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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52)화 (52/149)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더 아킬레우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해인과 아킬레우스가 마침내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정면으로 맞닥트린 것을 본 파트로클로스와 두 명의 병사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재빠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물러선 곳에서 서로가 똑같이 행동했음을 깨달은 셋은 조용히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부지휘관으로서 물러나도 좋다고 대신 허락하겠네.”

파트로클로스가 속삭이듯 둘에게 말을 건넸다. 내일도 해인을 호위해야 했기에 그녀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려 했던 리노스와 텔라몬은 지금이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란히 동의했다. 파트로클로스는 한마디 더 속삭임을 덧붙였다.

“가서 쉬셔도 됩니다.”

지위는 파트로클로스가 더 높지만,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어른들이기에 그는 사석에서 종종 그들에게 존대를 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리노스와 텔라몬은 존대를 쓰지 말라며 만류하지만, 동시에 옛 생각이 난다는 듯 내심으로 흐뭇해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만류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리노스와 텔라몬은 다만 파트로클로스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들을 비롯한 병사들이 사용하는 막사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사라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파트로클로스는 이내 눈을 돌려 막사 방향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아킬레우스와 마주하고 있는 해인의 등 뒤, 막사 바깥으로 나와 머뭇거리며 서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본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주변의 눈치를 보던 칼리에는 자신을 보는 시선을 금세 알아차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파트로클로스는 굳이 지체할 것 없이 손짓으로 그녀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작게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네가 오늘 아가씨의 시중을 들었다지.”

“네, 네.”

칼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파트로클로스처럼 속삭이듯 답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흠, 그래.”

눈으로만 보더라도 역시 별것 없이 평범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조사해 보라고 한 이상 따라야 하는 것은 변치 않았다. 파트로클로스는 힐끗 해인과 아킬레우스를 보라는 듯 눈짓한 뒤 말했다.

“보다시피 방해할 수 없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될 것 같다.”

“아, 알겠습니다.”

파트로클로스와는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그의 태도나 옷차림 등으로 아킬레우스와 가까운 사람인 것을 눈치챈 칼리에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답했다. 파트로클로스에게도 자신보다 훨씬 약한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기에 그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파트로클로스가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있던 사이, 해인은 말없이 아킬레우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긴장감이 사라지고 그가 멀쩡한 것을 확실히 인지하자 순간의 충동으로 빠르게 뛰던 맥박도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다시 이성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해인은 방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속으로 탄식했다. 정말 말 그대로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에 차오르는 안도감을 부정하지도 못했다.

“……정말로 무사하시네요.”

얼마간 이어지던 침묵 끝에 해인이 중얼거리듯 먼저 입을 열었다. 해인이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별다른 말 없이 그 시선을 받아 내면서 함께 그녀를 마주 보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그제야 입꼬리를 당기며 웃어 보였다.

“그래, 보다시피.”

사실 막사에서 갑작스레 뛰쳐나온 해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그는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분이 좋았다.

전투를 마치고 진영으로 귀환하면 언제나 피를 보았을 때의 불유쾌한 고양감과 부하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허탈함이 그와 동행하고는 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걱정이 담긴 푸른 눈을 마주하고, 그 눈동자가 서서히 안도감으로 차오르는 것을 목격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상대의 안도를 확인한 순간 전쟁이 이어지던 십 년간 거의 항상 느껴 오던 기분 나쁜 감각들은 흩어지고, 대신 충족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결국 하루 내내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을 해인에 대한 미안함 역시 함께 따라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그 감각이 기꺼웠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원한다면 직접 확인해 봐도 돼.”

“……그건 됐어요.”

누가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킬레우스를 빤히 올려다보던 해인은 이내 눈을 내리뜨고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정말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아킬레우스를 마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든 탓이었다.

‘……이런 거 정말 싫은데.’

방금까지 느꼈던 안도감이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알고 있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혼자 힘으로 막을 수도 없는 지금의 상황이 아득했다. 현대에서는 느낄 일 없었던 무거운 감정들이 새삼스레 버거워서, 해인은 눈을 아래로 뜬 채 바닥을 잠시 응시했다.

“해인?”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아킬레우스는 반걸음 더 거리를 좁혔다. 보통 그들이 유지하고는 하던 거리보다 더 가까웠으나, 해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손을 뻗어 해인의 뺨을 감싸 올리려 했다. 상대의 표정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해가 끼어들고 말았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닥에 떨어져 뭉개지는 듯, 둔탁한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해인과 아킬레우스는 반사적으로 나란히 그쪽을 돌아보고 말았다.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다소 이질적인 소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위로 사람 두 명분의 숨 들이켜는 소리까지 함께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 끝에 있는 건 파트로클로스와 낯선 얼굴의 병사 한 명이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떨어지기 전까지 점토판이었을 물건의 잔해가 부서지고 뭉개져 구르고 있었다. 병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고 파트로클로스는 할 말을 잃은 듯 바닥의 잔해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이건…….”

잠시 후 고개를 든 파트로클로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할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듯 말끝을 흐리며 눈을 굴렸다.

이건 그로서도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와 해인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도 이대로 자리를 피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상관의 허락이 없는 이상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알아서 사라져 주는 것을 아킬레우스도 고마워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직전 방해가 들어왔다. 지휘관에게 전달해야 할 보고 사항들이 적힌 점토판을 한 아름 짊어진 병사였다. 그 병사는 상황을 보더니 재빨리 멈춰 선 채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얼른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파트로클로스 님?”

“쉿, 조용히. 내게 주고 가 봐. 내가 나중에 지휘관께 넘길 테니까.”

“감사합니다……!”

속삭이듯 대화한 둘은 얼른 서로 간의 용무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 서둘렀기로서니, 설마 그 과정에서 맨 위에 있던 점토판 두어 개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질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그러니까.”

둘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어떻게든 방해하지 않고자 했던 것이 최악의 결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파트로클로스는 결국 이 상황을 설명하기는 포기하고 짧게 사과했다.

“미안, 아킬레우스. 아가씨께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바쁘게 눈치를 보던 곁의 병사도 급히 외쳤다.

“죄송합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해인은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반쯤은 한숨과도 같은 웃음이었지만, 직전까지 가라앉던 기분은 어쨌거나 환기가 됐다. 어이없이 그들을 보던 아킬레우스는 다시 고개를 든 해인이 웃는 것을 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낯을 했다.

“그건 내가 지금 봐야 하나?”

파트로클로스가 허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더라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지금 처리해 줘.”

“……가져와 봐.”

아킬레우스는 병사를 돌아보며 덧붙여 명령했다.

“못 읽게 된 건 내일 아침까지 같은 내용을 새로 가져오도록. 가 봐도 좋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탈하게 자리를 뜰 수 있음에 감사하며 병사는 도망치듯 그 장소를 벗어났다. 자신도 모르게 병사를 부럽다고 생각한 파트로클로스는 한숨과 함께 해인과 아킬레우스가 서 있는 막사 앞으로 향했다. 아킬레우스가 멀쩡한 점토판들을 넘겨받았고,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을 돌아보며 머쓱한 얼굴로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정말로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서두르다 보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 실수까지 하고는 하죠.”

“네, 그럴 수 있죠.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고, 파트로클로스는 이내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우연히 아가씨께서 말을 길들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음, 길들이지는 않았어요.”

해인은 약간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예, 엄밀히 말하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녀석은 아무도 길들이지 못한 녀석이었으니,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얌전해진 이상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무릇 처음 단 한 번의 인정이 중요한 법이니까요.”

“그건…….”

길게 돌아온 대답에 약간 당황한 해인이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떠나려 하자 시무룩해지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사실 떠나면서도 그 말이 그처럼 갑작스레 기죽은 기색을 보이는 이유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는데, 만약 파트로클로스의 말대로 해인을 자신을 길들인 사람이라고 인식했다는 이유라면 조금 곤란했다.

해인이 복잡한 표정을 짓자, 그것을 본 파트로클로스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혹시 다친 사람이 나오기 전 빨리 나섰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자책하십니까?”

“네?”

낮 중에 그런 생각을 분명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방금은 그런 자책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당황한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나 그 반응에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그는 재빨리 위로를 덧붙였다.

“하지만 그 하인은 오히려 이만해서 끝난 게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아가씨께서 계속 무거운 마음을 갖고 있기를 바라지도 않더군요.”

해인은 차마 그의 착각을 정정해 줄 수 없어 어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런가요. 고마운 일이네요…….”

그때쯤 점토판 위의 보고 사항들을 모두 확인한 아킬레우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해인.”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인장이 찍힌 점토판들을 다시 파트로클로스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그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어떤……?”

의아한 얼굴로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길들이지 못 했던 녀석을 그대가 다룰 수 있다는 게 오늘 일로 증명되었으니, 그대가 그 말의 주인이 되어주는 건 어때?”

아주 여상한 어투의 물음이었다. 제안 같지만 사실상 선물로 주겠다는 말과 다름없었기에 파트로클로스는 순간 약간의 기대와 함께 둘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이대로 해인이 저 선물을 수락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면 지금보다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말을 들은 해인은 순간 멈칫했고, 수락하는 대신 제법 오랫동안 망설이는 표정을 했다. 그 탓에 침묵이 자연스럽지 않을 만큼 길어져 파트로클로스는 문득 불길해졌다.

잠시 후, 그의 불길함은 적중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해인이 고민 끝에 아킬레우스의 제안을 거절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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