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러운 어조의 제안이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파란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며 아킬레우스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진정하기 위함이다.
그는 자신이 포세이돈으로부터 해인의 신변 안전을 지킬 의무를 건네받았음을 언제나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 기어코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었지만, 그렇다면 그 일이 더 커지거나 또 재발하지 않게 제대로 처리하기라도 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기 위해 어차피 들어야 할 이야기, 당사자가 직접 말하겠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대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리노스와 텔라몬을 돌아보며 짧게 명령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들은 후 처우를 결정할 테니, 둘은 이만 물러가도록.”
“알겠습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명령에 따랐다. 아킬레우스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보인 두 사람은 뒤이어 해인에게도 인사했지만, 다른 때처럼 친근한 태도도 아니었고 시선을 마주하지도 않았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방금 전 아킬레우스가 ‘무슨 일이었는지부터 들어 보겠다’고 말한 이상, 상황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리노스와 텔라몬의 태도로부터 미루어 봤을 때 그들은 이번 일에 있어 자신들이 처벌받는 편을 마음 편하게 여길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해인은 최대한 둘을 변호해 볼 생각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는 천천히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일단 들어가요. 보여 드려야 할 것도 있어서요.”
“그러지.”
아킬레우스가 수긍해 왔다. 둘은 침묵 속에서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냇가에서 건져 냈던 화살 통은 지난밤 마주 보고 앉아 술잔을 기울였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테이블로 걸어가며 해인은 문득 전날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일부러 떠올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장소를 눈에 담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되살아나는 기억이었다.
그런 대화를 나눠 놓고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멀쩡하게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해인이 애써 세워 놓았던 마음속의 벽이 어느 사이엔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낮아진 탓이었다. 만약 단 한 번의 계기가 생긴다면,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으리라는 걸 그 마음의 주인인 해인이 모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니까.’
그녀는 깊이 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리노스와 텔라몬에 대한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자체로도 큰 문제일 수 있었다.
연합군 진영 근처에 위치한 숲에 무기를 소유한 사람이 숨어 있었다.
그는 연합군 소속이 아니며, 자신의 무기를 우연히 발견한 사람을 제거하려 들었다.
이 두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심상치 않았다. 만약 떠내려오는 화살 통을 발견한 사람이 해인이 아닌 다른 시종들이었다면 신의 도움을 받지도 못했을 테니, 오늘 전쟁터도 아닌 곳에서 사망자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가볍게 넘어갈 일은 아닌 것이다.
“이건?”
마침 테이블 위에 놓인 화살 통을 발견한 아킬레우스가 물었다. 해인은 그에게 화살 통을 건네주고 먼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보여 드려야 한다는 게 이거예요. 오늘 저쪽 숲에 있는 냇가에 갔다가, 상류에서부터 떠내려오는 걸 우연히 발견했어요.”
해인이 말하는 숲이 어디인지는 아킬레우스도 곧장 파악했다. 근처에 위치한 진영들은 전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인 장군들의 진영이고, 무엇보다 자신의 진영에서 가장 가까웠기에 진영 바깥이라 할지언정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숲의 냇가에서…….”
낮게 중얼거리며 표정을 굳힌 아킬레우스는 화살 통을 받아 들었다. 해인이 특정 장소를 언급했다는 건 그곳에서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리였으니, 그 숲이 안전하다 여겼던 자신의 판단은 틀렸던 것이다.
그는 내심으로 스스로를 비판하며 화살 통의 겉면을 확인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탓에 예민하게 살폈지만, 그럼에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어떠한 특징도 없다는 점이 차라리 인상적일 정도였다. 가볍게 흔들어 보자 화살들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어서, 그는 테이블 위로 화살 통을 기울여 화살들을 쏟아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표정을 굳혔다.
“……아킬레우스?”
직전까지도 그리 편안한 얼굴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정말 무섭도록 얼어붙은 낯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어지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그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던 해인이 머뭇거리며 이름을 불러 봤을 정도였다.
해인이 당황한 것을 본 아킬레우스는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노스와 텔라몬, 그리고 해인은 화살이 연합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정확한 출처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화살의 출처까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스스로의 충격을 이유로 눈앞의 사람을 더 당황시키거나 겁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우선 해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애써 평소 같은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물었다.
“이걸 냇가에서 건져 냈다는 건가?”
해인은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러니까…….”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해인은 자신이 아침부터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정확한 이유만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아침부터 무료해하던 자신을 위해 리노스와 텔라몬이 ‘숲으로 산책이라도 가시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건넸다고 돌려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외에는 모두 철저한 사실들이었다. 가벼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신마저 조금 발을 걸친 일이었으니 자세할수록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해인은 냇가에 도착해서 떠내려오는 화살 통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든 화살이 연합군의 것이 아니어서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냇가 근처를 급히 벗어났으나 안개 때문에 길을 잃고 칼리에와 떨어졌던 것, 안개 속에서 만났던 아르테미스가 화살 통의 주인이 나무 뒤에 숨어 해인과 칼리에를 죽이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음을 알려 준 것, 마지막으로 그녀의 도움을 받아 위험을 벗어나 리노스를 만났던 것까지 모두 말했다.
“……하.”
꽤 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한 번도 해인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던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입을 닫자 짧게 한숨과도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해인의 이야기를 듣기 전 화살을 먼저 확인하고 그것의 출처를 확신한 바 있었다. 전장에 나서지 않은 리노스와 텔라몬, 그리고 해인은 화살이 그저 연합군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눈치챘으나 아킬레우스는 아니었다. 그는 이 화살을 테베에 도착해 개전한 이후로 수없이 많이 보았다.
이건 테베 측의 병사들이 쓰는 화살이었다.
그는 방금 들었던 이야기와, 현재 이 일에 대하여 아는 이들 가운데서는 그만이 아는 화살의 출처에 대한 정보를 종합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였다.
‘가까운 곳에 연합군 진영만 세 개가 위치한 숲속에 테베의 화살을 쓰는 놈이 숨어서는,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무해한 여자와 아이조차 없애려 들었다고…….’
단순히 테베의 탈영병 같은 것이면 차라리 다행이겠으나, 상식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다. 높은 확률로 암살 따위의 임무를 받은 자객이었다.
암살은 몹시 비겁한 수단이지만, 절벽 끝에 몰려 다급해진 이들이라면 체면을 신경 쓸 틈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거쳐 왔던 다른 도시들과 달리 테베는 트로이와 결혼 동맹으로 맺어진 서로의 확고한 우방이었으니 더욱 승리가 절실할 터였다.
비겁한 수단이니만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가볍게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화살 통 자체는 눈에 띄지 않는 모양이라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엄연한 테베의 화살이다. 이런 것을 챙기고도 연합군이 세운 진영 뒤의 숲속에 무사히 숨어 있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어쩌면 협력자가 근처 진영, 혹은 최악의 경우 아킬레우스의 진영에 숨어 존재할 가능성도 있었다.
‘……목표가 될 법한 건 나와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노려질 확률이 높은 건 아마도 아킬레우스, 본인이다. 그는 누가 뭐라 하든 연합군 내 최고의 무장이었고, 그가 없으면 연합군은 크게 흔들릴 것이 자명한 탓이었다.
이전의 그였다면 암살자가 자신을 노린다고 한들,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암살 위협은 이미 지난 십 년간 몇 번 정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이제껏 그래 왔듯 비겁한 방법이라고 간단히 평한 후, 언젠가 자객이 자신을 덮쳐 온다면 역으로 그의 목을 찔러 위험을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맞은편의 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은 온종일 진영 내에 머무르고, 활동 반경도 보통은 막사를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 알고자 하면 그녀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니만큼 노려지기도 쉬웠다. 숲에 숨어 있을 자객이 이미 해인의 얼굴을 일방적으로 확인했을 것이고, 또한 뒤를 조금이라도 쫓았다면 어느 진영으로 향하는지도 알아냈을 것이다.
임무를 받았을 때 목표한 대상은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를 아는 이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라고 여유롭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근처 진영의 장군들에게 향할지도 모르는 위험, 진영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배신자 혹은 간자의 가능성, 모두 중요한 문제였으나…….
결국 가장 신경이 쓰이고, 신경이 쓰이다 못해 걱정되고, 심지어는 두려울 만큼 중대한 문제는 다른 무엇도 아닌 해인의 안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