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멍하니 아무도 없는 곳을 보고 있던 해인은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쓸어 넘긴 해인이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마주하고 있는 내내 거대한 맹수를 눈앞에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아르테미스의 말대로 가던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하며, 해인은 신이 했던 행동들을 되짚었다.
‘그래도 내가 읽은 것들에 나오던 모습과 비교해보면 너그러웠지. 아버지에게도 별로 악감정이 없는 것 같고……. 조금 뜻밖이네.’
해인은 이 시대의 포세이돈이 아폴론을 눈에 띄게 못마땅해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은 남매 신이었으니 아르테미스도 자신의 동생을 싫어하는 포세이돈을 나란히 싫어할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포세이돈의 이름을 언급하며 별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윗사람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태어날 때 도와줘서?’
레토가 두 신을 낳을 때 포세이돈이 그녀를 델로스 섬으로 인도하고 파도를 펼쳐 섬이 드러나지 않게 숨겨 주었다는 건 해인도 알고 있었다. 신들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였으니만큼, 포세이돈에게 직접 들은 많지 않은 이야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듯 짧게 언급했을 뿐이지만, 해인은 그가 해 준 이야기는 대부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어쨌든 다행이다.’
현대로 전해지는 전승 속에서 아르테미스는 언제나 냉정하고 잔혹한 신으로 묘사됐다. 그리고 그런 현대에서 포세이돈을 제외하면 그 어떠한 신조차 만나 본 적 없던 해인은, 아르테미스가 과연 정말로 그러한 성격인지에 대해 직접 판단할 기회 같은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부터 몹시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 긴장이 무색하게도 방금 전 해인이 아르테미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것도 여러 일화에서 봤던 것처럼 도움 같지도 않은 도움이 아니었다.
‘무생물이나 동식물로 만들지 않았으니까…….’
이렇듯 평범하게 도와줄 수도 있는 신인데도 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전부 그런 식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해인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칼리에도 똑같이 괜찮아야 하는데.’
느리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해인은 거의 뛰듯이 안개를 헤쳐 나갔다. 그에 맞춘 듯 주변의 안개가 조금씩 걷혀 나가며 시야가 선명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한 명은 작았고 한 명은 그보다 컸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해인은 순식간에 안도하며 달려갔다. 그러자 상대 쪽에서도 해인을 확인한 듯, 금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칼리에.”
“죄송해요, 갑자기 안개가……. 안개가 너무 짙어져서……!”
“알아, 네가 잘못한 건 없어.”
그렇게까지 긴 시간 아르테미스를 대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에도 칼리에는 그사이 많이 놀랐던 듯 낯빛이 창백했다. 리노스도 안개가 짙어지는 걸 직접 목격했기에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해인은 구르듯이 달려온 칼리에의 어깨를 잡고 몇 번 토닥이며 리노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다급한 얼굴로 놀란 듯 물어 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혹시 다친 곳은.”
“다친 곳 없이 멀쩡해요.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방금 그 안개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말을 잇던 그는 해인이 그때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화살 통을 보고는 의아한 기색을 했다.
“그건 무엇입니까?”
해인은 리노스의 시선이 화살 통에 닿는 것을 보고 아르테미스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라 새삼 오싹해졌다. 아르테미스가 안개로 사방을 감쌌을 때는 이 화살 통의 주인 역시 숨어 있던 곳에 발이 묶여 당황했겠지만, 해인이 리노스와 칼리에를 만나자마자 안개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 정체 모를 사람도 시야를 되찾았을 것이다.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고 싶으면 그냥 가까이 와서 돌려 달라고 말하면 될 일이다. 해인과 칼리에는 무력 면에 있어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고, 사실이 그러니 지레 겁먹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숨어서 지켜보며 심지어는 죽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이제는 무기를 든 사람이 한 명 생겼으니 자신과 칼리에 단둘만 있을 때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만 믿고 여유를 부릴 이유도 없었다. 수상한 사람은 상대하는 것보다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해인은 힐끗 뒤를 확인하고는, 다시 리노스에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낮추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설명은 지금 못 해요. 우선 빨리 돌아가야겠어요. 필요하면 가는 길에라도 얘기할 테니, 숲부터 벗어나요.”
“……알겠습니다.”
침착하게 말한다고는 했지만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엿보였다. 리노스는 영문 모를 심각성을 깨닫고 더 이상 토를 다는 대신 순순히 수긍했다.
***
군이 귀환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막사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막사 앞을 지키고 선 리노스와 텔라몬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소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런 이상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보통 때와 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물음에 리노스가 지체 없이 나섰다.
“예, 다름이 아니라……. 아가씨의 신변이 위험한 일이 생겼었습니다.”
리노스는 답하는 것과 함께 속으로는 한숨을 삼켰다.
이번 일은 지난번 말이 날뛰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그때는 해인의 주장으로 마구간 근처에 갔었고, 해인은 날뛰는 말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리노스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말이 우연찮게 해인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던 것이었다. 당시 텔라몬은 마구간 근처에서 말을 붙잡는 것을 도왔으며 리노스는 물러나지 않고 해인의 앞을 막아섰었다.
해인을 일에 말려들게 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책임을 느끼기는 했어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일단 그들이 자신의 임무를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아킬레우스도 그러한 사실을 이해해서 별말 없이 넘어갔었으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연합군 진영이 옆에 빤히 있는데도 숲속에 숨어서 무기를 들고 다니는 데다, 제가 잃어버린 것 좀 발견했다고 여자와 아이를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괴한이라니.’
리노스는 해인이 진영으로 귀환하고서야 말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가 눈앞에서 직접 보았던 그 짙은 안개는 해인의 말에 따르면 신이 해인을 돕기 위해 펼친 것이라고 했다. 충분히 납득이 됐다. 아무런 예고 없이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다가, 해인이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흩어지는 것을 생생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신뿐이었다.
덕분에 해인은 무사했지만, 그렇다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일단 리노스와 텔라몬은 해인이 챙겨 온 화살 통의 주인을 보지도 못했다. 그것이 안전에 대해 안일하게 판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시종들이 물을 길으러 다니는 숲이고, 테베에 도착한 이후 그 숲에서 벌어진 사고라고는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과신했던 게 문제였다.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당당하게 산책을 권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또한 리노스는 동생처럼 여기는 아이와 기분을 풀 수 있게 편한 시간을 보내라는 뜻으로 일부러 냇가와 거리를 제법 두고 섰었다.
배려라고 생각해 내린 판단이었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냇가에서 가까이 서 있었더라면, 혹은 냇가의 주변을 조금 돌아다니며 경계했더라면, 그도 아니면 텔라몬을 숲 외곽에 두지 말고 주변을 살피게 했더라면 상류에서 화살 통을 흘린 수상한 사람을 붙잡거나 최소한 얼굴이라도 확인해 둘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굳이 길게 말할 것 없이, 호위하는 입장에서 호위 대상에게 사정을 들어야 했다는 것부터 이미 임무는 사실상 실패였다.
“위험?”
아킬레우스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리노스와 텔라몬의 반응으로부터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던 탓이다. 호위 임무를 맡았던 두 사람도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텔라몬이 고개를 조금 더 숙이고, 그 곁에서 리노스가 막 설명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막사의 천이 가볍게 펄럭이더니 누군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막사 안에서 나올 만한 사람은 해인 외에는 없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아킬레우스와 눈이 마주치자, 해인은 기다렸다는 기색으로 천을 아예 걷고 나와 그에게 향했다.
“오셨네요.”
이전에도 해인은 몇 번쯤 돌아온 아킬레우스를 직접 나와서 맞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나왔던 것은 아니었기에, 아킬레우스는 다소 낯선 광경을 앞에 두고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멈칫했다. 방금 들은 이야기의 영향도 있었다. 호위를 맡겼던 이들이 심각한 태도로 신변의 위협이 있었음을 고했던 것치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해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멀쩡해 보였던 것이다.
“해인, 지금…….”
무사한 모습을 보자 다른 무엇보다도 안도감이 우선하여 뇌를 덮쳤다.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위험이라는 단어를 들었던 순간 차게 식었던 머리가 그제야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을 본 해인은, 그가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차분하고 느리게 말을 이었다.
“위험할 뻔했던 건 사실이지만 결론적으로는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고요. 실은 안에서 듣고 있었는데, 서두를 너무 심각하게 꺼내시기에 나왔어요.”
진영으로 돌아온 후, 해인으로부터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하여 들은 리노스와 텔라몬은 당연하게도 해인에게 사과부터 했다. 내켜 하지 않던 해인을 부추겨 숲으로 이끈 본인들의 잘못이라며 두 사람이 나란히 죄를 고하자, 곁에 있던 칼리에마저 같이 사과하기 시작해 그들을 달래 놓는 것만으로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해인은 칼리에부터 진정시키고 일찍 보내 놓은 뒤, 남은 둘에게도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여러 번 말했다. 하필 그때 그 숲에 숨어들어 있던 괴한이 나쁜 사람일 뿐, 둘 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으며, 애초에 산책을 권유한 건 오히려 자신을 신경 써 주느라 그런 게 아니었냐는 게 그녀의 주된 주장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 통했지……. 이런 사람들이라서 나이 어린 왕자의 호위를 맡았겠지만.’
해인도 자신의 노력과는 별개로 본인의 주장이 그들에게 그다지 위안이 되지는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나마 정말로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서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쳤더라면, 해인은 자신의 나이 두 배쯤 되는 어른 두 명이 눈앞에서 무릎 꿇는 꼴을 보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리노스와 텔라몬이 그토록 책임감을 크게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서, 해인은 그들이 돌아온 아킬레우스에게 오늘 일을 어떤 식으로 보고할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일부러 막사의 문 근처에서 아킬레우스가 올 때까지 서성였다.
막사 안쪽에 있으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까지는 제대로 판별할 수 없지만, 문 근처에서는 내용마저도 어느 정도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 덕택에 대화를 적절한 시점에서 끊고 끼어들 수 있었다.
해인은 살짝 시선을 돌려 리노스와 텔라몬을 돌아보았다. 둘 모두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들도 해인이 자신들의 책임감을 덜어 주려 애쓴 것은 알고 있는 것이다. 해인은 얕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아킬레우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가 말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