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안으로 들어오기 전, 전차에서 막 내렸을 때 바라봤던 숲의 전체 풍경도 그림 같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 역시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맑은 물 위로는 잔물결이 조금씩 퍼지고, 나뭇잎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물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투명한 은색의 반짝임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쁜 풍경이네.”
그 말을 듣고 해인을 올려다본 칼리에는 아침보다 훨씬 누그러진 표정을 보며 활짝 웃고는 대꾸했다.
“그렇지요?”
“응, 오늘따라 날씨가 좋기도 하고.”
해인은 머쓱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사실 아까 진영에서도 하늘 보면서 평화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정말요?”
“정말이야. 전쟁터 뒤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진영에 있을 때 해인의 표정을 기억하는 칼리에는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해인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런 감상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가라앉는 기분을 어쩌지 못했을 뿐이다. 전날 겪은 일이 과하게 인상적이다 보니, 그때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린 탓이었다.
그건 해인의 안 좋은 버릇이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낯선 장소에 떨어져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냈던 탓에 자신도 모르게 예민해져 나오는 행동이었는데, 이제는 해인도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처럼 억지로라도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자 마음은 한결 편했다. 해인은 천천히 냇가로 다가가 양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낮췄다. 물을 어루만지듯 손을 뻗자, 작은 물방울들이 가볍게 튀어 올라 손등을 적셨다.
“하늘은 평화로운데 나는 의미도 없는 고민만 많아서,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싶었지.”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어린아이는 사실상 그 존재만으로도 평화를 주는 편이다. 그랬기에 해인도 칼리에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던 것들을 지금처럼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하고는 했다. 게다가 칼리에는 어리기는 해도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웠기에 제법 괜찮은 대화 상대가 되어 주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해인의 말을 들은 칼리에는 해인과 같은 자세로 곁에 앉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 마세요. 아가씨께서는 신중하신 성격이셔서 그렇죠.”
“고마운 말이네.”
“진심이에요.”
단호한 얼굴로 말한 칼리에는 뒤이어 바구니를 가리켜 보이며 화제를 바꿨다.
“그럼 아가씨, 목욕부터 하시겠어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 드릴게요! 아가씨가 쓰실 거라고 하니까 무언가 많이 주기에 일단 다 받아 왔어요.”
“음…….”
바뀐 화제에 해인은 애매하게 웃으며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양한 크기의 천 여러 장과 작은 병 몇 개가 보였다. 그 병들을 보자 기원전의 땅으로 처음 떨어졌던 날, 포세이돈의 신전에서 그곳 사제의 도움을 받아 씻었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런 경험은 한 번쯤이면 충분한 것 같았다.
‘게다가 너무 밝아서 기분이 좀.’
해인은 슬쩍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물론 그녀의 일행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고,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들릴 거리에 리노스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으며, 숲 외곽에는 텔라몬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가 바깥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처럼 바깥에서는 씻기 싫다는 식으로 호불호를 표시할 수 있는 건 위생적인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이점 덕분인 걸 해인은 언제나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크로노스가 몸의 시간을 고정시켜 놓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씻고 싶어서 장소가 냇가인 것 따위는 거슬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안 그랬으니까.’
어쨌든 해인의 몸은 이미 시간이 고정된 채다. 매일 세안하고 종종 물에 적신 천으로 몸을 닦아 내기도 했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굳이 지금 억지로 냇가에 입수할 필요는 없었다. 해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냐, 나는 괜찮을 것 같아.”
“……네? 그러면.”
해인은 잠깐 눈을 굴렸다. 본인에게는 심리적인 거부감, 그리고 그 거부감을 굳이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합리적인 이유가 모두 존재했지만 칼리에에게는 애초에 거부감부터가 없으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매번 가져다주는 물로 씻기도 했지만, 진영 내에서 포로 신분으로 있는 칼리에는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이어서 떠올랐다.
“그보다는 너도 제대로 씻고 싶었을 것 같은데, 가져온 걸로 네가 씻어도 돼. 그럼 망은 내가 봐줄 테니까.”
“네?!”
당황하는 칼리에를 보며 해인이 바구니를 살짝 밀어 건넸다. 칼리에가 당황한 눈으로 해인을 보며 물었다.
“장소가 마음에 안 드세요? 그렇지만 여기 물도 깨끗한걸요.”
“아, 꼭 싫은 건 아닌…….”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해인은 잠시 말끝을 흐리며 망설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입을 다문 해인을 의아함과 걱정스러움이 섞인 얼굴로 올려다보던 칼리에는, 그러나 다음 순간 문득 멈칫하더니 막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아가씨께서는 전혀 더러워지거나 하지 않으시네요. 매일 씻으시긴 하지만, 그래도…….”
그 중얼거림에 해인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먼저 몸의 시간이 고정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곤란했는데, 마침 그런 사실을 먼저 알아차렸다면 굳이 주어를 말하지 않아도 설명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대꾸했다.
“사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는 뭔가를 받았거든.”
“어어. 정말요?”
칼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사람은 포세이돈의 딸이었다. 물론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되새기자 해인이 무언가 특별한 물건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상대가 설득되려는 것을 알아챈 해인이 덧붙였다.
“응, 그래서 굳이 필요가 없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젖는 것도 싫어서.”
“어, 음.”
“말리는 데 오래 걸리잖아. 번거롭고.”
결국 칼리에는 납득했다. 사실 청결을 유지할 수 있다 해도 물에 몸을 담그는 건 별개라고 내심 생각하기는 했지만, 해인이 싫다면 싫은 것이다. 어쩌면 말 못 할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더 캐묻지 않기로 한 칼리에가 그쯤에서 물러나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해인은 그제야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씻을래? 망 봐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 싫은 거면 안 해도 되지만, 그게 아니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데.”
“……그, 그래도 망은 안 봐주셔도 돼요. 아가씨가 일을 하실 필요가 없는걸요.”
결국 둘은 칼리에가 적당히 씻는 동안 해인은 편하게 앉아 쉬고 있는 것으로 합의했다.
서로 합의한 대로 칼리에가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냇가 중간까지 걸어 들어가 얼굴에 물을 끼얹을 때, 해인은 냇가 끝에 앉아 발만 물에 담그고 숲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텐데,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평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런 생각 하면 꼭 무슨 일이 벌어지던데.’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헛웃음으로 흘려보내며, 해인은 고개를 돌리고 냇가의 상류 방향을 응시했다. 별 의미 없이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렇게 돌린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정체 모를 물건이 멀리서부터 조금씩 떠내려오고 있었다. 부러진 나뭇가지 같은 것이라기에는 너무 컸지만, 그렇다고 사람이라기에는 상당히 가볍게 떠 있는 데다 크기도 작았다. 칼리에도 그것을 발견한 듯 해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저기 뭔가 떠내려오고 있어요.”
“응, 보고 있었어.”
“제가 주워 올까요?”
“아냐. 내가 갈 테니 너는 거기 있어.”
칼리에의 말에 대답하며 해인은 치맛자락을 잡고 본인이 냇가로 들어갔다. 미끄러질지도 모르는 물속에서 어린아이가 움직이는 것보다는, 어른인 자신이 가는 게 빠르다는 판단이었다. 등 뒤에서 칼리에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해인은 못 들은 척하며 천천히 상류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물건도 여전히 떠내려오고 있었기에 금방 거리가 좁혀졌다.
바로 자신의 앞까지 온 물건에 손을 뻗어 건져 올린 해인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이 잡은 것을 살펴보았다. 그건 나무로 만들어진 원통이었다. 위아래의 양끝에 끈이 달려 있는 것을 빼면 아무런 무늬 없이 그저 나무로 형태만 만들어 놓은 탓에,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크기도 해인이 한 팔로 가볍게 감싸 들 만큼 크지 않았다.
그 안을 들여다보자, 화살이 몇 개 보였다.
“……화살 통인가?”
해인은 의아하게 중얼거리며 화살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처음에는 근처 진영의 병사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살펴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바로 전날 포이닉스와 화살 개수를 확인하고, 심지어 그 화살을 써서 활 쏘는 법도 배웠던 탓에 알 수 있었다.
화살 깃을 묶은 매듭의 모양과 깃 자체의 형태, 그리고 색깔마저 전날 여러 번 보고 만졌던 화살과는 달랐다.
“음…….”
포이닉스에게 들은 바, 연합군 측은 연합이라는 이름처럼 대량으로 물자를 받아 각자의 몫을 나누기 때문에 화살의 모양은 같은 진영 소속이 아니더라도 모든 병사들이 똑같았다. 지휘관을 비롯해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이들은 따로 주인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시가 된 화살을 쓰지만, 지금 해인이 들고 있는 화살에는 그런 표시도 없었다.
그저 연합군의 것과 모양만 다를 뿐, 화살 통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화살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건, 이 물건의 주인이 연합군 소속은 아니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