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니 기쁘군요. 혹시 어딘가 가시던 길이셨습니까?”
“……아니요. 잠시 주변을 산책하려 했는데, 오늘따라 사람이 많아 보여서요. 막사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해인은 다른 이들을 대할 때보다도 조금 더 예의 바른 어투로 답했다. 포이닉스가 포세이돈보다도 훨씬 더 나이 든 겉모습을 하고 있는 탓이다. 신에 비하면 하잘것없을 만큼 짧은 세월을 살아왔다지만, 필멸자로서는 그조차 긴 세월이었기에 노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셨군요.”
그리고 해인의 말을 들은 포이닉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깐 말을 멈췄다.
‘……파트로클로스가 그랬지, 이분이 병법에 관심이 있다고.’
포이닉스는 해인을 바라봤다. 생긴 것만 보면 전쟁과는 조금의 연도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해인 역시 신의 자식이니 아킬레우스처럼 유별난 구석이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다고 홀로 납득했다. 나가서 싸우겠다고 하지 않는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진영에서는 달리 할 만한 일이 없으니 무료하셔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군.’
마침 자신도 해인과 대화를 좀 더 나눠 보고 싶었으니, 그는 해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네 보고자 마음먹었다. 포이닉스는 신중히 말을 골라냈다.
“혹시 사람이 많은 이유도 알고 계십니까?”
“네, 오늘 물자가 들어온다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사실 제가 그 들어온 물자들을 점검하는 일을 맡게 되어 진영에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말끝을 늘이며 해인을 마주 본 포이닉스가 빙그레 웃으며 권했다.
“이왕 이렇게 저와 마주쳤으니, 오늘 어떤 물자들이 들어오는지 구경이라도 할 겸 함께 가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네?”
난데없는 제안에 해인은 약간 당황하며 되물었다. 포이닉스도 자신의 제안 자체가 갑작스러웠음은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해명했다.
“사실 파트로클로스로부터 아가씨께서 병법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자랑은 아니지만 그에게 병법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도 제 영향을 받은 면이 없잖아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지금 온 물자와 같은,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 같은 것 말이지요.”
“아.”
“그렇지 않습니까?”
“그, 네…….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던 기억이 나네요.”
해인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수긍했다. 그러잖아도 불과 몇 분 전 물자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하던 파트로클로스를 잠깐 떠올렸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해인의 표정을 확인한 포이닉스가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그렇지요? 그래서 아가씨께서도 실제로 들어오는 물건들의 종류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포이닉스는 그 나름대로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짐작은 처음부터 전부 틀렸다.
애초에 해인이 파트로클로스에게 병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한 이유는 흥미 때문이 아니었다. 귀환 조건이 되는 사건이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게 없던 탓일 뿐, 병법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듣다 보니 흥미로웠던 덕분에 집중하기는 했으나 결국은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였을 뿐으로, 전쟁이라는 것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자 하는 학구적인 마음은 아니었다.
따라서 물자의 종류와 같은 세부적인 사항까지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전쟁과 관련된 사건이 귀환 조건이라지만, 그게 물자 보급 같은 것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른의 제안을 눈앞에서 거절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해인 역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다소 지겨워지고 있던 차였다. 어차피 산책을 나왔던 것이었고, 막사로 돌아간다고 해서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제안 자체는 크게 나쁠 게 없었다.
해인은 살짝 눈을 돌려 일행의 의견을 확인했다. 해인이 보내는 무언의 질문을 확인한 리노스는 텔라몬과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뒤이어 포이닉스를 잠시 바라본 뒤 슬쩍 웃고는 작게 말했다.
“예, 원하신다면 보러 가셔도 됩니다. 포이닉스 님이 동행하신다면 안전상으로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안전을 맡기고 있는 이들도 문제없다고 공언했으니 걸릴 것은 없었다. 해인은 포이닉스를 돌아보며 우선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저 혼자 바로 결정할 수는 없어서…….”
“아닙니다. 신중한 것이야말로 중요한 미덕이지요.”
포이닉스는 사과할 필요 없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떠올렸다. 상대가 불쾌해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서야 해인은 희미하게나마 마주 웃으며 제안에 대한 긍정의 답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괜찮다면 보러 가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가면 방해되지 않나요?”
“아닙니다. 저부터도 단순히 감독이나 하러 가는 것일 뿐이었으니 괜찮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한 포이닉스는 뒤이어 칼리에가 자청해서 들고 있던 해인의 히마티온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하지만 얼굴은 가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진영의 병사들 몇몇도 드나들 수 있어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렇겠네요. 칼리에, 좀 도와줄래?”
납득할 만한 이유였으므로 해인은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오랜만에 생긴 할 일이 반가웠던 칼리에는 얼른 앞으로 몇 걸음 나서서 해인이 얼굴을 가리는 형태로 히마티온을 걸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히마티온의 원 주인은 포세이돈이었기 때문에 해인이 쓰기에는 길이도 길고 색도 어두웠지만, 그런 만큼 얼굴만은 확실하게 가릴 수 있어서 성별을 감추기에는 아주 적절했다. 해인의 키가 이 시대 남성들의 평균보다 조금 더 큰 덕분에, 일단 얼굴을 가려 놓으면 여성이라고 단번에 생각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해인이 히마티온을 다 걸치고 난 뒤 그 장소에 멈춰 있던 이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포이닉스가 가려 했던 진영의 입구 방향이었다.
해인의 일행과 마주치기 전까지 포이닉스는 혼자 길을 가고 있었지만, 이제는 해인까지 포함하여 총 네 명이 더해지다 보니 어느새 일행의 규모 자체가 상당히 불어나 있었다. 그럼에도 포이닉스는 크게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해인과 함께 나란히 앞서 걸어가며 이웃집 할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건넸다.
그 모습에서 해인은 포이닉스가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건넨 진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방해 안 된다고 했지만 사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걸 감수할 만큼 내가 궁금하셨나 보네.’
해인은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그런 호기심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진영 내에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꽤 많이 돌고 있음을 본인부터가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평가하려는 기색이었으면 불쾌했겠지만, 포이닉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대화나 좀 나눠 보고 싶었을 뿐인 듯했다.
해인의 어머니의 신상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출신에 대해 물어보는 등 개인적인 선을 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에 대한 것, 혹은 이제는 진영 안에서 유명해진 사건인 날뛰던 말을 진정시켰던 것과 같이 가벼운 주제들이 주를 이뤘다. 덕분에 낯을 가리며 예의를 차리던 해인도 시간이 조금 지나자 편하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걷는 사이 어느덧 주변은 조금씩 더 혼잡해졌다. 진영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올수록 지나다니는 병사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간혹 포이닉스를 알아보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사를 몇 번 받아 주며 계속 걸음을 옮기던 그는 진영 입구 근처의 넓은 공터 앞에 도착하자 멈춰 섰다. 그가 해인을 돌아보며 앞쪽을 가리키고 물었다.
“저쪽입니다. 저기 쌓인 물건들이 보이십니까?”
해인은 천 자락을 잠깐 들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병사들이 포대나 상자 따위들을 옮겨 와 쌓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네, 보여요.”
“사실 배가 도착한 건 오늘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테베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가에 정착했고, 거기서 다른 진영의 장군들과 제가 함께 물자 내리는 것을 감독했었지요. 저건 이제 우리 진영의 몫으로 나눠져서 도착한 겁니다.”
“그럼 지금 하실 일은 나눈 몫이 제대로 왔는지 확인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혹시나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직접 가서 해결하는 것까지도 제 일이지요. 그때마다 제 나이가 특히 도움이 되고는 합니다. 저보다 더 나이 든 사람이 잘 없다 보니…….”
포이닉스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어딘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농담이었다.
그때 저 멀리에서부터 병사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그는 포이닉스가 오기 전까지 현장을 통솔하고 있었던 듯, 손에 점토판 여러 개를 챙겨 들고 있었다. 총 책임자의 등장에 반색하던 병사는 포이닉스의 옆에 있는 해인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포이닉스 님, 옆에 계신 분은…….”
“포세이돈 님의 따님이시네. 내가 제안 드렸고 기꺼이 동행해 주셨지.”
“아, 그분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잠깐 경계하는 것 같더니 제대로 된 것 같지도 않은 설명에 금세 납득해 버리는 태도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해인이었다. 그러나 병사는 해인에게도 정중하게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후, 아무렇지 않게 포이닉스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현대였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았을 소개가 당연한 듯 통하자 해인은 묘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포이닉스는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담당 병사와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점토판 몇 개와 작은 나무 막대를 건네받은 그는 그것들을 품에 챙겨 들고 해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수량과 상태를 확인해야 하니 가까이 가서 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