 네레이데스(바다의 님프)고, 스키로스는 에게해의 한가운데 위치한 섬이었던 것이다.

이전 기억을 떠올리느라 아킬레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주 보고 앉아 있었기에 표정을 확인하기는 쉬웠고, 그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있던 해인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저를 이해하신 표정이네요.”

뜻밖이라는 어조였다. 아킬레우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테티스처럼 어머니가 아들을 보호의 명목으로 억누르는 건 흔치 않은 일이 맞다. 하지만 아버지가 결혼하지 않은 딸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인식의 차이 탓에 미처 빠르게 깨닫지 못한 사실은, 누구든 보호라는 이유로 자유를 억압당하는 건 싫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해인은 현대의 포세이돈이 키웠고, 그는 기원전과 비교하면 거의 달관한 것과 같은 성격이었으므로 대단히 억압받고 자라지는 않았다. 다만 가족에게 다정한 아버지의 기저에 깔린 변덕스럽고 난폭한 성격을 진작 눈치챘던 해인이 자진해서 스스로를 보호 속에 가뒀던 면은 분명 있었다.

어쨌거나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확신을 얻었다. 조금 밝아진 낯으로 그녀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리노스 님과 텔라몬 님은 이미 저한테 여러 번 사과하셨어요. 당신도 제게 미안하다고 말했고요. 게다가 저는 별달리 피해를 입지도 않았잖아요.”

거기까지 말한 해인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멈췄다. 리노스와 텔라몬의 안일함이 문제가 된다면, 비슷한 맥락에서 그녀도 그렇게까지 잘 처신하지는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 따져 보면 그 숲에 가겠다고 동의한 데다, 리노스 님이 멀리 떨어져 계셔도 아무렇지 않았던 저 역시 안일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언어로 구체화하자 일단 본인에게는 설득력이 생겼다. 잠깐 당황한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 저도 죄송하…….”

하다못해 해인이 저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아킬레우스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았다. 그는 해인의 사과가 완성되기 전에 입을 열어 말을 끊어 냈다.

“……사과하지 마.”

“음.”

해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요,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리노스 님과 텔라몬 님도 악의가 있거나, 고의로 그러신 게 아니었고요. 오히려 저를 챙겨 주시려다 운 나쁘게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을 뿐이에요. 제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어요.”

방금 전의 일 때문인지 아킬레우스의 표정은 처음보다 다소 풀려 있었다. 해인은 나름대로 진심이었고 아킬레우스를 어이없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조금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해인은 부드럽게 이어 말했다.

“어디까지나 이번이 예외적인 일이었어요. 한번 일을 겪은 만큼 앞으로는 방심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하면서 예외를 만들지 않으면, 저는 아마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닌가요?”

길게 말했지만, 사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결국 ‘포세이돈에게는 알리지 말자’, 그리고 ‘리노스와 텔라몬은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겠냐’, 이 두 문장으로 끝낼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곧장 답하지 않고 복잡한 눈으로 해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 끝에,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를 꺼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화살을 눈짓했다.

“물론 그대의 말이 전혀 틀린 건 아니야. 하지만 살수들은 이미 삶을 포기하고 달려드는 자들이라 그 머릿속을 간단히 짐작할 수 없어. 만약 저 화살의 주인이 이미 그대를 노리겠다고 생각했으면, 어떤 식으로 틈을 만들어 접근할지 단언하기 힘들다는 소리야. 그런데도…….”

잠시 망설이듯 말끝을 흐린 아킬레우스가 물었다.

“변함없이 그들을 믿어?”

“……네.”

대답과 함께 해인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아킬레우스의 손등 위를 가볍게 덮었다. 손등을 덮어 오는 약간 서늘한 체온에 아킬레우스가 멈칫했다. 그는 그들을 믿느냐고 물었지만, 해인은 말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질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의 답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당신이 가장 믿었던 분들이잖아요.”

아킬레우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해인은 천천히 또렷하게 덧붙였다.

“당신의 신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제 와서 그 신뢰를 의심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요.”

해인의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완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 버렸는지, 막사의 천을 투과하는 빛조차 없어 더 완전한 침묵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화로의 불꽃만이 아른거리며 벽을 비췄다.

몇 초쯤의 시간이 흘렀다.

그 끝에 아킬레우스는, 결국 해인에게 넘어갔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그래.”

성공을 확신한 해인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가 리노스와 텔라몬을 변호하려 애썼던 건 그들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존재했다.

아킬레우스가 아무리 그들의 안일함을 지적하고 임무에 소홀했음을 언급해도, 인간의 마음을 가진 이상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리노스와 텔라몬을 아끼지 않을 리 없었다.

처음부터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며 해인에게 그들을 붙여 준 것에서부터 그 마음이 드러났다. 하루 이틀로 쌓아 올린 신뢰가 아니라는 사실을, 외부인인 해인조차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그토록 각별한 사람들을 오늘처럼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사고로 처벌해야 한다면, 아무리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마음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을 것이 당연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항상 같을 수는 없기 마련이다.

매일 전쟁터에 나가고, 부관들과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이 죽어 나갈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부담감을 안고 있을 사람에게 그런 일까지 얹어 놓을 수는 없었다.

‘두 분이 계속 눈치 볼 것 같아서 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정도쯤이야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끌어안고 사는 것에 비하면 사소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해인은 낮 동안 진영에서 리노스와 텔라몬을 내내 곁에 두고 있을 테니, 그들의 마음도 천천히 시간을 두면 아마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해인의 올라간 입매를 잠시 응시한 아킬레우스는 시선을 내려 여전히 자신의 손등을 덮고 있는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대의 곁을 지키게끔 두도록 하지. 그리고 그자는……. 빠르게 잡아내서, 그대를 더 오래 불안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본인이 내뱉은 말만큼은 지키려고 최선을 다 할 사람인 것을 알기에 해인은 만족했다. 결과적으로 해인이 원했던 것은 모두 달성한 셈이었다.

“네, 충분해요.”

대답과 함께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손등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서 떨어진 해인의 손을 낚아채듯 되잡았다. 손바닥에만 닿았던 체온이 금세 손 전체로 전해졌다.

잠깐 당황한 해인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으나, 이내 시선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아킬레우스를 마주하고 그대로 멈칫했다.

……아주 짧은 찰나가 흘렀다.

그리고 해인은 충동적으로 그의 행동을 용납했다. 잡힌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아킬레우스는 순간의 허락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해인의 손끝에 스치듯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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