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
아킬레우스는 충동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속삭이듯 불렀다. 하지만 진작 눈이 감겨 있던 데다가, 아까 전 테이블에 엎드려 있을 때도 이렇게 부르는 정도로는 깨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답을 들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다음 순간, 해인이 반짝 눈을 떴다. 뒤이어 그녀는 시선만 옆으로 돌려 아킬레우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깨울 생각은 없었던 아킬레우스는 멈칫하며 그 눈길을 마주했다.
“무슨 일 있나요?”
해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푸른 눈 위로는 여전히 잠기운이 서려 있었다.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아킬레우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직전까지 떠올렸던 생각을 확인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잠결이라면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솔직한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정정당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어차피 아킬레우스는 애초에 정공법만 쓰는 지휘관은 아니었다. 생각 끝에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뭐 하나만 묻고 싶은데.”
자다 깨서 질문을 듣게 된 해인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한 박자 늦게 수락했다.
“어떤 건가요.”
“오늘 낮에 그대가 길들였다던 그 말, 왜 받는 걸 내켜하지 않았는지……. 방금 짐작해 봤거든.”
몇 시간 전의 저녁, 해인이 답하지 않고 침묵하던 그때,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표정 위로 떠오른 일련의 고민들을 읽어내고 있었다. 고민 곁에는 타인의 호의를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에서부터 비롯된 죄책감도 함께 보였다. 해인이 입을 열기 전 그 모든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는 직접적으로 말을 듣기 전부터 해인의 거절을 이미 예상했었다.
그러나 거절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느끼기보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읽어 냈던 상대의 고민에 외려 신경이 쓰였다. 그 이후 막사로 돌아와 검을 손질하면서도 문득 집중이 깨질 때마다 그는 그에 대해 거듭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전, 마침내 그럴듯한 이유를 짐작해 낸 것이다.
“정 주기 싫은 탓이겠지? 그대는 떠날 테니까.”
조용한 목소리는 그대로 정곡을 찔렀다. 그때까지도 눈은 뜨고 있지만 반쯤 잠결이던 해인은 한결 정신이 맑아지고 말았다.
‘……가만히 있다가 정곡 찌르는 거 잘하네.’
해인은 손을 들어 눈가를 꾹 눌렀다. 아킬레우스는 그들이 팀블레에 있을 때에도 아무렇지 않게 있다가 갑자기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고는 했었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해인이 아까 전 아킬레우스의 제안을 거절했던 건 이 시대에 더 이상 정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실 해인은 원래부터도 동물을 좋아했다. 낮에 본 그 말에게 금세 마음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부상자를 만들어 냈을 만큼 난폭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 말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붙잡혀 와 억지로 길들여지고 있던 중이었을 것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서 빠져나가고자 그렇게 행동했을 테니, 연민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이유만으로 말을 데려가기에는, 해인은 이미 자신이 앞서 정을 주게 된 것들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지금 곁에 있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감정부터가 이미 거대한 문제였다. 거기에 더해 파트로클로스와도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에우도로스를 비롯해 아킬레우스의 다른 부관들과도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리노스와 텔라몬에 이어, 칼리에의 이름까지 기억하게 된 이후다.
이미 쌓게 된 인연이 너무 많았다.
그 위로 말 못 하고 주인밖에 바라볼 줄 모르는 동물까지 곁에 두는 것은, 아무래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맞아요.”
해인은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눕고는 몸을 조금 웅크리며 답했다. 아킬레우스가 앞서 생각했던 대로, 그렇잖아도 피곤했던 뇌가 잠에 취하기까지 해 평소보다 솔직한 토로였다.
“여기서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요.”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걸터앉은 방향으로 돌아누운 해인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마음이 금세 복잡해졌다.
여기서 더 늘리고 싶지 않다는 건, 다시 말하면 이미 무언가에 정을 주기는 주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해인이 이곳에서 만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 만큼, 방금 전의 그 말은 그녀에게 있어 아킬레우스의 존재 역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까지는 달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적이기도 했다.
더 늘리고 싶지 않다는 건, 해인이 자신은 언젠가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증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침묵하며 해인의 답을 곱씹던 아킬레우스는 슬쩍 손을 뻗어 해인의 이마를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아까 전 잠시 떠올렸던 의문처럼, 잠결이어서인지 익숙해져서인지 해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킬레우스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 내 넘겨보는 등 미약한 접촉을 몇 번 이어 가다, 쓴맛을 삼키듯 물었다.
“……왜? 돌아가면 그리울 것 같아서?”
“그것도 있고, 남겨진 쪽도 슬프잖아요.”
해인은 침대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아킬레우스의 손을 피하는 건지, 별 뜻 없이 한 행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은 영리하니까 갑자기 주인이 없어지면 금방 눈치채요……. 말 못 하는 동물을 그런 식으로 괴롭히고 싶지는 않아요.”
아킬레우스는 쓰게 웃었다. 말투가 조금 늘어지는 게 아무래도 정말 덮어쓰고 있던 막이 잠결에 한 겹 벗겨진 것 같았다. 그 솔직함 덕분에 듣게 된 저의가 아주 다정하고 너그러워서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과는 거의 정반대되는 생각이었던 탓이다.
그는 언젠가 이곳에 남겨져 다시 상대를 볼 수 없더라도, 그렇게 되어 괴롭더라도, 그런 상황을 미리 걱정하기보다는 현재의 감정에 집중하고 싶었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는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킬레우스는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낯설다는 감상을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화로를 응시했다. 해인이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줄곧 보고 있던 화로 안의 불꽃은 여전히 작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말은 어차피 내가 길들이려던 녀석이었으니, 내 얼굴도 아직 외우고는 있을 거야.”
아킬레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말에 해인이 아킬레우스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대가 주인이 되어준다고 하면 그 녀석도 좀 온순해질 테니, 그때부터 내게도 익숙해지도록 마저 훈련시키는 건 어떨까. 그럼 그대가 떠나게 되더라도 내가 거둘 수 있을 거고, 하루아침에 주인 잃은 처지가 되진 않을 텐데.”
나름의 절충안이었다. 말뜻을 이해한 해인은 한참 침묵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진 탓이다.
“……싫다니까요.”
침묵 끝에 튀어나온 중얼거림에서는 힘이 빠져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다시금 손을 뻗어 이번에는 해인의 눈가를 쓸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이미 그대를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눈가에서 눈꺼풀 위로 올라간 손이 조심스럽게 그 위를 쓸어내려 눈을 감겼다. 그로 끝내지 않고, 아킬레우스는 손으로 해인의 눈 위를 가볍게 덮었다. 손바닥 위로 속눈썹의 잔 떨림이 느껴졌다. 아킬레우스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떠난다 하더라도……. 그게 언제일지는 정확히 모르는 마당에, 지내는 동안 마음에 든 모든 것을 밀어내겠다고 결심하며 지내는 건 너무 힘든 일일 텐데. 안 그래?”
작게 묻는 목소리가 어둠에 스며들듯 흩어졌다.
눈을 감게 만든 건 타의였지만 굳이 애써서 거부하지 않았던 만큼, 눈이 감기고 시야가 어두워지자 안온한 수면이 찾아들었다.
직전에 들은 속삭임이 귓가에 남은 가운데, 해인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깊이 잠들었다.
***
해인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변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잠들어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머릿속이 맑았다. 몸 역시 피로하지 않아 정신을 차리는 건 금방이었다. 일어나 앉은 해인은 무심결에 막사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본인 혼자뿐이다. 아킬레우스는 이미 출전한 지 오래인 듯했다.
막사 안은 고요했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달리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해인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전날 밤의 일이었으니 몇 시간은 족히 지났을 텐데도, 눈 위로 덮였던 손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다. 괜히 손을 들어 눈가를 더듬어 보며 해인은 그 체온과 함께 들었던 목소리를 상기했다.
지내는 동안 마음에 든 모든 것을 밀어내겠다고 결심하며 지내는 건 너무 힘든 일일 텐데.
……정말로 거의 반쯤 잠들어 있을 때였기에, 눈 위에 놓여 있던 손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이 말을 들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말의 내용을 몇 번 곱씹어 보던 해인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렇겠지…….”
그녀와 생각이 다를 뿐, 아킬레우스의 말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잘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히 그 말에 한정된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적용해도 문제가 없는 문장이어서인지 좀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게 어려웠다.
“그 말을 거둔다 해도, 언젠가는 당신 역시 죽을 텐데…….”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한 해인은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기분이 가라앉아 미간을 좁혔다. 항상 생각으로만 떠올렸을 뿐인 아킬레우스의 죽음이다. 그 사실을 말로 꺼내 본 건 처음이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었고, 당연히 그래야 했지만, 오히려 다수의 몫까지 홀로 우울해지는 것 같아 해인은 다시금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게 없네.”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해인은 칼리에가 조심스럽게 막사의 천을 걷고 해인이 깨어났는지 확인하러 올 때까지 침묵하며 허공을 바라봤다.
칼리에가 가져온 물로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해인은 입을 여는 대신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국 아킬레우스와 해인의 차이점은 현재와 미래 중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보고 있느냐였다. 어느 한쪽이 맞고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타인의 의견을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는 고민해 볼 만 했다.
그리고 전날과 같이 해가 졌을 때쯤, 해인은 마찬가지로 전날과 같이 무사하게 돌아온 아킬레우스와 마주했다.
이번에는 결코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던 파트로클로스는 아무렇게나 핑계를 대고는 저 멀리 도망쳤다. 그 뒷모습을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바라보던 해인은 다시 아킬레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 뒤에도 머뭇거리는 해인을 보고 아킬레우스가 운을 뗐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희미하게 미소 띤 얼굴이었다. 해인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 말의 이름을 생각해 볼까 해서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말 한 마리 정도는 해인이 떠나면 아킬레우스가 약속대로 거둘 수도 있을 것이고, 만약 불가피하게 그럴 수 없다면 포세이돈에게 맡겨도 될 것 같았다. 포세이돈은 말들의 신이며 그 말은 충분히 좋은 말이었으니, 어느 쪽에 있어서도 실례될 것은 없을 것이다.
해인의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말뜻을 이해하고는 조금 더 짙게 웃었다.
“그래, 좋은 걸로 지어 줘.”
어쩌면 받겠다고 한 사람보다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더 즐거워하는 모양새였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해인은 문득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잠겨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킬레우스의 등 뒤로,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