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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53)화 (53/149)

상황을 깨달은 파트로클로스는 잠시 아찔해졌다. 그의 기준에서는 주겠다는 선물을 면전에서 거절한다는 것부터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필요 없는 것을 떠넘기는 것도 아니고, 그 말은 누가 보더라도 제법 가치 있는 녀석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아는 한 아킬레우스는 살아오며 그 누구에게도 거절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킬레우스의 눈치부터 살폈다. 한 번도 거절당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호의를 거절당했을 때 보일 수 있는 예상 반응들 몇 가지가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탓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떠올린 수많은 예상 반응 중 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흠.”

그는 다만 무언가 생각하는 낯으로 짧게 침음하더니, 이윽고 해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하는 수 없지만.”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긍하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역시 파트로클로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대사였다.

화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저 다행스럽게 여길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저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서 왠지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가 홀로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당사자인 해인은 말없이 시선을 옆으로 비껴 피할 뿐이었다.

‘뭐지? 아까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잖아.’

분명 막 돌아왔을 때만 해도 무언가 진전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어째서 이토록 갑작스럽게 싸늘해진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혼란함에 둘을 번갈아 보던 파트로클로스는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괜히 아까 전 부서졌던 점토판을 탓하며 이제는 푸른 보랏빛으로 덮여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마 시선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딱 한 가지만을 바랐다.

아무래도 좋으니 당장 여기 두 사람의 주변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

어떤 큰일이 있어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똑같이 흐르는 만큼, 때가 되면 날은 결국 저물게 되어 있다. 그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트로클로스가 그의 바람대로 무사히 자신의 막사에 돌아가고, 해인과 아킬레우스 역시 마찬가지로 막사 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막사 내부에는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화로의 불이 고요하게 타오르고, 바깥에서 아주 어렴풋하게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속에서 해인은 상상 이상의 어색함을 느끼며 침착하게 테이블 끝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만 어색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해인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킬레우스에게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으로부터 제법 먼 거리를 두고 앉아 조용히 검을 손질하고 있었는데, 일단 가까운 곳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결국 사방이 막힌 공간 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같은 막사를 사용한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으니 그것만으로 불편할 시기는 지난 듯싶었으나, 이번에는 정말 해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가 해인에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가 불과 하루 전인 탓이다.

게다가 해인 역시 그 고백에 흔들렸음을, 스스로 부정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상대의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는 이유는 아주 많았다. 그런 만큼 어떻게든 거리를 둬야 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몇 시간 전 그가 돌아왔을 때는 무사한 것을 봐야겠다는 합리적이지 못한 충동이 마음속을 지배했을 만큼 상황은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거기에 더해 해인은 방금 아킬레우스의 면전에서 주겠다는 선물을 거절하기까지 한 바였다. 다행히 아킬레우스는 그 일로 별달리 마음 상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해인은 그의 표정이라도 조금 더 자세히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곁눈질만으로는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아니, 물론 신경을 안 쓰면 되겠지만,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편함의 크기도 비례하듯 커졌다. 아킬레우스는 계속 검에 집중하고 있으니 시선이 마주칠 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굳이 애써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해인은 마침내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들어 그가 있는 방향으로 도르르 눈을 굴렸다. 그러나 해인에게는 불행하게도, 검 손질을 막 끝낸 아킬레우스가 바로 그 순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들은 일부러 그러기도 어려울 만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결코 이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눈을 피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당황스러움이 컸던 덕분인지 거의 반사적인 반응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물론 이유야 어쨌든 해인의 그 행동은 너무 티가 났다.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는 반응에 아킬레우스는 검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눈길을 피하자마자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이 과했음을 깨닫고 있었던 해인은, 상대가 보이는 반응에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하…….”

웃음소리는 이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아킬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불편한가? 하지만 오늘마저 자리를 피해 줄 수는 없겠는데.”

그는 자신이 해인에게 있어 불편함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다만 알고서도 아랑곳하지 않을 뿐이다.

해인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는 아킬레우스가 어디에 머물렀기에 막사로 돌아오지 않았는지가 궁금해진 탓이었다. 어제의 상황부터가 사실상 주객전도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미안한 마음도 조금 있었다. 해인은 머뭇거리며 다시 시선을 돌려 아킬레우스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어디서 쉬셨는데요?”

“파트로클로스의 막사를 좀 빌렸지. 하지만 이틀 연속으로 그랬다가는 그에게 미안하니까.”

“그렇죠…….”

해인은 말끝을 흐리며 파트로클로스를 떠올렸다. 이제는 해인도 그가 아킬레우스의 가장 편하게 여기는 부관이라는 이유로 여러 면에서 고생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당장 방금 전만 해도 그랬다. 해인이 아킬레우스의 말을 거절하는 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파트로클로스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눈치 보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이 이상의 주객전도 상황은 예의도 아닌 만큼 해인은 뒤늦게나마 태연함을 가장했다.

“저는 불편하지 않으니까, 제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말하면서도 해인은 자신의 말이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고 느꼈다. 과연 아킬레우스 역시 해인의 말을 그리 믿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해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진심으로 믿는 것은 아니더라도, 일단 겉으로나마 믿어 주는 척은 하겠다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해인은 그런 아킬레우스의 행동에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자신이 티 나게 눈을 피했던 순간부터 머릿속을 들켰던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저렇게 믿는 척이라도 해 주는 게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 속에서 아킬레우스는 내려놓은 검 옆의 방패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대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보다시피 할 일이 남았거든.”

“……네.”

본인의 말대로 아킬레우스는 다시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원전의 청동제 무기 관리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던 해인은 별 의미 없이 그의 행동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눈을 돌렸다.

방금 전의 일로 인해 어색함은 뜻밖에도 제법 완화되어 있었다. 일단 아킬레우스의 태도가 정말로 평소와 다를 바 없어서, 진정으로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긴장으로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도 그제야 내려앉았다. 해인은 작게 타오르는 화로의 불꽃을 가만히 응시하다, 조금씩 무료한 평화 속에 침잠했다.

그리고 해인이 불과 몇 시간 전 칼리에와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테이블에 엎드려 반쯤 잠들었을 때, 아킬레우스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날이 서 있는 무기는 닦을 때 집중하지 않으면 부상을 입을 수도 있기에 신경을 기울여야 했지만, 지금처럼 날이 없는 무구는 사실 그렇게까지 깊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겉으로는 집중하고 있던 것 같아도 실제로는 시선으로 해인이 무엇을 하는지 간혹 살피고 있던 그는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고 방패를 내려 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 없이 해인에게 가까이 다가선 아킬레우스는 이내 테이블에 조심히 손을 짚고 몸을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해인.”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 작게 이름을 불러 본 것이었지만, 깨지 않았다. 다만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다 다시 가라앉을 뿐이다. 어쨌든 한 번이나마 깨우려는 시도 비슷한 것은 했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서, 그는 더 이상 입을 여는 대신 팔을 뻗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무릎 밑으로 손을 넣고 등을 받쳐 들어 해인을 품에 안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안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깨지 않던 해인은 몸이 침대 위로 내려지자 그제야 흠칫 눈을 떴다.

“다시 자. 앉아서 불편하게 자기에 옮긴 거야.”

아킬레우스는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말하며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그는 팔 닿는 곳에 위치한 모포를 끌어 올려 덮어 주기까지 했다. 마주한 상대의 푸른 눈 속에 잠기운이 선연해서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았던 탓이었다.

그의 짐작대로 해인은 무어라고 답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대로 눈이 느리게 몇 번 깜빡여지다 다시 닫힌다. 그 광경을 보며 아킬레우스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사이 정말로 조금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그저 잠결인 탓일까.’

지금처럼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해인은 얼마 전과 같이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과연 두 가지의 가능성 중 어느 쪽일지 궁금해졌지만, 당장 답을 구할 수는 없는 의문이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한 채 침대 맡에 그대로 앉아 해인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불현듯 방금 전의 의문과는 별개인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사실 그건 몇 시간 전부터 그가 조금씩 떠올리던 고민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고민의 답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함께 생각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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