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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는 막사 앞에 도착해 잠시 멈춰 섰다. 천천히 손을 뻗어 천을 걷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과는 다른 온도의 공기가 훅 끼쳐 왔다. 인기척을 느낀 해인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짧게 얽혔다.
‘빨리 돌아왔네.’
막사 안이라고 해도 바깥의 소리는 어렴풋이나마 들려온다. 물론 벽에 붙어 서지 않는 이상 정확한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도는 대강이나마 파악이 가능한 편이었다.
덕분에 포이닉스가 막사 앞을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고,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와 함께 돌아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포이닉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만큼 그로부터 이런저런 보고를 받느라 바깥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내다 올 줄 알았는데, 아킬레우스의 등장은 해인의 짐작보다 일렀다.
‘뭐, 언제 오든 본인 막사니까…….’
어차피 씻고 옷까지 다 갈아입은 후였다. 만약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들어오기라도 했으면 어제에 이어 또 어색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놀랐던 마음도 아까에 비해서는 그럭저럭 진정되어 있었다.
여전히 충격이 남아 있기는 해도, 일단 겉보기에 평소처럼 굴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막연하던 시기가 조금 명확해지긴 했지만, 언젠가 올 일이라는 것은 이전부터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체념과 같은,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마주하는 감정이었다.
살짝 눈을 굴린 해인은 먼저 인사했다.
“오셨네요.”
목소리를 내면서, 해인은 그가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물론 보통 때도 대단히 활기차고 밝은 사람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조금 더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해인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를 살피듯 응시하자 아킬레우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뒤늦게 입을 열어 답했다.
“……그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답을 돌려줄 때는 직전에 비해 표정이 다소 풀어져 있었다. 해인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 사이 칼리에는 잔뜩 긴장한 채 해인의 뒤에 숨듯이 선 채였다. 직전 둘만 있을 때까지만 해도 잘 웃고 말하던 아이가 조용한 것을 깨달은 해인이 뒤를 돌아보자, 칼리에가 꼭 도움이라도 요청하듯 해인을 마주 올려다보았다.
칼리에가 아킬레우스를 무서워한다는 걸 눈치챈 해인은 잠시 당황했다.
어떠한 말도 없었으나, 눈빛이나 표정만으로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멈칫한 해인은 이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챘다. 애초에 칼리에는 이 군에 포로로 잡혀 온 것이었으니, 자신의 도시를 정복한 군대의 지휘관을 두려워하는 게 당연한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무신경했네.’
앞서 마음이 복잡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조금 더 빨리 챙겨 주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불현듯 죄책감이 느껴졌다. 해인은 손을 들어 칼리에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 작게 속삭였다.
“가도 돼. 내일 보자.”
“네, 네. 가 보겠습니다.”
칼리에는 얼른 대답하며 허둥지둥 짐을 챙겼다. 그러고는 아킬레우스에게 깊이 허리를 숙인 뒤, 막사 바깥으로 뛰듯이 걸어 나갔다. 해인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아킬레우스는 칼리에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 없는 얼굴을 한 채 해인이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로 향했다.
칼리에가 나가고 천이 크게 펄럭인 뒤 가라앉았다. 그제야 다시 아킬레우스에게 눈을 돌린 해인은 그가 테이블 위의 상자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불과 몇 십분 전까지 잡고 있던 활이었다. 해인의 관심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눈치챈 아킬레우스가 해인을 돌아보았다. 뒤이어 얼굴 위로 엷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활 쏘는 것을 배웠다며.”
귓가로 내려앉는 목소리를 들으며 해인은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자신에게는 조금도 그렇게 될 만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것은 미묘한 기분을 들게끔 만든다. 결코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고 결론지을 수 없는 기분이다. 기쁜 것인지, 혹은 부담스러워 싫은 것인지의 경계조차 모호했다. 상대가 가족도 아닌 그저 타인이라면 더욱 그랬다. 누군가에게 있어 눈에 띄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해인은 옷자락에 감춰진 손을 꽉 말아 쥐고 천천히 답했다.
“……네, 호의 덕분에요.”
문장을 맺고도 해인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 보니 느껴지는 것이 있던 탓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듯 아킬레우스는 평소에 비해 명백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해인을 대하는 태도는 평상시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어딘가 그늘이 져 있는 느낌은 지우지 못했다. 해인은 머뭇거리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드물게도 자신에게서 금세 시선을 떼지 않는 해인을 보며 의아한 낯을 하던 아킬레우스는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당신은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잠깐의 침묵 끝에 나온 물음이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명백히 염려가 섞인 목소리에 아킬레우스가 멈칫했다. 마주 보고 있는 물빛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이는 것을 본 해인은 조금 더 덧붙였다.
“그, 물론 전장에서는 늘 부상자나 사망자가 생길 테니 안 좋은 일이 일상이기는 하겠지만……. 그냥 오늘따라 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어색함에 말이 길어지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며 해인은 겨우 말을 맺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아킬레우스는 무언가 놀란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침묵하다가, 다음 순간 한숨처럼 웃었다.
들어오면서부터 티 내지 않으려 했던 것을 간파당했지만, 그 사실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인이 그만큼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증거나 다름없다고 여겨 달가운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말을 골라내어 답했다.
“아니, 별일은 없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해인의 말대로 전장에서는 늘 부상자나 사망자가 생기는 법이라지만, 그 수가 많지 않으니 충분히 성공적인 전투였다. 지휘관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안 좋은 일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웠다. 포이닉스가 해인에게 확고한 호의를 가지게 됐고, 그로 인해 아킬레우스에게 해인의 칭찬을 몇 마디 꺼낸 것을 나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있을 법한 일로 인해 기분이 가라앉은 것은 맞지만……. 그건 해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상대에게 부담을 줄 가능성도 있는 탓이다.
“그런가요.”
그리고 해인은 별로 믿지 않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아킬레우스가 해인의 물음에 반드시 제대로 대답해야만 하는 규칙 같은 건 없었으니 꼭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답을 들으면, 상대에게 어떤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어른스럽게 넘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뜻밖에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질문을 꺼낼 때까지는 단순히 상대에 대한 염려뿐이었으나,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는 기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물어보면 바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불현듯 열없어졌다.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본인마저 그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순간마다 자각하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아킬레우스와 지금보다 더 나아간 관계를 정립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되묻지도 않을 거고. 이런 주제에 서운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과한 거지.’
해인이 자책과 자아성찰의 중간쯤에 위치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아킬레우스는 줄곧 해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으나, 그새 다른 생각을 하는 듯 짙은 푸른색 눈동자는 어느 사이엔가 초점이 빗나가 있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기에 말이 없어진 것인지, 그 속을 어떻게든 읽어 내고 싶다는 바람이 불쑥 머릿속을 채웠다.
“해인.”
그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느린 속도로 손을 뻗었다. 어긋나 있던 시선이 다시 맞춰졌다가, 이내 뻗어진 손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피하려고 할까.’
찰나의 순간 아킬레우스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손끝이 뺨 근처에 닿을 때까지 해인은 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손으로 움직였던 시선을 다시 아킬레우스에게 돌린 채 의아한 얼굴을 했을 뿐이다.
상대의 손이 자신에게 닿는 게 이제는 전만큼 낯설지 않고, 위해를 끼치지도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태도였다. 아킬레우스의 손끝은 뺨 위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 얼굴 옆으로 약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서야 떨어졌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별일은 없었지만.”
비록 믿지 않는 기색이기는 했어도, 해인이 꺼낸 말은 납득의 어조였다. 더 물어보지 않고 답을 들은 그대로 넘어가려 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도 해인에게 정확한 이유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으니 그렇게 끝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까 전 했던 말을 또 하는 것은 괜한 아쉬움이 남아서다. 언제든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주지시키듯 적당히 넘어가지 말고, 조금 더 깊이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아쉬움이었다.
“……그래, 기분이 안 좋았던 건 맞아. 가끔 그런 날도 있는 법이지.”
갑작스러운 토로에 해인이 당황했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말은 그보다 더했다. 반걸음 정도 더 가까워진 아킬레우스가 조용히 속삭이듯 물었다.
“하지만 그대가 그걸 알아본다는 건 내게 그만큼의 관심이 있다는 뜻 같은데, 최소한 평소와 다른 걸 알아볼 정도로는.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듣는 것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게다가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이런 질문에는 솔직하게 수긍할 수 없었다.
“그건…….”
결국 대답할 시간을 놓친 해인은 졸지에 진심을 간파당해 황망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 표정을 본 아킬레우스가 웃으며 가까워졌던 만큼 다시 물러났다. 한번쯤 더 물어봤으면 아마 진실을 답했을 것이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그는 작게 숨을 내뱉고 다른 말을 꺼냈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피곤하면 먼저 자.”
“……네.”
해인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아킬레우스는 답을 듣고 곧장 뒤돌아 막사를 나갔고, 먼저 자라고는 했지만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은 없던 해인은 의자에 털썩 앉아 이마를 짚었다. 솔직한 사람과 결코 솔직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불리한 건 후자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아서였다. 해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먼저 자 버릴까.”
그렇게 하면 아킬레우스가 돌아오더라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만 뻔뻔해지면 되는 일이었다. 해인은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 고민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킬레우스가 돌아왔으므로 결국 의미 없는 행동이 되어 버렸다.
“깨어 있었군.”
해인을 본 아킬레우스가 여상하게 말했다. 해인은 한숨을 삼켰다.
“아직 피곤하지는……. 않아서요.”
“그래?”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앉아 있는 의자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로 다가왔다. 해인은 무의식적으로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의자에 느슨히 앉은 아킬레우스가 눈을 들어 해인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면, 해인.”
이름을 불러 놓고서 그는 곧장 말을 잇는 대신 어딘가 망설이는 듯 침묵했다. 바로 나오지 않는 다음 말에 해인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아킬레우스는 드물게도 앞서 있던 망설이는 기색을 지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술이라도 한잔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