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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63)화 (63/149)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미 포세이돈을 통해 이 시대의 결혼 적령기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는 만큼, 어쩌다 저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이없는 기분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이어 이제는 아마도 엇비슷한 나이대의 사람과의 사이에서 느끼게 된 세대 차이였다…….

‘심지어 약혼자도 아니고 정혼자.’

현대에서도 약혼은 종종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결혼 상대를 집안끼리 내정해 놓는 경우는, 적어도 해인이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있었으면 진작 말해서 마음 접게 만드는 데 썼겠지.’

사회에서 살아갈 때는 구성원끼리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정말로 정혼자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최소한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던 그날 밤에는 곧바로 그를 붙잡아 말했을 일이었다.

‘일부러 숨길 일도 못 되는데 왜 저런 생각을…….’

그러나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해인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몹시 치졸하게 느껴지는 생각이기는 했으나, 어쩌면 이 오해 비슷한 것을 달리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킬레우스의 마음은 모른 척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고, 거기에 더해 해인 본인마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의 거리감은 해인이 최선을 다해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만약 해인이 딱 한 걸음만 다가간다면, 언제 거리가 있었냐는 듯 좁혀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해인은 여전히 이 마음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끝이 정해진 관계가 언제까지 건강할지 장담하기 어려워서였다. 아킬레우스도, 그리고 자신도 이 이상 더 깊어지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처신이다. 말로만 쉽고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렵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은 늘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이대로 오해하게 둘까?’

그렇다면 그 어려운 일의 난이도가 조금쯤 낮춰질지도 모른다.

해인에게는 아킬레우스를 거절할, 제대로 된 명분이 생기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이제까지 해인을 최대한 존중해 주고 있던 아킬레우스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는 가정이 선행되지만, 어쨌든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의 사이에는 하나의 벽이 더 생겨나는 것이다.

거기까지 고민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아주 짧았다. 찰나의 치열함 끝에,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니야.’

도저히 스스로 용납이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편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해인은 그런 식으로 타인의 진심을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이전 그의 마음을 억지로 모른 척하며 단념시키려 했던 것도 못 할 일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잠깐이더라도 방금까지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속으로 나무라며, 해인은 답을 돌려주었다.

“그런 건 없어요. 있었으면 진작 말했을 거예요.”

생각이 이어지는 게 아무리 잠깐이었다지만 평범하게 답이 돌아오는 경우에 비해서는 조금 느렸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늘 그랬듯 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그 시간 속에서 해인의 망설임을 읽어 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답이 온전한 진실이라는 것도 들은 순간 확신했다. 해인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믿는 건 쉬웠다. 해인처럼 옳은 방향으로 사고하고자 애쓰고, 그 노력이 지나쳐 간혹 생각이 과하게 많아지는 사람들은, 대개는 거짓말을 할 때 티가 나기 때문이다.

해인에게 정해진 사람이 없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진실을 말하기까지 걸렸던 시간 속 망설임을 떠올려 보면, 그저 안도나 하고 있기는 애매했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자신을 단념시키고 싶어 하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해인이 망설인 이유도 금세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오해를 정정하지 않고 나를 잘라 내는 건 어떨까 생각했겠지.’

결국 끝에는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지만, 그 잠깐의 망설임 속 고민조차 아킬레우스에게는 쓰게 느껴졌다.

“하긴, 그랬겠군.”

나직이 답하는 아킬레우스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해인은 그 표정이 어쩔 수 없는 괴로움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챘다. 애초에 자신의 감정이나 표정, 의사를 감출 일이 드물다 못해 거의 없는 삶을 살았던 아킬레우스는 평온을 가장하는 것에 서투른 탓이었다.

비록 거짓말은 제대로 못한다 해도, 일단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해인이 더 잘하는 일이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자신이 방금까지 떠올렸던 치졸한 생각을 알아차린 것은 아닌가 싶어 조금 불안해졌다. 답을 돌려주긴 했지만, 그 직전까지 망설였던 것이 티가 났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 말을 안 믿는 것일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아킬레우스가 상처받기에는 충분한 이유들이었다. 입술을 깨문 해인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크지는 않았지만 주변 공기 중으로 또렷하게 내려앉는 목소리의 사과였다. 잠깐 술잔으로 시선을 내렸던 아킬레우스가 멈칫하며 다시 눈을 들고 해인을 마주 보았다.

“뭐가?”

모르는 척 되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엇에 대해 사과하느냐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해인은 맞닿아 있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내리뜨며 쥐고 있던 잔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가책 느껴져.’

그러잖아도 아킬레우스는 오늘 기분이 안 좋다던 사람이었고,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그런데 그 위로 이런 감정적 문제까지 얹어 놓고 말았다. 심지어 그는 내일도 전장에 나서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오르자, 해인은 거듭해서 미안해지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해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실은 아까 당신의 질문을 들었을 때, 거짓말을 할까 하고 잠시 고민했어요.”

남에게 자신이 옳지 않은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는 건 쉽지 않지만 이것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정혼자가 있다고 하면……. 마음을 접는 게 더 쉬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생각지 못한 솔직한 토로에 아킬레우스는 약간 놀란 눈으로 해인을 응시했다. 눈을 맞출 수는 없었지만,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잖아요. 심지어 이미 이전에도 한번 비슷한 일을 하려 했었으면서…….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또 했다는 사실을 사과하고 싶었어요.”

해인이 말을 맺고 그제야 눈을 들었다. 다시 시선이 마주치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뒤이어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아킬레우스가 침묵을 깨며 한숨처럼 웃었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말하는 사람의 곧은 성격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마주한 눈동자에서조차 그 올곧음이 선명하게 비쳤다.

길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있어도 그건 해인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 지금처럼 상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듣게 된 건 처음이다. 아킬레우스는 손끝에 닿아 있던 잔을 무의식적으로 가볍게 두드렸다가, 아주 희미하게 웃음기가 남은 낯으로 해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둘 모두 입을 열지 않아 다시금 막사 안은 조용해졌다.

화로의 불꽃이 타오르는 작은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침묵이 길어질수록 알 수 없이 커지는 긴장감에 해인은 무심코 잔을 꽉 쥐었다. 의식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공기가 조금씩 경직되고 있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거의 소름이 돋기 직전에야 아킬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소마저 흩어진 채, 그가 약간 가라앉은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러면 나는 그대를 더 놓치기 싫어지는데.”

똑바로 마주 보는 엷은 색 눈이 그 순간 유독 빛났다. 해인은 눈동자 속의 선명한 동공에서 아주 뚜렷한 무언의 감정을 읽었다. 시선을 마주한 순간 눈을 뗄 수 없도록, 상대를 옭아매는 것 같은 깊이를 가진 그것의 이름은 다름 아닌 열망이었다.

직전까지 주변을 감싸던 긴장감이 잊힐 정도로 선명하고, 형태가 없음에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다.

‘어쩌면…….’

다른 복잡한 생각들을 전부 뒤로한 채, 해인은 저 열망에 한번 넘어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다.

‘……아니, 아니지.’

다음 순간 곧바로 다잡긴 했으나 본래 한번 흔들린 것은 그다음부터 더 쉽게 흔들리는 법이었다.

해인은 불현듯 혼자 잠에서 깼던 지난 새벽을 떠올랐다. 푸르고 얇은 천에 덮인 것 같던 주변 풍경, 닿아 오던 온기, 평안한 분위기까지 모두 지금의 이 순간과는 극과 극으로 달랐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 사실을 외면하며 해인은 그때까지 계속 만지작거리고만 있던 잔을 들었다. 정신을 차리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잔이 기울고 입 안으로 액체가 스며들자 해인은 그제야 입 안이 말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아킬레우스는 맞은편에 앉은 이후 계속 그랬듯 해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해인은 눈을 내리뜬 채 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잔을 기울이자 붉은 액체의 표면으로 희미하게 불빛이 얹혀 흔들렸다.

돌아오는 답도, 마주치는 눈길도 없었지만 아킬레우스도 굳이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별말 덧붙이지 않고 자신도 잔에 남은 술을 마저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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