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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60)화 (60/149)

포이닉스는 그런 그녀를 마주 보며 같이 미소 짓는 얼굴로 이어 말했다.

“아가씨께서도 잘 아시는 것 같군요. 그러면 그 생각에 더 매여 있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런 전쟁터의 막사는 아가씨께 그리 편한 환경도 아닐 텐데, 잘 지내고 계시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덕분에 왕자님께서도 조금이나마 더 안심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아킬레우스와 해인의 관계를 거의 단정 짓고 있는 것 같은 포이닉스의 말에 해인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포이닉스는 말을 잇느라 그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오늘 제가 알려 드린 것이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지요.”

포이닉스가 농담처럼 말했다. 해인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에 맞춰 주었다.

“……제가 활을 쏠 일이 생긴다는 말씀이신가요?”

“아,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만 하지요. 하지만 전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리는 없고, 삶은 깁니다. 그러니 평화로울 때는 활쏘기가 취미가 될 수도 있겠죠. 곧 테베가 무너지면 트로이로 향할 테고, 그러면…….”

포이닉스는 문장을 끝맺지 않고 말을 흐렸다. 그러나 해인은 드물게도 이어질 만한 말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가 꺼낸 말의 내용에 충격을 받아, 순간적으로 여유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음 목적지가 바로 트로이였구나.’

해인은 속으로 그 사실을 깊이 새겼다. 어딘지 망연한 감각이었다.

‘그래, 올해로 십 년째라고 했었으니까…….’

언젠가는 끝이 있다 하더라도, 포이닉스의 말처럼 인간의 삶은 길다. 하지만 누구나 기나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트로이라는 지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해인은 그곳에서 결국에는 목숨을 잃게 될 누군가가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멀지 않았네.’

해인은 티 내지 않으며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네, 그렇겠죠.”

하지만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었다. 해인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가장 적절한 건 인사였다.

“그럼……. 다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해인이 자연스레 주제를 바꾸자 포이닉스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신세를 졌었지요.”

“활은 잘 보관할게요.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요.”

“그래 주시면 제게도 영광입니다.”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대화가 오간 뒤 해인의 바람대로 상황이 정리됐다. 눈치를 보던 칼리에가 다가오더니 미리 챙겨 온 상자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가씨, 활은 여기 넣으세요.”

“아, 고마워.”

“뭘요. 그럼 저는 먼저 가서 이걸 옮겨 놓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칼리에는 해인이 만류할 틈도 없이 쪼르르 막사로 달려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은 해인은 포이닉스와 리노스, 텔라몬에게 마지막으로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칼리에의 뒤를 따라 막사로 향했다. 멀어지는 해인을 보며 포이닉스가 중얼거렸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분이시군.”

“예?”

“흠? 아무것도 아니네.”

리노스의 물음에 웃으며 답한 포이닉스는 아까 전 그랬듯 또 한 번 해의 위치를 확인했다. 어느덧 조금씩 세상 위로 노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여기 머무른 김에, 왕자님께서 오실 때까지 조금 기다리다 인사나 하고 돌아가야겠군. 물자에 대해서 보고도 해야 할 테고.”

“그러시지요. 왕자님께서도 반기실 겁니다.”

“글쎄, 반기실지는 모르겠는데. 왕자님께서도 아가씨와 시간을 좀 더 보내고 싶으실 테니, 재빠르게 보고만 하고 도망가야 하지 않겠나?”

장난 섞인 어조에 리노스와 텔라몬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 셋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

방패를 들어 머리로 날아오는 창을 다시 줍지 못할 거리로 멀리 쳐내고, 동시에 아킬레우스는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직전의 공격으로 창을 완전히 잃어버린 탓에 더 이상의 원거리 공격은 불가능하게 된 테베의 장군도 어쩔 수 없이 전차에서 내려왔다.

땅을 딛고 서며 테베의 장군은 눈앞의 반신을 노려보았다.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내이자 무장으로서 지켜야 할 미덕이지만, 정작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어쩔 수 없이 비겁한 감상이 스며들었다.

‘어째서 저자를 상대하는 것이 나였어야만 하는가.’

그는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린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수치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엄습하는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며 검을 들었다. 하지만 감정을 외면한 대가였는지, 휘둘러지는 검의 궤적이 평소에 비해서 더 어설펐음을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그 검을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역으로 힘을 가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상대의 손에서부터 검이 날아갔다. 주울 틈을 주지 않은 채 재빨리 거리를 좁히고, 투구와 갑옷으로 가리지 못한 목을 깊게 찌른다. 이어서 박힌 검을 거칠게 빼내자 가슴팍으로 뜨거운 액체가 튀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초였다.

찰나라고 해도 좋을 짧은 순간 목숨 하나가 스러졌다. 전쟁터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감상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눈가에도 조금 튄 피를 훔쳐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이 죽어 버렸으니 그가 이끌던 부대의 병사들에게 남은 것은 후퇴뿐이다. 병사들은 그 사실에 충격 받거나 분해 하는 대신, 반쯤 예상했다는 낯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아무도 자신들의 지휘관이 저 반신을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파트로클로스가 병사 몇몇을 시켜 죽은 장군의 무장을 벗겨 오라 지시했다. 그동안 아킬레우스는 아우토메돈이 건넨 천으로 피를 닦아 냈다. 잠시 후 완전히 무장을 잃은 장군의 시체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테베의 병사들 앞에 서 있던 죽은 장군의 부관을 찾아내 눈짓으로 시체를 가져가라 일렀다. 오늘 전투의 암묵적인 종료 신호였다.

다른 곳에서도 저마다 상황을 정리한 듯, 연합군 장군들의 깃발들이 하나둘씩 올라와 높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파트로클로스가 천천히 아킬레우스에게 다가갔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피에 젖은 천은 금세 암적색으로 물들었다. 코끝으로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비린 혈향에 아킬레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터의 냄새는 언제나 비슷했다. 전차 바퀴 아래서 피어오르는 흙먼지, 청동이나 황금 같은 금속의 묵직함, 땀과 눈물의 소금기, 그리고 짙은 피……. 나열해 봐야 좋은 것들이라고는 하나 없이 전부 불쾌한 것들뿐이다.

아킬레우스가 연합군의 누구나 인정하는 그리스 제일의 무장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터에 나오기 전까지의 그는 풍요로운 나라에서 귀하게 나고 자란 왕자였던지라, 가진 취향만큼은 지극히 고상했다. 흙먼지 속에서 느껴지는 혈향을 좋게 느껴 본 적 없다는 뜻이었다.

“씻고 돌아가셔야지요.”

아킬레우스의 손에서 피로 물든 천을 가져가며 파트로클로스가 여상히 말했다. 아킬레우스 역시 당연하다는 듯 수긍했다.

“그래야지.”

이전이었다면 진영으로 돌아가 막사에서 씻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해인이 지금처럼 핏자국으로 얼룩진 자신을 마주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킬레우스는 굳이 나서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피에 젖은 손을, 그리고 검을 내려다보았다.

전쟁이 오래 이어지다 보니 간혹 착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아킬레우스는 피를 보는 게 좋아서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참전을 요청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열정을 다해 전쟁에 임했던 것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함이다. 운명을 피해 살아남고, 이어지는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피를 뒤집어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목적이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오직 한 가지만을 보며 달려온 십 년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거의 끝물에 다다랐다고 느껴지는 지금, 아킬레우스는 이제 와서 회의감을 느끼는 순간이 잦았다.

피에 젖은 무기 따위와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누군가를 마음에 둔 탓일 것이다.

“아킬레우스 님.”

누가 봐도 딴생각에 잠긴 아킬레우스를 본 파트로클로스가 그를 일깨웠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돌아가자.”

짧은 감상에서 깨어나며 아킬레우스는 한숨 섞인 어조로 답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다. 지휘관 된 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는 검을 집어넣고 다시 전차에 올라탔다. 아우토메돈이 묵묵히 크산토스와 발리오스의 고삐를 당겼다.

돌아가는 이들의 어깨 위로 서서히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

하늘이 점점 주홍색으로 짙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진영은 전날 그랬던 것처럼 멀리서부터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포이닉스는 앞서 돌아온 병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듯했다. 대부분이 그리 어둡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다행이군.’

피해가 크다면 그 사실 자체로도 대단히 문제고, 또한 아킬레우스의 기분도 그리 좋지는 않을 테니 오늘 있었던 일들을 태연하게 풀어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잘된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는 마침 저 멀리서부터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대동하고 막사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해 냈다. 상대 쪽에서도 포이닉스를 비롯해 리노스와 텔라몬이 나와 있는 것을 알아차린 듯, 파트로클로스가 나서서 크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포이닉스와 병사 둘을 마주했다. 아킬레우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포이닉스, 여기서 보는군.”

“예, 왕자님.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예의를 차려 답한 포이닉스는 다음으로 파트로클로스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사이 아킬레우스는 리노스와 텔라몬을 돌아보며 물었다.

“별일 없었나?”

아킬레우스의 시선이 짧게 막사로 향했다 돌아오는 것을 본 리노스는 알아서 길고 자세한 답을 꺼냈다.

“예, 다만 아가씨께서는 막사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이하러 나오기 애매하실 겁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방금 전까지 줄곧 포이닉스 님과 시간을 보내셨거든요. 물론 안전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오늘 내내?”

그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가 의아한 눈으로 포이닉스를 돌아보았다. 마침 파트로클로스와 인사를 다 나누고, 간략한 안부 확인도 끝낸 참이었던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아킬레우스를 마주했다.

“예.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제게 맡기신 일을 하기 위해 물자를 확인하러 가는 길에, 아가씨와 우연히 마주쳤지 뭡니까.”

그렇게 말문을 연 포이닉스는 오늘 있었던 일을 아킬레우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관심이 있을까 싶어 함께 물자를 보러 간 것부터, 수를 세는 것에 있어 도움을 받았던 것, 그 보답으로 활을 선물한 것, 마지막으로 방금 전까지 그 활을 이용해 활쏘기를 조금 가르쳐 주었던 것까지 전부 이야기했을 때는 노을도 좀 더 짙어져 있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말을 맺은 포이닉스는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며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확 낮춰 덧붙였다.

“아가씨께서는 수 계산도 빠르시고 영민하시니 안살림도 잘하실 겁니다. 아름다운 이가 생각도 깊기는 아주 어려운 일인데, 그 어려운 일을 해내신 데다 침착하기까지 하시니 정말 좋은 분입니다.”

조용히 포이닉스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그만 쓰게 웃었다. 포이닉스의 말은 물론 듣기에 나쁘지 않았지만, 동시에 별수 없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파트로클로스부터 시작해 아우토메돈, 그리고 이제는 포이닉스까지 해인을 사실상 그의 아내처럼 보는 것을 아킬레우스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관들, 하다못해 말단의 병사들도 하는 생각은 아마 엇비슷할 것이다.

아킬레우스도 진영 내에 어떤 소문이 돌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서서 부정하지 않았으니 이제는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으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때문에 진영 내의 사람들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더 이상 그리 흥미롭지 않게 여기고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지.’

해인은 언젠가 반드시 원래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사람이다. 그리고 그건 오직 그와 해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다른 이들이 거의 당연시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것도, 아는 이는 단 두 명뿐이었다.

그 사실이 기분을 가라앉게 만든다.

만약 오늘 전황이 좋지 않았다면 그쪽에 신경이 쏠려 지금과 같이 복잡한 심경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심각한 상황 중에 약간의 기분 전환을 돕는 가벼운 소식 정도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큰 부상을 입은 자, 혹은 사망한 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는 소식을 씻는 중 전해 들은 참이었다.

첫날과 같이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 경우를 또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니, 오늘처럼 그 수가 적은 것만으로도 전투는 성공적이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덕분에 전쟁에 쓰일 신경들이 온통 그 자신의 감정과 마음으로 쏠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기분마저 가라앉자 더 이상은 보고조차 듣기 싫었다.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증명하겠다며 꿋꿋이 지켜 왔던 지휘관으로서의 의무를 외면하고 싶어진 것이다.

‘어지간히 휘둘리는군.’

아킬레우스는 한숨처럼 생각했다.

전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감정에 솔직한 것은 인간의 미덕이지만, 지금처럼 감정에 파묻혀 시시때때로 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는 것은 그리 좋은 감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 와서 멈출 수 없다는 것 역시, 아킬레우스 본인이 새삼스러울 만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다른 무엇보다 그저 해인이 보고 싶었다.

떠날 사람이라는 사실에 우울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 동안 그 존재를 눈에 담아 두고 싶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곁에서 아킬레우스의 표정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파트로클로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고, 무엇보다 알고 싶지도 않지만, 지금의 상황을 대강이나마 수습할 만한 사람은 자신뿐인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전날의 그 얼어붙은 분위기가 아직까지 해인과 아킬레우스의 사이에 남아 있는 걸까 생각하며, 그는 슬쩍 눈치를 보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께서 아름답고 영특하신데 활도 잘 다루신다니, 아르테미스 님께서도 눈독 들이실 만한 분이 되셨군요. 눈에 띄지 않게 잘 감춰야겠습니다.”

몹시 어색한 농담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표정이 어두워진 아킬레우스를 보며 당황하던 포이닉스가 얼른 그 농담을 받아 주었다.

“말조심해야지, 파트로클로스. 여신님을 함부로 언급하면 쓰나.”

“참, 그렇군요. 제 실수입니다.”

신들이 잔혹해지는 것은 인간들의 교만이 선을 넘었을 때일 뿐, 지금처럼 어쩌다 언급하는 것 정도로는 그들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문제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포이닉스는 괜스레 타박하듯 말했고 파트로클로스가 얼른 수긍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어설프게 웃어도 분위기는 그리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노력을 지켜보던 아킬레우스는 짧은 숨결을 내뱉듯이 웃은 후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네. 다만 다른 보고 사항은 내일 아침 점토판으로 보내 줬으면 하는데.”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들 오늘은 이만 쉬도록.”

날카롭지 않은 어조였지만 엄연한 명령이었다. 부관 둘과 병사 둘은 서로 시선을 통해 의아함을 교환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몸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향하는 아킬레우스의 뒷모습을 의문과 걱정 섞인 눈으로 응시했다. 포이닉스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두 분께서 전날 싸우셨는데 내가 눈치 없었던 겐가? 아가씨께서는 그런 기색이 없으셨는데.”

파트로클로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싸우셨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괜찮을 겁니다. 실은 오늘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이전에도 무슨 일이 있었나?”

“예, 뭐.”

그는 언젠가의 한밤중, 난데없이 자신의 막사에 밀고 들어왔던 아킬레우스를 떠올렸다.

“싸운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고, 당사자인 두 분끼리 뭔가 복잡하더군요. 분위기가 좋다가 나쁘다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

“예.”

파트로클로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덧붙였다.

“뭐가 그리 어려운지는 모르겠지만, 끼어들 문제가 아닌 듯하니 저는 가급적 거리를 두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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