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58)화 (58/149)

“문자를……. 전혀 모르시는 게 아니셨군요. 교육도 받으셨고요. 아가씨의 고향에서는 이것과 다른 문자를 씁니까?”

“네.”

해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포이닉스는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

“제가 혼자 실례되는 짐작을 했었군요.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때 저만치에서부터 달려온 병사가 포이닉스에게 새 점토판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들고 눈짓으로 인사한 포이닉스는 병사가 떠나자 다시 해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저는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젊을 적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쓰지 않고는 계산이 어렵더군요. 헌데 저는 못 하는 것을 아가씨께서는 할 수 있으셨으니, 결국 제가 교만했던 셈입니다.”

“그렇게까지…….”

비약이 과하다고 생각한 해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 반응을 보고서야 포이닉스는 자신이 약간 멀리 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내 머쓱한 얼굴이 되어 해명했다.

“실은 왕자님이 어리실 적 그분께 가장 강조했던 것이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번 가르쳤던 만큼 저도 모범이 되고자 늘 애썼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잠깐 흥분했군요. 본의 아니게 난처하게 만든 것도 사과드려야…….”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버지보다도 나이 든 얼굴을 한 노인에게 계속해서 사과를 받게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해인은 결국 다급하게 포이닉스를 만류했다. 뒤에서 그들의 모든 대화를 전부 들으며 눈을 굴리고 있던 리노스가 해인의 어조에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상황이 겨우 마무리되고, 그때부터 해인은 포이닉스를 조금씩 도와주는 형태로 수량 점검을 함께했다.

몇 가지는 암산으로 가능했지만 몇 가지는 손바닥에 아라비아 숫자를 써 가며 계산했는데, 발명되지도 않은 것을 점토판에 써 내렸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 광경을 본 포이닉스가 점토판을 빌려주려 들어 사양하는 것에 시간이 다소 들었던 것을 빼면 아주 순조로웠다.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고, 포이닉스는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가늠한 뒤 해인에게 말했다.

“수량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제가 할 일은 끝났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일찍 끝났습니다. 모두 아가씨 덕분입니다. 물자를 안전하게 받은 걸로도 모자라, 제가 해야 할 일까지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어요.”

해인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일을 처리한 셈이기도 했으니, 이대로 아무 일 없었던 척 넘어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포이닉스는 그럴 수 없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게 만든 것 같아 뭐라도 보답으로 주고 싶었던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해인이 인간적으로 마음에 든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해인의 답을 들으며 그는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대인배적인 면도 있고, 무엇보다 말투에서 차분한 성격이 엿보이니 확실히 왕자님에게 부족한 면을 채워 주실 수 있을 것 같군.’

……파트로클로스와 아우토메돈에 이어, 그가 세 번째로 앞서 나간 생각을 한 부관이 된 순간이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당사자가 알 리는 없었다. 그는 해인에게 무언가 해줄 만한 것은 없을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공터를 떠나 막사로 돌아가는 중에도 그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해인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으로 줄곧 생각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새 자신의 막사 근처에 거의 도착했을 때가 되어서야 좋은 발상이 떠올라 멈칫했다.

그가 떠올린 것은, 언젠가 도시 하나를 점령하고 나눈 그의 몫의 전리품들 중에 끼어 있던 화려한 활이었다.

‘그래, 그게 있었지.’

그 활은 예식용이었기 때문에 실사용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사냥이나 전쟁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들고 다니기에는 과할 만큼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 전혀 실용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일단 화려하기는 했던 탓에, 예술품으로 생각하면 충분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마침 아가씨께서 아까 물자들 중 화살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도 하셨고.’

포이닉스는 자신이 해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그녀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가 화살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냈다. 그 행동으로 미루어 보면 최소한 활에 어느 정도의 관심은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병법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렇고, 활에 대한 것도 그렇고, 보통의 여성들이 하는 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는 했으나…….

‘어차피 저분께서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시니까.’

목걸이나 반지 같은 것을 선물했다가는 괜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고, 그렇다고 사내 녀석들에게 하듯 날붙이를 선물이라고 건넬 수는 없다. 그런 마당에 활은 장신구도 아니며, 무기이기는 하지만 단순 예식용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데다 날이 선 것도 아니었다.

실사용은 어렵겠지만, 흔히 그러하듯 조각상을 선물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된다. 상대가 관심 있는 것과 관련된 예술품을 건네는 느낌인 것이다.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마침 포이닉스의 막사 바로 앞에 도착한 시점이었기에 그는 우선 해인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그들 일행과 갈라져 나왔다. 자신의 막사로 들어간 그는 금방 그 예식용 활을 찾아낼 수 있었다. 포이닉스는 하인을 불러 활을 상자에 잘 담도록 지시하고, 그대로 그 상자를 하인에게 들린 채 다시 막사 바깥으로 나섰다.

아킬레우스의 막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막사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리노스와 텔라몬은 방금 전 헤어졌던 포이닉스가 다시 나타나자 의아한 얼굴을 했다.

“포이닉스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 물음에 포이닉스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아가씨를 잠시 뵈러 왔네. 그분께 드릴 만한 좋은 선물을 찾아서.”

“아가씨께 선물을요?”

“오늘 일을 생각해 보니 여러모로 아가씨께 도움만 받았지 뭔가. 죄송한 일도 있고, 심지어 구경하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해 놓고 아가씨가 일을 하게 만들기까지 했으니, 뭐라도 드리는 게 당연한 예의지.”

그 말에 병사 둘은 나란히 납득한 얼굴을 했다. 텔라몬이 막사의 문 가까이 다가가 해인에게 말을 전하는 사이, 리노스가 포이닉스에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지만 날붙이 종류는 아니지요?”

“음, 예식용 활이라네. 실용적이지는 않지만 화려하고 아름답지. 보급 물자 중 화살에 호기심을 가지시던 게 생각나서 가져왔는데, 혹시 무기 종류인 게 문제가 되나?”

“그런 거면 괜찮을 겁니다. 실은 왕자님께서 아가씨 근처에 날붙이를 꺼내 두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혹시 위험할 수 있다며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오…….”

포이닉스는 별수 없이 감탄하고 말았다. 아킬레우스가 그런 것까지 챙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탓이었다.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사랑이 사람을 많이 바꿔 놓는군.”

“저도 자주 놀랍니다.”

리노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들 모두 어린 아킬레우스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지켜봐 온 사람들이었기에 변화한 그에 대해서라면 이야기할 것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됐다. 텔라몬의 말을 들은 해인이 당황한 기색을 한 채 막사 바깥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포이닉스가 빙긋 웃으며 하인으로부터 상자를 건네받고, 해인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해인 역시 가만히 서 있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금방 대화를 나눌 만한 거리에서 마주 볼 수 있었다. 텔라몬으로부터 포이닉스의 방문 이유까지 이미 전해 들은 해인은 말 그대로 꽤 당황한 상태였다.

“이건…….”

차마 말을 잇지 못한 해인이 곤란한 낯을 하자, 포이닉스가 온화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아가씨께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작은 선물을 가져와 봤습니다.”

말을 이으며 그는 손수 상자를 열어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보시다시피 활입니다만, 워낙 화려한 탓에 저나 다른 이들 같은 사내들이 가지고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더군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활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크기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다양한 색의 염료로 정성껏 칠해져 있었으며 양 끝에는 금으로 된 작은 조각 장식까지 붙어 있었다.

“실제로 사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가씨께는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포이닉스가 말을 맺었다. 그의 말대로, 활은 한눈에 보더라도 실용성은 크게 없어 보였으나 그 대신에 예술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양새였다. 그것을 보며 해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선물 받을 일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해인이 선물을 거절하는 게 오히려 더 예의 없게 비칠 법한 상황이었다. 나이 지긋한 어른이 이 정도로 성의를 보인다면 그만 순순히 받아들이고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게 가장 좋은 길이었다.

“네, 아름답네요.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텔라몬이 다가와 해인을 대신해서 상자를 건네받았다. 해인은 열려 있는 상자 안을 힐끗 곁눈질한 뒤 다시금 포이닉스를 돌아보았다. 결국 받게 되어 버렸으니 그에 대한 감상이라도 몇 마디 해야 할 때였다.

“활을 쏴 본 적도 없는데, 과분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요.”

그 말에 포이닉스가 잠시 멈칫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활을 다뤄 본 적이 없으셨군요. 하지만 그래도 관심은 갖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네?”

“실은 아까 보급품들 중 화살을 유난히 자세히 살피시던 것이 떠올라 활을 골라 온 것이기도 했습니다.”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머쓱하게 웃었다.

“알고 계셨군요.”

아주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화살이 신기하게 느껴진 것은 맞았다. 삼천 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현대까지 그 무기가 여전히 유사한 형태를 가진 채 존재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묘한 기분이 드는 탓이다. 무엇보다 해인이 국적을 가지고 있는 나라와 활은 특정 주기로 뗄 수 없이 긴밀한 사이가 되고는 하기에 더욱 그랬다. 해인의 긍정에 포이닉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잘못 짚지 않았군요.”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조심스러운 권유였다.

“그럼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면 제가 활 쏘는 것을 알려 드릴까요?”

“활을요?”

“예, 보급품을 구경하러 가지 않겠냐는 제안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포이닉스는 힐끗 시선을 돌려 텔라몬이 들고 있는 상자를 눈짓했다.

“아까 말씀드렸듯 이 활이 그리 실용적이지는 않지요. 때문에 흔히 조각상을 선물하듯 예술품을 드린다는 생각이었지만……. 다뤄 본 적 없이 아예 처음이시라면 오히려 실용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연습해 보기에 좋을 테니까요. 마침 이 활은 예식에 쓰던 것이니, 시위의 탄성도 그리 강하지 않아 당기기 쉬울 테고요.”

“음.”

어차피 주변은 여전히 밝았고,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는 것도 여전했다. 그리고 활은 정말로 건드려 본 적 없던 해인은, 이번에는 순수한 호기심에 포이닉스의 새 제안을 수락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