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명이 한 번에 움직이기에는 주변이 혼잡했기에 텔라몬과 칼리에는 공터 외곽에서 기다리기로 합의했다. 해인과 포이닉스는 여기까지 올 때 그랬듯 나란히 걸어서 잔뜩 쌓인 짐들 앞으로 향했고, 바로 뒤로 리노스가 따라갔다.
물자들의 종류는 당연하지만 아주 다양했다. 가장 중요한 식량이 가장 많았지만, 부상자에게 쓰일 약초나 붕대로 쓸 천, 그리고 난전에서는 회수가 불가능하기에 사실상 소모품인 화살 등의 물량도 상당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던 것이 있군요.”
해인의 옆에서 포대에 가득 차 있는 말린 약초의 상태를 확인하던 포이닉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허리를 폈다. 그는 근처에서 화살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있던 해인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낀 해인이 고개를 들었다.
“네?”
“아가씨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원래는 왕자님께 말씀드려서 아가씨에게 전달해 달라 부탁하려 했지만, 이왕 만났으니 제가 직접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렇게까지 서론이 긴가 싶었던 탓이다. 게다가 예의가 과한 느낌이라 약간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해인이 어색하게 수락하자 포이닉스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아침에 물자가 도착했단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전달받았던 날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해서 말입니다.”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연합군이 물자를 전달받으려면 배들이 무사히 에게해를 건너와야 합니다. 만약 파도가 거세면 보급이 어려워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요. 선원들이 말하길 바다가 몹시 고요했답니다. 이는 포세이돈 님의 배려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거기에 아가씨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팀블레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단 한 번도 포세이돈을 만나지 못했고, 바다 근처로도 가 본 적 없던 해인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제가 그런 것까지 부탁하지는 않았는걸요.”
“그렇다면 포세이돈 님께서 아가씨를 계속 신경 쓰고 계시는 것이겠군요.”
그 말에 해인은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건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지만, 낯선 땅의 타인으로부터 듣게 되자 새삼스러울 만큼의 무게로 다가온 탓이었다. 멈칫한 해인을 보며 포이닉스가 진지하게 덧붙였다.
“비록 제게 친자식은 없지만, 자식처럼 여기며 돌본 이는 있습니다. 덕분에 부모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조금은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늘 염려되고는 하지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계속 잘 부탁드린다는 식의 청탁을 드리려는 것은 진정 아니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디 개의치 마시길 바랍니다. 그저 저희가 이득을 보게 된 만큼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말을 맺은 포이닉스는 해인의 침묵을 알아서 해석한 듯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직전까지 하던 일로 다시 신경을 돌렸다.
이후 그들은 한동안 대화 없이 동행했다.
대화가 없어도 분위기가 어색해지지는 않았다. 해인은 조용히 포이닉스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는 게 불편하지 않았고, 포이닉스는 물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리노스는 유일하게 잠시나마 눈치를 본 사람이었지만, 이내 그도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는 본분에 충실했다.
침묵이 깨진 것은 포이닉스가 물자의 상태 확인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수량을 점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쌓여 있는 포대들을 병사들을 시켜 정리하도록 한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뒤 눈을 가늘게 뜨고 포대의 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점토판 위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해인은 얼굴을 가린 천을 살짝 치우는 것만으로 그가 쓰는 문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지만, 그 문자의 발음이나 뜻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크로노스가 통하게 해 준 것은 말뿐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해서 문자까지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형문자일까?’
계속해서 보다 보니 같은 문자 몇 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뜻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당연한 일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자신이 문맹이 되었음을 확실히 깨달은 해인은 작게 헛웃음 짓고 말았다.
“혹시 제가 무엇을 쓰는지 궁금하십니까?”
그때 해인의 시선을 느낀 포이닉스가 고개를 돌려 해인을 보며 물었다. 이런 문제에서 자존심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해인은 순순히 수긍했다.
“네.”
포이닉스는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문자를 손으로 짚어 가며 설명했다.
“수를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보리와 밀은 각각 몇 포대인지, 약초와 붕대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 화살의 개수는 몇 개인지, 그런 것들 말이지요. 방금 왼쪽에 있는 약초들의 양을 기록했으니, 이제 바로 옆에 있는 곡식 차례입니다.”
“아…….”
설명을 들은 해인은 작게 감탄하며 다시금 점토판을 내려다보았다. 문자가 수를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뜬금없는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아라비아 숫자도 발명되기 이전이구나.’
삼천 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우나, 그 세월의 무게를 선명하게 이해하고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마당에 얻게 된 새로운 깨달음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숫자가 없어…….’
당연하게 사용하던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아득한 기분이 든 해인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아가씨?”
“……앗, 네.”
넋을 놓고 있던 해인은 자신을 부르는 포이닉스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혹시 제 설명이 미흡했다면…….”
“아니에요, 이해됐어요. 잠시 생각하느라.”
해인은 힐끗 시선을 내려 자신이 땅을 밟고 있음을 괜히 확인해 보며 답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감사 인사를 들은 포이닉스는 가볍게 웃어 보인 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사히 상대를 납득시켰음에 안도하며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포이닉스는 이제 방금 전 자신이 말했던 대로, 정면에 있는 곡식 포대들의 수를 기록하려는 듯 점토판 위로 희미하게 글자 몇 개를 휘갈겨 쓰고 있었다.
포이닉스가 쓰고 있는 것이 수를 나타내는 문자였음을 알게 되자 비로소 그가 일을 처리하는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도 눈에 들어왔다. 우선 본인이 직접 물자의 수를 세고 계산해서 총 합계를 구해 놓고, 앞서 다른 사람이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며 교차로 검증하고, 동일한 개수가 나오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동일하지 않고 개수가 어긋나면 한 번 더 세어 본 뒤, 따로 표시해 두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점토판 위에 새겨진 숫자와 기호 없는 계산식을 가만히 응시하던 해인은 고개를 들고 얼굴을 가린 천을 손끝으로 들어 올리며 정면에 쌓인 포대를 확인했다. 육면체로 가정하고 가로와 세로, 높이의 개수를 확인한 뒤 전체의 개수를 계산하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숫자 몇 개와 기호로만 표기하면 한 줄도 되지 않는 만큼, 굳이 손을 쓰지 않고도 머릿속으로 식을 세워 결과의 도출이 가능한 것이다.
‘……이건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삼천 년 동안 쌓여 온 지식이 대단한 거지.’
그런 만큼 굳이 나서서 아는 척할 생각은 없었다. 해인은 원래도 무언가 내세워 자랑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일궈 낸 결과도 아닌 것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다소 머쓱한 기분을 들게 했다. 굳이 머릿속으로나마 수를 계산해 본 것은 인류의 발전에 대한 혼자만의 감탄과 비슷한 것일 뿐이다.
속으로 고개를 저은 해인은 다시 포이닉스가 글을 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어이쿠, 이런.”
포이닉스가 글을 쓰고 있던 점토판이 새로 고쳐 드는 과정에서 불현듯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포이닉스가 급히 손을 뻗었지만 잡지 못했고, 점토판은 바닥으로 떨어져 그대로 처참하게 뭉개졌다. 그 광경에 해인은 며칠 전 똑같은 불행을 겪었던 파트로클로스와 이름 모를 병사를 문득 떠올리고 말았다.
점토판은 형체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 위에 글씨를 새겨야 했기 때문에 사용할 때는 완전히 굳히지 않았다. 글씨를 다 쓰고 틀린 곳이 없다고 판단해야만 완전히 굳혀서 보관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용 도중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그 충격만으로도 뭉개지고 모서리가 깨져서, 아무 일 없던 척 이어 쓰지 못했다. 근처에 있던 병사 한 명이 상황을 본 듯 급히 다가와 물었다.
“포이닉스 님, 괜찮으십니까?”
포이닉스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나야 물론 괜찮네. 하던 계산은 다시 해야겠지만.”
“새 점토판을 가져다 드릴까요?”
“부탁하겠네.”
병사가 고개를 숙인 뒤 얼른 뒤돌아 달려갔다. 포이닉스는 머쓱하게 해인을 돌아보았다.
“조금 서두르다 보면 꼭 이런 실수가 일어나는군요. 혹시 지루하시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해인은 바닥에 떨어진 점토판을 힐끗 바라봤다.
“저 앞에 따로 쌓여 있는 포대들을 세고 계셨던 게 맞나요?”
“예? 예, 그렇습니다.”
“음.”
짧은 찰나 고민이 이어졌다. 하지만 포이닉스의 얼굴 위로 살짝 드러난 피곤한 기색이 결국 해인의 등을 밀었다. 멋쩍은 기분을 견뎌 내며 해인은 조용히 속삭였다.
“전부 아흔여섯 개예요.”
“……예?”
“저는 그렇게 계산했는데,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세요.”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하게 해인을 보던 포이닉스는 점토판과 해인, 그리고 포대들을 번갈아 가며 한 번씩 바라보았다. 앞서 현장을 담당했던 병사가 써 놓은 점토판은 부서지지 않고 멀쩡했기에, 그 위에 쓰인 글을 읽은 포이닉스는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해인을 돌아보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쓰지 않고 계산하신 겁니까?”
“음……. 네…….”
열없이 답하며 해인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방금까지 이어지던 계산을 다시 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지쳐 있던 포이닉스는 예상 밖의 상황에 해인의 반응이 미온적인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