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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67)화 (67/149)

“아가씨?”

그때 등 뒤로 다가온 칼리에가 왜 그러냐는 듯 해인을 불렀다. 해인은 뒤돌아서서 칼리에를 보며 화살 통을 든 채로 약간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응, 잠깐 확인하느라.”

“뭔가 문제가 있나요?”

“조금…….”

힐끗 상류 방향을 곁눈질한 해인은 칼리에와 함께 다시 하류 쪽으로 내려와 냇가 안에서 빠져나왔다. 화살 통을 챙기느라 치맛자락을 잠시 놓쳤던 탓인지 끝이 살짝 물에 젖어 있었다. 대충 물기를 짜내며 신발을 신은 해인이 칼리에에게 손짓했다.

“이것 봐, 화살 통인데……. 이런 게 상류에서 떠내려왔다는 건 상류 쪽에 누가 있다는 뜻이잖아.”

칼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해인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러네요. 리노스 님과 텔라몬 님이 지키고 계시는데도 누군가 들어온 사람이 있었나 봐요…….”

말끝을 늘이던 칼리에가 이상하다는 듯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그런데 상류에는 아마 길도 없을 텐데요. 하인들은 모두 저희가 왔던 길로 다녀요. 다른 진영의 하인들이 다니는 길은 더 하류 쪽에 있다고 들었고요.”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래? 그럼 더 문제네.”

“네? 어째서요?”

“실은 이 화살 연합군 진영에서 쓰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그 말은 연합군 진영 뒤에 위치한, 길도 없는 숲속에 정체 모를 사람이 무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거니까…….”

“헉.”

칼리에가 당황하며 몸을 굳혔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가며 상황의 심각성을 새삼 깨달은 해인은 침착하게 바닥에 놓인 목욕 용품들이 든 바구니를 챙겼다. 여기에 사람이 왔었다는 흔적을 최대한 지워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자 칼리에는 당황한 와중에도 자신이 들겠다며 바구니를 가져갔다.

해인은 순순히 바구니를 넘겨주고 자신은 화살 통을 고쳐 들었다. 챙겨 가서 지휘관인 아킬레우스에게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까 전 스치듯 했던 생각을 재차 떠올렸다.

‘……정말 일이 생기다니.’

단순한 우연의 일치겠지만 괜히 기분이 묘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여기서 목욕까지 하지는 않아 다행스럽기도 했다. 아직도 주변에서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왠지 지켜보는 시선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괜히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본 해인이 작게 속삭였다.

“잃어버린 걸 찾으러 내려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가자. 리노스 님이 멀리 있지는 않으니까, 일단 그분과 합류하면 숲을 나갈 때까지는 비교적 안전하겠지.”

“네…….”

칼리에가 바구니를 품에 끌어안으며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해인은 아이의 어깨를 한번 감싸 주고, 이어 상대의 보폭에 맞춰 리노스가 있을 방향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해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칼리에의 보폭에 맞췄다지만 칼리에가 느긋하게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해인의 말에 겁먹은 탓인지 꽤 빠르게 걸었고, 해인도 우선 리노스와 빨리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것을 말리지 않고 함께 속도를 냈다. 거기에 리노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 이 정도쯤 걸었으면 이미 그와 만났어야 했다.

“……아.”

해인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마자 곧바로 또 다른 이상한 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째서 지금까지 몰랐나 싶었을 정도로 주변은 어느새 자욱한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방금까지 어디를 보고 걸었는지도 의문스러워질 정도였다. 이곳이 여전히 숲속이 맞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만큼 안개가 짙었다.

“칼리에?”

게다가, 곁에 있어야 할 사람마저 없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 안개에 뒤덮인 주변, 사라진 동행인. 진부하지만 확실한 공포 요소들이 어느 순간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 지금 뭘 잘못한 건가? 혹시 이 화살 통이 신의 물건이라든지.’

등 뒤가 서늘했다. 지금 이런 상황을 만든 존재, 혹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불안 섞인 의문이 순식간에 엄습해왔다. 스스로를 성찰하며 해인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사방이 안개로 덮여 있어 달리 보이는 것도 없기는 했지만, 경계를 풀지 않아야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기 마련이었다.

그때였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정면 방향이다. 아주 가벼운 소리였기에 알아채는 것은 다소 늦었지만, 해인은 소리를 듣자마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없던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개에 가려 상체는 볼 수 없었지만 투박한 가죽 샌들을 신은 발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의 기척을 내지 않고 걷는, 마치 맹수와 같은 걸음걸이였다.

가까워질수록 안개도 엷어지며 점점 다가오는 이의 형체가 드러났다. 우선은 사람의 형태였다.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해인은 바짝 긴장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건, 뜻밖에도 아름다운 소녀였다.

한 갈래로 내려 묶은 머리카락은 달빛을 꼭 닮은 백금 색이다. 키는 해인보다 훌쩍 컸지만 그에 비해 얼굴은 상당히 앳된 편이었다. 하지만 결코 만만한 인상은 아니었는데, 뺨 위로 발그레한 혈색이 도는 데다, 어깨도 당당하게 펴고 있어서인지 온몸에서부터 힘과 활력이 넘쳤다.

뒤이어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해인은 찬물이라도 맞은 듯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선명하고 기이하게 빛나는 은회색의 눈동자, 일말의 호기심이 깃든 서늘하고 또렷한 동공…….

해인은 바로 알아보았다. 익숙했기 때문이다.

저건 다름 아닌 신의 눈이었다.

신은 고요하게 해인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포세이돈을 볼 때처럼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했지만 그게 어색하지 않았다. 해인은 온몸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에 손을 꽉 쥐었다. 기원전의 포세이돈을 처음 만났을 때 신들의 위압감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해인은 그조차 포세이돈이 기세를 많이 낮췄던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네가 데리고 있던 그 아이는 멀쩡히 갈 길로 갔단다. 어린 소녀는 내가 도와줘야 할 존재가 맞으니까.”

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는 다소 어리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해인은 긴장한 와중에도 빠르게 생각했다. 어린 소녀를 도와주는 신이라고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존재가 없었지만, 그녀는 이내 신의 등 뒤와 허리춤에 무언가 매달려 있음을 확인했다. 그건 커다란 활과 화살 통이었다.

‘앳된 얼굴, 백금 색 머리카락, 어린 소녀를 도와주는 신,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니는…….’

눈에 보이는 정보들을 조합한 끝에, 해인은 비로소 상대의 이름을 깨달았다.

“……아르테미스 님.”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을 들은 신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이채가 떠올랐다.

거기까지 확인한 해인은 자신이 정답을 말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더 이상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눈을 내리떴다. 이름까지 알아챘기에 오히려 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인간 영웅은 몰라도 신들에 대해서는 꽤 많은 것을 읽었던 해인은 어느 매체에서든 아르테미스가 너그러운 신으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잘못한 것은 아마도 없는 것 같았지만, 아르테미스가 왜 왔는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조심하는 게 현명했다. 굳은 어깨를 내려다보며 신이 희미하게 웃었다. 과연 그리 다정한 미소는 아니었다.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구나. 그런데 방금은 왜 몰랐을까?”

해인은 고개만 살짝 들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 화살 통을 찾으러 왔던 인간이 너희를 이미 근처 나무 뒤에서 보고 있었는데.”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해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아르테미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기에 내가 안개를 둘렀단다.”

창백하게 질려 할 말을 잃은 해인을 보며 아르테미스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느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야지.”

가죽 샌들을 신은 발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르테미스는 손을 뻗어 해인의 턱을 잡아 올렸다. 손수 얼굴을 마주한 뒤, 신은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

“……눈을 보니 누가 생각나는구나. 포세이돈 숙부님과 무슨 관계지?”

“제 아버지가, 그분이십니다.”

“숙부님에게 너 같은 자식이 있다고?”

아르테미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포세이돈의 자식들 대부분이 인간이 아닌 괴물의 모습을 하고 태어나는 것을 모르는 신들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진위 여부를 파악하려는 듯 한참 해인의 눈을 들여다보던 신이 이내 가볍게 침음하며 납득했다.

“반신이 맞구나. 그 눈이 증거이기도 하고……. 정말 안 닮았는데 눈만 똑같네.”

턱을 잡은 손을 떼지 않고, 이제는 이리저리 돌려 얼굴을 살펴보며 아르테미스가 말을 이었다.

“지난 저녁 누가 그러더구나. 네가 아름답고 활을 잘 다루는 데다 영특하기까지 해서, 내가 보면 널 탐낼 테니 잘 감춰 둬야 할 거라고.”

해인은 표정을 관리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다 봤으면 얼굴은 놓아줄 때도 된 것 같은데, 계속해서 잡혀 있는 탓에 티 나게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저 과한 칭송을 입 밖으로 꺼냈다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싶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말을 들은 아르테미스가 호기심을 갖고 친히 내려와 도와준 덕분에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었으니, 그 누군가가 해인을 살린 셈이기도 했다.

“날 욕한 것도 아니고, 같잖은 인간이 떠드는 소리니 그냥 무시할까 싶었지. 그런데 요새는 전쟁 구경도 좀 지겨워서 새로운 흥밋거리가 필요했거든. 마침 숲에 있기에 와 봤더니, 이건 뭐 제가 곧 죽을지도 모르고…….”

그사이 해인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는 어투로 중얼거리며 해인의 얼굴을 만족할 만큼 뜯어본 아르테미스는 이내 시큰둥한 얼굴이 되어 손을 뗐다.

“그래, 얼굴은 괜찮구나. 하지만 팔을 보니 살아 있는 걸 단박에 쏠 수 있을 강단은 없겠군.”

김샜다는 듯 말한 아르테미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거라. 반신이고 심지어 내 사촌이기까지 한데, 숨어서 남을 죽일 기회나 엿보는 저급한 남자 따위에게 욕보이도록 내버려 두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리고 신은 해인을 스쳐 지나갔다. 해인이 뻣뻣하게 뒤를 돌아보았을 때, 몇 걸음 걷던 신은 이미 언제 거기 존재했었냐는 듯 사라진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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