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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70)화 (70/149)

“괜찮으세요?”

그때 해인이 무겁게 이어지는 침묵을 깨트렸다.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표정이 심각했고, 다 듣고 나서는 생각에 잠겨 있는 눈치기에 그녀는 아킬레우스가 혼자 정리할 시간을 주고자 일부러 조용히 있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나빠져서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어지던 생각을 끊고 들려온 목소리에 아킬레우스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혼자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더니, 처음으로 꺼낸 말이 맥락을 알 수 없는 사과라는 사실에 약간 당황한 해인이 물었다.

“뭐가요?”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한 것. 그대를 지키겠다고 했는데, 이걸 보니…….”

아킬레우스는 테이블에 쏟아 두었던 화살 하나를 손에 들었다.

“내가 안일했다는 게 드러났잖아.”

이런 평화롭지 않은 일을 해인이 알도록 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졌다. 참담한 사실이었으나 되돌릴 수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들었던 해인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그녀는 이미 이 일이 그리 가볍지 않은 사건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다 직접 일을 겪은 당사자이기도 했으니, 정보를 감춰 봤자 예의도 아니고 의미가 있지도 않았다. 그는 천천히 설명했다.

“그대가 짐작했던 대로 이건 꽤 큰 문제야. 연합군의 최종 목적인 트로이는 명백히 궁지에 몰렸고, 지금 상대하고 있는 테베는 그런 트로이와 가장 가까운 우군이지. 연합군을 이기거나, 최소한 세력이라도 꺾을 수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든 할 거야. 그런데 이 화살은 바로 그 테베에서 사용하는 것이거든.”

해인은 눈을 잠시 내리떴다. 직접 겪은 일에 몰랐던 정보가 더해지자 흩어진 조각들이 맞아 들어가듯 상황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럼 그 사람은 단순한 괴한이 아니라, 테베에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준비시켜서 일부러 보낸 자라는 뜻이군요.”

“그래, 아마도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암살자?”

망설이듯 말끝을 흐리는 아킬레우스 대신하듯 해인이 또렷한 목소리로 단어를 뱉어냈다. 안전한 곳에서 평화롭게 자랐을 해인이 암살이라는 단어에 놀라거나 겁먹을까 조심스럽던 아킬레우스를 오히려 당황시키는 태도였다.

그는 곧장 답하지 못했지만, 해인은 상대의 침묵이 수긍이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해인은 약간 아연한 기분이 되어 생각했다.

‘암살자라니, 내가 말해 놓고도 안 믿기는 단어네.’

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정말로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암살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잠입하는 사람이, 영화 속이 아닌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스쳐 지나가는 감상이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해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암살이 목적이면 노릴 만한 대상은 아무래도 연합군 소속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여기 근처에 숨어 있었다는 건 당신을 포함해 그 숲 근처에 진영을 두고 있다는 분들이 특히 위험하다는 뜻이고요.”

말을 잇다 보니 걱정스러워졌다. 해인이 불안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히자 아킬레우스는 쓰게 웃었다. 전부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해인이 걱정해야 할 일은 다른 부분이었다.

“해인, 위험한 건……. 그대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킬레우스는 맞은편의 상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런 겁주는 것 같은 말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해인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제대로 알려 줘야 하는 문제였다. 위기감을 가지고 있어야 문제 상황에 대비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방심하지 않는 이상 나나 그들은 누가 오든지 제압할 자신이 있지만, 그대는 어떻지? 심지어 그자는 이미 그대의 얼굴을 봤잖아.”

“……아.”

해인은 순간 멈칫했다. 위험을 이미 한번 탈출했던 바, 무심코 그걸로 끝이라고 여겨 본인도 여전히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에까지는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완전히 납득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지만……. 저는 여기서 그리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까요?”

“내게는 중요한 사람이지.”

아킬레우스가 나직한 어조로 반박했다.

“내 진영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확인했다면 얼마든지 그대를 노릴 수 있어. 그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담이 적을 테니까.”

스스로 내뱉은 말에 씁쓸함을 느낀 아킬레우스는 한숨을 삼키며 눈가를 몇 번 문질렀다. 해인은 바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반박거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 온 이후부터 나는 혼자 있었던 적이 없는데.’

사실이 그랬다. 테베에 도착한 이후, 낮 동안은 리노스와 텔라몬, 그리고 항상 칼리에가 곁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부터 다시 날이 밝아 오기까지는 아킬레우스와 같은 막사 안에서 지냈으니, 해인이 혼자 어딘가에 떨어져 있었던 순간은 실제로 전무하다시피 했다. 하필 예외적인 경우였던 오늘 사건이 벌어져 이 사달이 났을 뿐이다.

‘오늘 같은 일을 안 하면 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아무래도 적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해인은 힐끗 아킬레우스의 표정을 확인했다. 자책감이라도 크게 느끼는 듯 가히 좋지 않았다. 저대로 둘 수는 없었던 해인은 위로를 겸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차피 저는 평소에 혼자 있지 않잖아요.”

눈길을 아래로 두고 있던 아킬레우스가 느릿하게 시선을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다음으로 할 말을 고르던 해인은 문득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생각이 닿았다. 혼자 있지 않는다는 것에는 그들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라서였다.

잠시 입을 달싹이던 해인은 이참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뜬금없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혹시 리노스 님과 텔라몬 님을 처벌할 건가요?”

“뭐?”

아킬레우스가 약간 당황한 듯 되물었다. 해인은 살짝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월권이면 죄송해요. 하지만……. 처벌할 생각이었다면 재고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조심스러운 시선에 직전까지의 기분과는 별개로 아킬레우스는 다소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 나머지 상황에 의한 심각성을 순간 잃고 만 그는 잠깐의 생각 끝에 한숨 같은 헛웃음과 함께 답했다.

“월권도 아니고, 눈치 볼 필요도 없어. 그대는 군 소속도 아닐뿐더러 위험에 처했던 당사자이니, 그들에 대해 말을 보태는 건 당연히 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지.”

물론 미소는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어째서? 그들이 맡은 의무에 소홀했던 건 사실이잖아. 그대는 운이 안 좋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이 안일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텐데.”

해인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달리 돌아오는 답이 없자 아킬레우스는 그제야 해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기를 예상했다는 듯 마주 봐 오는 짙푸르고 고요한 눈길은, 하고 싶거나 해야 할 말이 있다면 얼마든지 계속해도 좋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복잡한 기분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아가 그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며 그대에게 붙여 준 건 나였어. 내 신뢰가 틀렸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그 책임을 지려면 그들을 처벌한 뒤 나 역시 다시금 사과해야 해. 그대와, 내게 그대를 맡긴 그대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어떻게든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아야지. 그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이미 낮 동안 리노스와 텔라몬에게 책임이라는 단어를 질리도록 들었던 해인은 아킬레우스마저 비슷한 말을 하자 무심코 침음했다.

“음…….”

리노스와 텔라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조금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막상 아킬레우스의 말을 들으니 지금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잘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포세이돈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었다. 해인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일단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문제를 아버지까지 아셔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 시대를 기준으로 두면 파격적인 발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해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뭐?”

과연 아킬레우스는 순간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묻고 말았다. 앞서 해인이 찰나에 떠올린 생각대로, 포세이돈이 그토록 아끼며 감싸고돌던 딸이 할 만한 소리라기엔 꽤 반항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사람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해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속해서 저만 지켜보고 계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만약 이 일을 아셨다면 당장 달려오셨을 텐데, 지금까지 그러지 않으셨다는 건 그분께서는 아직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이대로 말하지 않으면 아마 끝까지 모르시겠죠.”

해인은 문득 아르테미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방금 해인이 확신하는 대신 ‘아마’라는 단어를 붙이게 만든 유일한 변수였다. 하지만 새삼 생각해봐도 설마 그녀가 포세이돈을 찾아가 오늘의 일을 친절하게 이야기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악감정은 내비치지 않았다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의 남매인 아폴론을 대놓고 못마땅해 하는 숙부를 먼저 찾아갈 리가 없었다.

“다친 것도 아니고, 그때 조금 놀랐을 뿐이지 대단히 충격 받은 것도 아니니까, 당장 제가 입은 피해는 사실상 전무해요. 그럼 이대로 아버지께서는 모르시도록 두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을까요?”

그 물음을 끝으로 막사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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