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59)화 (59/149)

그렇게 즉각적으로 시작된 활 교습은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근처에서 진행됐다. 활을 처음 잡아 보는 초보자 한 명을 가볍게 가르치기 위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과녁은 막사 근처에 위치한 나무의 가지에 두꺼운 천을 묶어 두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리노스가 과녁을 준비하는 동안, 포이닉스는 하인을 시켜 천을 더 많이 가져오게 했다. 천이 도착하자 포이닉스는 그것을 해인의 팔에 두껍게 둘러 감싸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해인이 떨떠름하게 묻자 포이닉스가 온화하게 웃으며 부정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혹시 아가씨께서 다치시기라도 하시면 어떻게 될지, 제가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 다소 과하게 둘렀지요. 과한 만큼 안전할 테니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군요.”

그런 거라면 해인으로서도 할 말은 없었다. 물론 다친다 하더라도 반나절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는 사라지겠지만, 그 반나절 동안 해인의 상처를 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타들어 가는 마음은 그녀로서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포이닉스는 해인의 팔에 천을 고정시키고, 손가락에도 천을 감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한 걸음 물러난 그는 해인을 보며 염려를 덧붙였다.

“팔과 손은 이렇게라도 보호할 수 있지만, 얼굴에는 천을 감을 수도 없으니 아가씨께서도 스스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활이 그리 강하지는 않다 해도, 원래 사고는 예기치 못하게 일어나는 법이지요. 아까 제가 점토판을 떨어트린 것처럼 말입니다.”

“네, 그럴게요.”

“좋습니다.”

절대 다쳐서는 안 되는 초보자와 실용적이지 않은 활의 상태를 고려해 과녁과의 위치는 가까이 잡았다. 사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준비된 후, 포이닉스는 자세를 잡는 법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발은 편한 만큼 벌려 서고, 고개를 돌려서 정면을 보시고…….”

해인은 별말 없이 지시를 따랐다. 자세를 확인한 포이닉스는 해인에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화살을 쥐여 주었다.

“빈 활을 당기는 건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활이 부러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활을 잡고 있는 당사자가 가장 크게 다치는 법이거든요. 여기, 화살촉 조심하시고……. 이렇게 끼우시면 됩니다. 손목에 너무 힘을 주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조심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가르친다고 나서 놓고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스스로를 자각한 포이닉스가 머쓱하게 웃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마주 빙그레 웃으며 해인은 활시위를 잡았다.

‘지금 배우는 것들과 현대의 양궁 규칙은 아무래도 한참 다르겠지.’

그렇더라도 가르치는 사람이 이 시대의 사람이니, 시대의 방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게 옳은 방향일 것이다. 어차피 해인은 현대의 양궁 규칙을 모르기도 했다. 시위가 걸린 손가락 끝이 미약하게 아려 오는 감각을 느끼며, 해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과녁을 응시했다.

“그렇죠, 그렇게 과녁을 똑바로 바라보고, 천천히 시위를 당겨 보십시오. 끝까지 당기면 좋지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할 수 있으신 곳까지만 당기시고…….”

포이닉스의 말에 따라 해인은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힘이 제법 필요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당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끝까지 시위가 당겨지자 포이닉스는 잠시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빠르게 덧붙였다.

“……이제 과녁의 중앙을 겨누시고, 숨을 잠시 참으셨다가, 확실해졌을 때 놓으십시오.”

말을 맺으며 그는 새삼스럽게 해인을 다시 보았다.

해인은 힘쓰는 일과는 조금의 연관도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데다, 키는 크지만 몸이 가늘었다. 걷는 모습을 보면 움직임도 가볍고 나긋했던 탓에 막연하게나마 힘은 평범한 여성들보다도 약할 것이라고 여겼다. 반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겉모습만 보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또 내 편견이었군.’

포이닉스가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때 해인이 활시위를 놓았다.

공기를 가르고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나무에 묶어 둔 천을 단번에 뚫고 지나갔다. 다만 한가운데 표시해 둔 주먹 정도 크기의 점으로부터는 다소 벗어난 위치였다. 해인은 그 점을 기준으로 하여 현대의 과녁판을 덧씌워 보았다. 현대였다면 대략 오 점, 혹은 육 점 정도였을 것 같았다.

“중앙이랑은 너무 머네요.”

활을 든 손을 내리며 해인이 아쉬워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활시위를 놓을 때 요령이 부족한 탓인지, 시위를 잡고 있던 손끝이 약간 아려 왔다. 시선을 내려 확인한 손끝은 다행히 조금 붉어졌을 뿐 상처는 없었다. 해인이 손끝을 확인하는 것을 본 포이닉스가 급히 다가왔다.

“다치셨습니까?”

“아니에요, 안 다쳤어요. 놓을 때 느낌이 조금 이상했던 것 같아서 본 거예요.”

괜찮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포이닉스는 해인이 멀쩡함을 직접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아……. 손끝에 굳은살이 없으시다 보니 그런 겁니다. 처음 잡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죠. 다친 게 아니셔서 다행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포이닉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과녁을 바라보았다. 화살 크기만큼의 구멍이 뚫린 천을 보며 그는 뒤늦게나마 칭찬의 말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도 천을 제대로 맞히셨군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원에서 너무 많이 떨어져 있지 않나요?”

해인의 말에서 아쉬운 감정을 읽어 낸 포이닉스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손녀에게 말하듯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중앙과 멀다 해서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가씨께서는 난생처음 다뤄 보신 활이잖습니까? 무엇이든 처음부터 대단히 잘할 수는 없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저 정도면 준수한 결과지요.”

“음…….”

좋은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해인 스스로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한가운데 꽂힌 화살이 아니면 아쉬운 결과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무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오기가 생긴 해인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반복할수록 점점 초점이 맞춰지듯 중앙의 원에 가까워지는 화살 흔적에 감탄한 포이닉스는 곁에서 꾸준히 조언을 건넸다. 해인은 그 조언을 그대로 따랐고, 배우는 사람이 진지한 태도를 보이다 보니 언젠가 파트로클로스가 그랬듯이 포이닉스도 점점 가르치는 것에 진지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분명 가볍게 시작한 교습이었음에도, 그 상황이 끝난 것은 기어코 해인이 점 바로 위로 화살을 꽂는 것에 성공하고 나서였다.

“성공하셨군요!”

화살이 지나간 자리를 확인한 포이닉스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그 말과 동시에 활을 든 팔을 내리며 해인은 이곳에 온 이후 거의 처음이라 해도 좋을 만큼 활짝 웃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성공을 얻게 되자 그로부터 비롯된 성취감이 특별했다.

활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도 해인에게는 이점이었다. 늘 복잡한 고민을 하고 있다 보니, 이렇게 몸을 움직여서라도 머릿속을 잠시나마 비울 수 있는 기회는 해인에게 있어 일종의 휴식 시간과 비슷했던 것이다.

“어떠셨습니까?”

중앙을 맞히는 것에 성공하면 끝내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기에, 방금 전 쏘았던 화살을 마지막으로 교습은 종료됐다. 칼리에가 달려가 떨어진 화살들을 주워 모으는 사이 포이닉스는 해인에게 감상평을 물었다. 하지만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표정만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기는 했다.

하루 내내 차분한 낯을 하고 있던 해인은 뺨이 상기된 채 웃고 있었는데, 덕분에 평상시보다 더 어려 보일 정도였다.

“재밌었어요.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즐거우셨다니 저도 기쁠 따름입니다.”

흐뭇한 기분을 마음껏 즐기며 포이닉스가 온화하게 답했다. 그는 뒤이어 시간을 확인하듯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활쏘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낮이었는데, 그사이 시간이 제법 흘러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었다.

“마침 좋은 때에 성공시키셨습니다. 이제 곧 군대가 다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군요.”

“아.”

그 말에 해인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눈을 깜빡였다. 물론 직전까지도 멀쩡하게 사고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활을 쏠 때는 집중력이 필수적인 만큼, 활쏘기에 필요하지 않은 생각들은 다소 희미해졌던 것이다. 잠시 잊었던 사실들이 다시금 머릿속을 채웠다.

‘전쟁 중이었지. 게다가 여기는 전쟁터의 후방이고.’

그것을 필두로 다른 생각들도 뒤를 이어 떠올랐다. 예를 들면 다칠 리 없음을 알면서도 걱정되는 아킬레우스의 안위, 그리고 자주 잔 부상을 달고 오는 파트로클로스를 비롯한 다른 부관들의 상태 같은 것들이었다.

뒤에 남겨져 걱정하고 고민한다고 그들이 덜 힘든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 해도 다들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와중에 자신은 방금 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자 자책감이 엄습했다. 금세 미묘해진 얼굴로 해인은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셨군요.”

그 사실을 알아챈 포이닉스가 멈칫했다. 해인은 방금 전까지 분명 즐거웠던 얼굴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도 뿌듯함을 느끼던 중이었기에 그는 의아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게…….”

해인은 자신의 표정을 자각하고 잠깐 눈을 굴리다가, 이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다른 건 아니고……. 전쟁 중인데, 저는 너무 편하게만 지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요.”

드물게도 고민 없이 나온 솔직한 답이었다. 활쏘기를 배우며 오래 대화를 나눈 덕분에 쌓인 친밀감에 더해서, 포이닉스가 가진 나이 든 사람 특유의 포용력 덕분이었다. 그는 적어도 해인의 어머니보다는 훨씬 연장자였기에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다.

그 기대대로 포이닉스는 과한 반응 없이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들었고, 해인의 말이 끝나자 이해했다는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문장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완곡한 부정이었다.

“하지만 굳이 하실 필요는 없는 생각이십니다. 각자의 자리가 있는 만큼, 해야 할 일도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전장에 나간 이들은 모두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싸웁니다. 더불어 뒤에 남겨진 이들이 평화롭기를 바라기 마련이지요.”

“그런가요.”

“더불어 냉정하게 말하면, 아가씨께서 혼자 자책하셔도 달라지는 건 없지 않습니까.”

냉정하게 말한다고는 했지만 어조가 부드럽고 잔잔한 탓에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도 맞는 말이기는 했기 때문에, 해인은 한숨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