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상당히 뜬금없는 권유였다.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단어에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제대로 듣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술이요?”
아킬레우스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다소 갑작스러운 제안임은 인정하는 바였고, 무엇보다 이성과 단둘만 남았을 때 술을 권하는 것은 특정한 함의를 담은 제안으로 비쳐질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냥……. 방금 문득 생각이 났는데, 그대도 있는 곳에서 나 혼자 잔을 기울이는 건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닌 듯해서. 물론 그 외의 다른 뜻은 없어.”
해인이 지내던 곳에서도 이런 제안이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으로 통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아킬레우스는 지금 그와 해인의 관계에서 이런 문제에 관련된 것은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말해 두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으니 굳이 말을 아껴서 상대를 긴장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도 이지를 잃은 상태의 사람을 원하는 대로 휘두르는 취향 같은 건 전혀 없었으므로, 다른 뜻이 없다는 건 진심이었다.
“아.”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해인은 이해했다는 듯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동시에 단순한 제안 외의 다른 뜻은 없다고 말미에 덧붙여진 해명 덕분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 없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일단 아킬레우스가 말로써 내뱉은 이상 그에 대해서는 진심일 것이라는 신뢰가 존재하는 것이다.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분 안 좋을 때 술 생각이 나는 건 시대를 불문하고 비슷한가.’
별일은 없었다고 말했으면서 정작 하는 행동은 그 주장을 조금도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별일 없었다며 똑같은 이야기를 한 데다, 해인도 그에 대해서 더 캐묻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그 부분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킬레우스를 보던 시선을 살짝 내리며 해인은 잠시 갈등했다.
‘저 사람이 마주 보고 술 마실 만큼 편한 사람은 아닌데…….’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게 거절하기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어느 쪽으로든 아킬레우스는 해인에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다만 늘 그래 왔듯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밤 동안 그들은 같은 공간 안에 있어야 했으므로, 해인의 생각은 점점 긍정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어차피 거절해 봤자 남는 건 어색함뿐이다. 게다가 해인은 자신이 반신인 덕분에 남들에 비해 쉽게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본인부터가 취할 만큼 많이 마실 생각도 없었으며, 만약 도수가 생각보다 강해서 정신이 좀 흐려진다 해도 반나절이면 편리하게 원래대로 돌아오리라는 사실 역시 알았다.
‘……그리고 나도 좀 복잡하던 차였으니까.’
그쯤 생각했을 때 해인은 침묵이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인이 고개를 들고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왕자님, 말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막사 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시종인 것 같았다. 해인이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답을 기다리던 아킬레우스는 시종을 들어오게 하는 대신 본인이 직접 바깥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는 테이블 위로 두 개의 병과 잔 여러 개, 그리고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 같은 것들이 담긴 그릇을 내려놓았다.
수락도 거절도 하기 전이었지만, 여러 개의 잔 중에서도 술잔으로 보이는 건 두 개였다. 은으로 만들어진 잔의 표면에 비친 등잔불의 불꽃이 주홍색으로 가볍게 일렁였다.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뺏겼을 때, 아킬레우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때?”
그 순간 조금 남아 있던 망설임이 어째서인지 흩어졌다. 해인은 한숨처럼 웃으며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좋아요. 잔 주세요.”
아킬레우스는 그 웃는 얼굴을 잠깐 동안 가만히 응시했다가, 이내 맞은편 자리에 다시 앉았다. 한참 침묵하기에 역시 거절하려나 싶었는데 예상외였다.
해인의 예상대로 술잔이었던 은으로 만든 잔을 골라내고, 술을 약간 따라 낸 아킬레우스는 잔의 색이 변하지 않음을 확인한 뒤 그것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같은 은잔을 꺼내 이어 술을 따른 뒤 또다시 변색 여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해인에게 건넸다.
“보다시피 독은 없어.”
“……감사합니다.”
잔이 은인 것을 봤을 때부터 독을 피하기 위함임은 짐작했으나, 정말로 확인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되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중얼거리듯 인사한 해인은 받아 든 잔을 살짝 기울여 색을 살폈다. 첫 잔을 따라 낼 때부터 얼핏 색을 본 만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포도로 만든 와인이었다.
짙은 붉은색 액체가 기울이는 대로 잔 안에서 찰랑였다. 와인이 오래된 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지금처럼 실물로 보자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며 자신의 잔을 기울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워진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괜한 권유를 한 건 아니겠지?”
“네?”
“신기해하는 것 같은데. 설마 마셔 본 적이 없다면…….”
아킬레우스가 말끝을 흐리며 해인의 얼굴을 살피듯이 가만히 들여다봤다. 자신이 잔에 담긴 와인을 신기해했던 것은 맞지만, 설마 그것 때문에 이런 오해를 받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해인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아킬레우스가 멈칫한 사이, 해인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부정했다.
“아니……. 그럴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에요.”
이 시대에도 특정 나이 이하의 사람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문화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처음이지 않고 낯설지도 않을 만큼은 접해 봤다는 뜻이었다. 숨을 내뱉어 웃음기를 진정시키며 해인은 자신을 열여덟 정도라고 생각했던 포세이돈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를 제외하고 이곳에서 만난 이들에게는 나이를 말한 적이 없으니, 포세이돈과 비슷한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마침 해인이 웃은 순간부터 그녀를 못 박힌 듯 바라보던 아킬레우스가 상대에게 나이를 밝힐 만한 기회를 주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물었다.
“……몇 살이기에?”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의 대화나 분위기를 조금 더 이어 가고 싶어 꺼낸 질문인 게 뻔했다. 그런 탓에 원래의 목적이었던 술은 어느새 반쯤 뒷전이 되어 있었다. 해인은 잠깐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스물하나요.”
“아.”
해인이 앞서 생각했던 것처럼, 아킬레우스 역시 포세이돈과 비슷하게 상대를 많아야 열여덟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는 했었다. 그럼에도 나이를 듣고 나서 그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물론 생긴 것만 보면 잘 믿어지지 않는 숫자이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해인이 보이던 침착한 태도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납득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괜한 권유가 아니었다니 다행이군.”
가볍게 웃고는 중얼거린 아킬레우스는 그제야 뒷전이 되었던 잔을 다시 발견했다. 그는 느리게 손을 뻗어 잔을 들었다. 가라앉았던 기분 탓에 술 생각이 났었는데, 정작 술은 얼마 마시지도 않았건만 기분은 어느 사이 괜찮아져 있었다.
짧은 대화, 그 속의 작은 정보, 그리고 상대의 웃는 얼굴…….
고작 그 정도만으로.
그는 비어 있는 잔을 다시 채웠다. 난데없는 의문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두 번째로 채운 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그런데…….’
의문의 내용은 포세이돈이 해인의 나이를 듣고 떠올렸던 생각과 비슷한 결에 위치했다. 처음 포세이돈이 해인을 몹시 감싸고도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결혼조차 하지 않아 아직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아끼는 자식’이기에 저렇듯 행동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물론 속으로 혀는 좀 찼지만 특별히 걸리는 것 없이 납득하고 넘어갔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대수롭지 않았던 생각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스물하나면 결혼이 아니더라도 정혼 정도는.’
물론 해인이나 포세이돈이 직접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귀환에 있어 정혼자의 여부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말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귀환을 위해서는 아킬레우스와 함께 있어야 하는 만큼, 그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그런 유의 정보를 감출 수도 있는 것이다.
해인이 지금처럼 어떻게든 자신으로부터 물러나려 하는 것은, 단순히 떠나야 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돌아가야 할 곳에 정해진 사람마저 존재하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말할 틈이 없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말을 안 한 것일 수도 있었다. 포세이돈의 유난도 이미 상대가 정해져 있는 딸과 사위 될 이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면…….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큰 가능성 없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된 비약이었다. 말할 틈이 없었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잘못된 가정이라고 봐야 되는 일이었다. 해야만 하는 말이 있는데 말할 틈이 없을 경우, 해인은 틈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낼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생각의 오류에 빠져 있지만 아킬레우스는 머리 좋은 사람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 생각의 흐름이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은 못 된다는 게 문제였다. 원래 본인의 감정은 한 걸음 떨어져 보기 어려운 법이고, 거기에 더해 술은 이성과 거리가 먼 물건이었다. 두 번째 잔이 다 빌 때까지 침묵하던 아킬레우스는 결국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해인.”
“네.”
해인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아킬레우스를 마주 보았다. 그는 어딘가 복잡한 눈을 하더니, 잠깐 말을 고르다가 질문했다.
“……스물하나라고 했지. 그렇다면 혹시 정혼자가 있나?”
“……네?”
포세이돈과는 다르게 그다지 놀라지 않고 여상하게 넘어가는 모습에, 나이와 관련된 주제가 생각 외로 간단히 끝났다고 생각하던 해인은 그만 진심으로 어이없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직전까지 하던 생각이 유감스럽게도, 끝났던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