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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며칠이 더 흘렀다. 해인은 이곳에서의 생활 전반에 있어 점점 더 적응해 가고 있었다. 매일이 거의 엇비슷한 일정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고, 종종 아킬레우스가 출전하는 것을 배웅해 주기도 했으며, 낮 동안은 막사에 머무르거나 아직 이름을 고민 중인 검은 말을 보러 갔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해인을 전담하는 몸종으로 자리 잡은 칼리에를 데리고 간단한 주사위 놀이 같은 것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해가 지고 진영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막사 안에 있어도 그런 소리는 잘 들리기 때문에, 기척이 들리면 바깥으로 잠시 나가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했다.
아킬레우스는 매번 멀쩡하게 돌아왔다. 그 옆의 파트로클로스가 꽤 자주 잔 부상을 달고 오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는데, 그걸 보며 해인은 현대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 중 하나의 진위여부를 뒤늦게나마 마저 깨달을 수 있었다.
발뒤꿈치를 제외하면 다치지 않는다는 것까지 진실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 그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였던 만큼, 그리 즐거운 깨달음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해인은 파트로클로스 외에도 에우도로스나 메네스티오스같은 다른 부관들과 종종 마주쳐 인사하고는 했다. 그렇게 저녁 시간을 보내면 금세 어둠이 찾아든다. 잘 때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킬레우스와 같은 침대를 썼다. 그 사실이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당황하거나 어색해하기에는 이미 너무 여러 날이 지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건 단순히 시간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포세이돈의 협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기어코 하고자 하면 해인 한 명쯤이야 힘으로 누르고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텐데 결코 그런 기색을 보인 적 없는 아킬레우스의 태도가 비중이 컸다.
품 안에 끌어안고 잠들기는 하지만, 다른 뜻 없이 체온을 나누는 정도의 담백함이었기에 언젠가부터 해인 역시 그 정도로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낮에는 점점 더 기온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지지만, 일교차가 큰 탓에 밤은 여전히 조금 쌀쌀한 편이었다. 타인과 붙어서 잠드는 사실 자체에 적응된 이후로는 곁에 있는 체온이 오히려 나쁘지 않게 다가오기도 했다.
해인이 그런 사실을 새삼스레 다시 자각하게 된 건, 이유 없이 이른 시간에 눈을 뜬 어느 날이었다.
‘새벽인가?’
깨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평상시 깨어났을 때와는 달리, 주변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채워져 있어서였다.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을 확인했다.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물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선만 살짝 들어 올려 위를 바라보자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아킬레우스의 얼굴이 보였다.
‘……진짜 자고 있네.’
정신적 피로는 그렇다 치더라도, 몸의 피로는 반나절마다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는 그녀보다도 매번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사람이다. 지금처럼 잠든 얼굴을 보는 것은 아킬레우스를 만나게 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인은 신기한 기분으로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관찰하듯 빤히 응시했다.
반듯하고 균형적인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선이 또렷했다. 눈을 감고 있는 덕분에 가느다란 붓으로 정성껏 그려낸 것 같은 눈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눈동자가 워낙 선명한 탓에 그쪽으로 시선이 쏠려 잘 느끼지 못했지만, 의외로 아킬레우스의 눈매 자체는 상당히 섬세하고 우아한 편이었다.
한참 눈을 감은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던 해인은 얕은 한숨과 함께 다시 시선을 내렸다. 일찍 일어난 김에 침대를 벗어나 바깥 공기라도 잠시 쐴까 싶었지만, 그러려면 몸 위로 둘러진 아킬레우스의 팔을 치워 내야 했다.
물론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괜히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까 봐 망설여진 탓에, 해인은 한동안 눈만 감았다 뜨길 반복하며 품 안에 끌어안긴 그대로 얼마쯤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는 중에도 몸을 감싸고 있는 온기는 안온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기울여 품에 파고들려던 해인은 그런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멈칫했다.
‘깨우기 싫은 건 핑계고, 사실 내가 안일해진 걸지도…….’
해인은 눈을 반쯤 내리뜬 채 찰나의 깨달음을 되새겼다.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되어 익숙해진 데다가, 일단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스스로 세워 뒀던 벽은 어느 사이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벽이 무너질수록 느껴지는 안온함 역시 커지고, 그러면 벽은 점점 더 낮아진다. 무한한 반복의 굴레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되새겨도 해인은 좀처럼 지금의 이 순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한번쯤 안일하게 있어도 되지 않을까.’
복잡한 생각이나 고민들은 이곳에 떨어진 이후 거의 항상 하고 있다. 돌아갈 계기가 될 사건은 무엇일지부터 시작해서, 언젠가 반드시 다가오고 말 아킬레우스의 죽음, 그가 했던 고백, 그에게 가지게 된 감정, 이곳에서 만나게 된 여러 사람들에 관한 것들…….
익숙하게 하루를 보내면서도 틈이 생길 때마다 떠오르는 고민들 역시 이제는 일상의 한 부분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어차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고민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고요하고 서늘한 새벽에, 따뜻한 곳에 머무르면서까지 스스로를 고통받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번만, 지금만 넘어가자.’
해인은 합리화 끝에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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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잠이 깼을 때는 평상시 일어나던 것과 비슷한 시간대였다.
새벽의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푸르스름한 빛에 덮여 있던 막사 안처럼, 얇고 푸른 천으로 한 겹 덮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가운데 스스로 선택했던 안일함에 대한 것만은 유난히 선명해서, 해인은 쓰게 웃고 말았다.
그래도 후회되는 것은 아니었다. 새벽의 일은 기억 뒤로 밀어 두며 해인은 일상적으로 시간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진영 내부의 환경이 평상시와는 조금 달랐다. 막사 근처로 가볍게 산책을 겸해 나온 해인은 저만치에서 무리 지어 어디론가 향하는 병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진영에 남은 사람이 많네요.”
낮에는 보통 진영을 지키는 병사 몇몇과 하인들만이 진영에 남아 있기 때문에 늘 조용했다. 며칠 전 말이 날뛸 때도 진정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도 다름 아닌 사람 수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지나다니는 병사들이 꽤 보였다.
물론 그들이 지휘관의 막사 주변으로 아무렇게나 접근하지는 않았으니 부딪힐 일은 없었지만, 사람이 많고 적음에 따라 진영 내부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해인의 말에 리노스가 자신 역시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연합군의 본국들이 보내는 전쟁 물자가 도착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테베에 왔을 때부터 리노스와 텔라몬은 아킬레우스로부터 해인을 호위하라는 새 역할을 지시받았고, 그 이후로 그들은 전선에 나가 싸우지 않았기에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보와는 어느 사이 다소 멀어져 있었다. 텔라몬 역시 미처 잊고 있었다는 얼굴을 했다. 동료의 표정을 확인한 리노스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파트로클로스가 지난번 병법에 대해 이야기하며 전쟁 중 물자 보급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던 사실이 기억난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복잡할 텐데 돌아다녀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아요.”
“예, 알겠습니다.”
물자를 옮기는 과정이라면 타 진영 소속의 병사들도 간혹 진영에 출입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그들이 지휘관의 막사가 위치한 진영 깊은 곳까지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이대로 산책을 계속하다 보면 마주치게 될 가능성은 없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많아질수록 위험 요소도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기에 호위하는 입장에서는 돌아가겠다는 해인의 말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다시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되돌아가던 해인은, 중간쯤 되는 거리에서 뜻밖에도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멀리서는 누구인지 금방 눈치채지 못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며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자 어렵지 않게 이름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포이닉스였다. 애초에 진영 내에서 그만큼 나이가 많은 사람은 달리 없으니 떠올리는 것은 아주 쉬웠다. 상대 역시 해인을 알아본 듯, 그는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심지어 먼저 정중한 어조로 인사를 꺼낸 것도 그였다.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이 늙은이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상외의 만남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일단 그는 아킬레우스의 부관이라는 위치로 종군했고, 따라서 막사도 지휘관의 막사 근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네, 안녕하세요. 물론 기억하고 있어요.”
해인은 얼른 마주 인사를 건넸다. 리노스와 텔라몬 역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이 어린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를 호위했을 때, 포이닉스는 그 두 명의 스승 역할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서로가 서로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줄곧 해인의 등 뒤에서 눈치를 보던 칼리에에게도 인자하게 웃어 준 포이닉스는 다시 해인을 돌아보았다.
‘성함이……. 해인이셨던가.’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해인의 존재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늘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아킬레우스가 최근 들어 낯선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큼, 그 관심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어릴 적부터 솔직히 말해 다소 유별났다. 펠레우스 왕을 대신해 그가 반쯤 키우다시피 한 탓에 모를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자신이 잘난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만큼 자신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타인에게는 그리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 성향은 커서도 별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늘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해인을 데려오더니 그 이후로부터 조금씩 성격이 누그러지고 가끔씩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없던 무게가 생겼지.’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나름대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포이닉스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킬레우스가 바뀐 것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이가 어떤 사람인지 늘 알고 싶었다. 감히 평가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호의를 갖고 있었고, 그런 만큼 궁금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마주친 것은 정말로 어디까지나 우연이고, 포이닉스에게는 지금 바쁘게 해야 할 일 역시 존재했지만, 그렇더라도 이런 기회를 놓치기는 아까웠다. 그는 먼저 나서서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