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7 마음
다음 날 해가 떴을 때, 해인은 언제나처럼 고요한 진영에서 막사 앞에 앉아 전날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으며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앉아서 사색하는 것처럼 조용해 보였지만 내면은 외면과 조금도 같지 않았다.
‘분명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한번 벽을 무너트리면 다시 원상태로 쌓아 올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절실하게 실감하며 해인은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았다.
아킬레우스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자각했을 때부터 이미 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각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같은 막사를 쓰다 보니 점점 그에게 익숙해졌고, 품속의 안온함에 적응하기까지 했다.
‘그래, 그게 거리를 두겠다고 결심한 사람 같은 행동은 아니었지…….’
당연한 사실을 이제까지 몰랐던 것처럼 깨달으며 해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그녀는 전날 아킬레우스가 잠깐이나마 자신처럼 미래를 염려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듯, 자신은 언젠가부터 아킬레우스처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보다 순간의 현재에 더 집중해 사고하고 있었음을 지금 막 자각했다. 같은 공간을 공유한 지도 꽤 되었다 보니 깨닫지 못한 사이 서로에게 별수 없이 물들어 버린 것이다.
‘……입만 살았던 것 같다.’
자각 끝에 혹평을 내리며 해인은 씁쓸한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평화로웠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행동만 반복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감각은 그 풍경만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아가씨.”
그때 리노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해인은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네?”
“그,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신데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혼자 있는 것이 아닌데도 표정을 미처 관리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해인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그냥 잠시 뭘 좀 생각하느라 표정이 굳었나 봐요.”
“그러십니까?”
캐물을 위치는 아닌 만큼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하면서도 리노스는 텔라몬과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어제 아킬레우스가 보였던 이상한 태도에 이어, 오늘 아침에는 어째서인지 막사에서 기이하게 형태가 구겨진 은잔이 나왔다. 대체 뭘 하다 저 꼴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전날 아킬레우스의 이상을 직접 목격했던 부관 두 명과 병사 두 명 모두 말은 안 했지만 각각 아킬레우스와 해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그래도 싸운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출전하기 전까지 아킬레우스는 무언가 묘하게 고양되어 있던 탓에 파트로클로스가 영문도 모르고 조금 질린다는 얼굴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 비해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일어난 해인은 오늘따라 유난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데다,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표정도 눈에 띄게 어두웠다. 어딜 어떻게 봐도 아킬레우스와는 정반대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탓에 해인과 보내는 시간이 더 긴 리노스와 텔라몬은 아킬레우스와 함께 있을 부관들과 달리 아침부터 줄곧 가시방석이었다. 둘은 다시금 시선을 교환했다. 이번에 입을 연 것은 텔라몬이었다.
“아가씨, 그러면 오늘은 주변도 조용할 테니, 조금 먼 곳까지 산책이라도 나가 보시면 어떻습니까?”
단순히 즉석에서 생각해 낸 권유는 아니었다.
텔라몬이 말한 ‘조금 먼 곳’은 아킬레우스의 진영이 세워진 곳 바로 뒤에 위치한 숲이다. 이 숲은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금세 물이 흐르는 냇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나무가 그리 빽빽하게 자라 있지는 않아 이동이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테베에 도착한 직후 시종들이 일찍이 길을 냈고, 진영에서 쓰는 물은 전부 그 숲의 냇가에서 길어 오는 것들이었다.
그런 만큼 진영 뒤편으로 돌아 나가 조금만 말을 달리면 금세 닿을 수 있고, 심지어 숲과 인접해 있는 진영의 지휘관은 각각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였다.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사촌이자 신의를 지키는 우직한 성격이었으며,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겨도 빠른 해결이 가능했다.
그런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에, 파트로클로스도 해인이 무료해 한다면 저 숲까지는 나가 봐도 되지 않겠느냐며 이틀 전쯤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아킬레우스도 그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으니, 지금처럼 해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상황에서는 환기를 위해 충분히 꺼낼 볼 만한 이야기였다.
“멀리요?”
“예, 지금 고개를 돌리시면 보이는 저 숲까지 말입니다.”
“……음.”
“위험한 곳이 아니고, 왕자님이나 파트로클로스 님께서도 저기까지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주변 진영도 전부 왕자님과 깊이 친분을 나눈 분들이 지휘관으로 계십니다.”
“걸어갈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멀 테니 말을 타는 게 나을 텐데, 필리아라고 이름 붙이셨던 그 말을 꺼내 오면 어떻습니까?”
리노스와 텔라몬이 연달아 말했다. 두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레 이런 권유를 해 올 리는 없으니, 해인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표정이 정말 좋지 않기는 했던 모양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티가 났나.’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다른 때도 지금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던 적은 많았으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표정이 평소와 많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굳이 멀리까지 나설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이 든 어른들을 눈치 보게 만든 것 같아 죄책감이 느껴졌다. 결국 해인은 그 제안을 수락하려 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아 하는 감정이 어쩔 수 없이 표정으로 드러났던지, 곁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칼리에가 먼저 입을 열어 설득하듯 말을 얹었다. 칼리에도 오늘 아침부터 해인의 곁에 있었던 만큼, 그녀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아주 잘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아가씨. 그러고 보니 마시는 물이나 씻는 물도 전부 저 숲에서 길어 온다고 들었어요. 오늘은 마침 날씨도 따뜻하니까……. 가서 목욕이라도 하시면 어떨까요? 망을 봐 드릴게요!”
뜻밖의 도움에 텔라몬과 리노스가 칼리에에게 슬쩍 눈짓으로 인사했다. 칼리에가 말을 덧붙이기 전에도 수락할 생각이었던 해인은 이쯤 되자 결국 쓰게 웃고 말았다. 세 명씩이나 자신의 눈치를 보게 만든 이상, 내키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을 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그래, 그렇게 할까?”
“네! 그러면 목욕에 쓰실 물건들을 챙겨 올게요!”
물론 해인은 아무리 망을 보는 사람이 있다 한들 야외인 냇가에서 목욕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건 현대인의 감상일 뿐 이 시대에는 그 정도쯤이야 아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일이라는 걸 납득은 했다. 때문에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신난 칼리에를 굳이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사이 리노스는 마구간으로 향해 필리아를 꺼내 왔다. 일찍이 해인이 자신은 승마를 못 한다고 밝혀서인지 다소 작은 크기의 전차도 함께였고, 그 전차에 모두가 탈 수 없는 만큼 여분의 말도 한 마리 있었다. 순식간에 일이 커지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해인은 자신에게 다가와 친근감을 표하는 필리아의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외출 한 번에 준비할 게 많네요.”
“많긴요,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뿐이지요. 참고로 전차는 제가 몰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우토메돈만큼은 아니지만, 이래 봬도 제법 잘 모는 편입니다.”
텔라몬이 느긋한 어조로 답했다. 뒤이어 칼리에가 품에 바구니 하나를 끌어안고 뛰어왔다. 칼리에를 마지막으로는 더 이상 기다릴 사람이 없었으니 리노스는 곧장 말에 올랐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차에 올라탔다. 그대로 그들은 고요한 진영을 떠나 숲으로 이동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변함없이 큰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
오래 달리지 않아 도착한 숲은 평화로웠다.
새소리, 혹은 작은 풀벌레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가운데 내리쬐는 햇빛은 나뭇잎에 닿아 산산이 부서졌다.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숲 안으로도 시종들이 물을 길으러 가기 위해 만든 길이 이미 있었기에, 일행은 숲 외곽에 전차와 말을 묶어 놓고 텔라몬을 남겨 놓은 뒤 숲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앞에 서서 바닥에 있는 돌이나 머리 위로 내려오는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치워 가며 걷던 리노스가 멀찍이 보이는 냇가의 위치를 확실히 파악한 뒤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해인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해인의 표정이 아까 전보다는 나아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안도했다. 그는 그쯤에서 멈춰 선 뒤 옆으로 비켜서서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기 냇가가 보이십니까?”
“……아, 네. 보여요.”
“이대로 쭉 길을 따라 가시면 됩니다. 저는 이쯤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테니 편히 시간을 보내십시오.”
해인은 리노스를 마주 보며 가볍게 웃었다. 나오기 직전까지는 내키지 않았다 해도, 막상 나오자 기분만큼은 확실히 환기되는 효과가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제가 할 일입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해인은 마지막까지 곁에 남은 칼리에를 데리고 조금 더 걸어갔다. 냇가 앞에 도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가를 앞에 두고 해인은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