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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51)화 (5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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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막사 바깥이 돌아온 병사들로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던 그때, 해인은 막사 안에서 졸고 있었다.

현대와는 달리 시간을 보낼 유흥거리도 없는 환경에서, 바깥과 소리가 한 겹 차단된 막사 안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을 감고 있게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전날 밤부터 내내 고민하느라 뜬눈으로 새벽을 보냈고, 낮에도 마냥 평화롭게 앉아 있기만 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쌓인 피로가 상당하다 보니 사실상 이미 조는 것보다는 잠든 것에 더 가까웠다. 그 탓에 칼리에는 테이블에 불편하게 엎드려 눈을 감고 있는 해인의 곁을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깨워도 되나? 그런 걸로 뭐라 할 분은 아니겠지만…….’

몇 시간 전 막사로 돌아와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해인은 화로 근처의 의자에 내도록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다소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흐를수록 눈을 깜빡거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칼리에는 해인에게 몇 번 정도 편하게 누워서 주무시는 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지만, 해인은 딱히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입으로만 안 잔다고 중얼거리며 의자에 앉아 화로를 응시하다 눈을 깜빡거리길 반복했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테이블에 걸쳐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녀를 들어서 옮길 수도 없는 칼리에로서는 난처할 따름이었다.

‘……뭐, 아무래도 지휘관을 걱정해서 그러셨던 거겠지. 오늘부터 또 싸우러 간다고 했으니까.’

칼리에는 불현듯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지휘관의 부인이냐는 물음에 당황하던 반응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부부는 아닌 게 확실했다. 하지만 특별한 관계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듯했다. 결혼은 안 했더라도, 아마 결혼 약속까지는 했을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한 칼리에는 묘한 얼굴을 했다.

‘이 아가씨랑은 안 어울리는데.’

칼리에는 포로로 잡혀 끌려오기 전 집 안에 숨어 있을 때, 미처 제대로 닫지 못 해 벌어져 있던 창문 틈으로 아킬레우스가 성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한 바 있었다. 단번에 왕궁으로 진격한 그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온몸에 피를 적신 채로 인상을 쓰며 걸어 나왔고, 그 광경을 본의 아니게 목격했던 순간부터 아킬레우스에 대한 인상은 최악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그가 어머니인 여신을 닮아 객관적으로 훌륭한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칼리에가 살아오던 고향을 짓밟은 군대의 살벌한 지휘관일 뿐이었다. 두려움에 떨며 집의 구석에 숨어 신을 찾다가, 기어코 문을 부수며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끌려가 포로가 된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칼리에가 해인에게 일종의 동경을 품게 된 건, 해인의 첫인상이 아킬레우스에 대한 인상과 정반대되는 느낌을 주어서이기도 했다.

온통 핏빛이었던 거대한 남자와 달리 해인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고요했고 시선은 서늘할 만큼 푸른 바다의 색이었다. 지휘관의 부인이냐고 물어봤던 것 역시, 되새겨 보면 칼리에의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이 너무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영 내에 분분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소문 탓에, 칼리에는 막연히 해인을 아킬레우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처음 시중을 들러 갈 때는 다시없을 긴장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정면으로 해인을 마주하게 된 순간, 자신의 상상과 실제는 완전히 달랐음을 눈으로 확인받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 첫인상은 그저 첫인상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해인은 오늘 하루 내내 온화한 태도를 보여 주었으니, 칼리에는 이제 무의식적으로는 거의 그들을 별개의 생명체처럼 인식하게 된 채였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칼리에는 잠시 입을 삐죽였다. 어쨌든 그녀는 운명 앞에 순응하는 방법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중얼거림에도 깨지 않는 해인을 잠시 바라보던 칼리에는, 뒤이어 막사의 문 역할을 대신해 두껍게 내려진 천을 곁눈질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바깥의 웅성거림이 막사의 벽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군대가 돌아온 모양이다.

자신의 사감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관계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해인은 종일 지휘관을 걱정하고 있었을 테니 그만 깨워서 귀환 사실을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해인에게는 기쁜 소식일 것이다.

해인을 동경하게 된 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동시에 칼리에에게는 해인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도 따로 있었다. 처음부터 난데없는 질문이나 던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착한 사람이라 그런지 자신을 예쁘게 봐주는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니 더 확실히 해야 했다.

‘아예 이분의 곁에 앞으로도 계속 붙어 있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 진영 내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불행한 일으로부터도 나름 안전할 것 같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안전을 잘 지키고 있다 보면, 언젠가 무사히 풀려나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짐작대로 칼리에는 나름의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는 소식을 들으셨을까.’

바로 그녀의 하나뿐인 가족인 아버지였다.

칼리에의 아버지는 운 좋게도 포로로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도시에 없었던 덕분이다. 그는 먼 도시에 사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집을 잠시 떠나 있었는데, 아카이아 연합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에 딸과 도망쳐 있을 피난처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여러모로 운이 나빠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나머지 칼리에를 데려가기 전 연합군이 먼저 팀블레에 들이닥쳤을 뿐이다.

칼리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고향이 무너지고 하나뿐인 자식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버지는 친척에게 부탁해서라도 몸값을 만들어 구해 줄 가능성이 컸다. 마침 만나러 간 친척은 부자였으니 한 명의 몸값 정도는 힘들지 않을 것이다.

“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복잡한 생각을 재차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밀어낸 뒤, 칼리에는 조심스럽게 해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 보세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해인을 보며 고민하던 칼리에는 슬쩍 손을 뻗어 해인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흔들면서도 고작 이 정도로 깰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타인의 접촉은 소리보다 유효했던 듯 해인은 이내 눈을 떴다.

칼리에는 잠기운이 서려 다소 몽롱한 기색을 띤 푸른색 눈동자를 보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해인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테이블 위의 등잔불로부터 퍼져 나온 불빛이 얼굴을 비추며, 뺨 위로 긴 속눈썹의 그림자를 그렸다.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칼리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상황을 깨닫고 머쓱한 듯 미소 지어 보였다.

“내가……. 안 잔다고 해 놓고 결국 잤구나.”

“피곤하셨나 봐요. 오늘 큰일도 있었잖아요.”

“큰일?”

“그 검은 말이요. 아가씨께서 진정시킨 이후로 떠날 때까지 아가씨를 시무룩하게 봤었죠.”

“아, 그 말…….”

칼리에의 말을 듣자 해인은 어렵지 않게 말의 기죽은 눈동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렸다. 아까까지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던 탓인지 몸이 다소 뻐근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올 것이다. 허리를 곧게 펴고 자세를 고치며 해인은 멍하니 생각했다.

‘몸이 피곤하지 않다고 해도 밤을 새우지는 말아야겠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부터 조금씩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는데, 조금이나마 수면을 취하고 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현대에서 종종 밤을 새운 이후에 느낄 수 있던 불유쾌한 감각과 아주 유사했다. 고정시킨 것은 몸의 시간이지 뇌가 아닌 만큼, 그쪽의 작용은 결국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비로소 깨달으며 해인은 칼리에를 돌아보았다.

“깨워 줘서 고마워.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깨운 거니?”

“앗, 그게. 일이 생긴 게 아니라……. 바깥이 소란스러워서요. 군대가 돌아온 것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직후, 해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

말을 이해하기까지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곧 그녀는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아킬레우스의 귀환과도 직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해인은 오늘의 전투에서 아킬레우스가 죽을 리 없음을 믿고 있었다. 아침에 느꼈던 그에 대한 걱정도, 당장 눈앞의 전투보다는 언젠가 닥쳐올 그의 운명에 대한 감정이었다.

오늘 아킬레우스는 아마도 무사히 돌아왔을 것이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음에도, 칼리에의 말을 이해한 순간 해인의 마음속을 채운 것은 비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충동이었다.

‘……그래도 이번만 확인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굳이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왔음에도 멀쩡한 것을 직접 눈으로 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른 반응에 칼리에가 머뭇거리며 해인을 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테이블 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해인은, 다음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막사의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에서부터 문까지 몇 걸음을 옮기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것과 거의 동시에, 해인은 자신이 지금 막사 바깥으로 나가 본다고 해서 곧장 아킬레우스를 볼 수 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다. 복잡한 진영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고,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막사에서 기다리는 편이 어쩌면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떠올랐다.

하지만 멈추기에는 이미 문 앞이었다. 해인은 반사적으로 눈앞을 막은 천을 걷었다.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막사 안쪽의 공기보다 훨씬 서늘한 저녁 바람이 뺨을 쓰다듬듯 불어왔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고, 분홍색과 주홍색이 짙은 푸른색과 섞이며 하늘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놀랍게도 직전까지 했던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단번에 없앨 수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해인?”

그러잖아도 막사 방향으로 오고 있었던 듯 아킬레우스는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서쪽 하늘을 등지고 있었다. 그 뒤로 파트로클로스나 리노스, 텔라몬 역시 함께 있었다. 그러나 해인은 미처 그들까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킬레우스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언제나 그랬듯 더 이상 눈을 돌리지 못한 탓이다.

해인은 미처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모래가 파도에 쓸려 나가듯 긴장감이 흩어졌다. 합리적이지 못한 찰나의 충동이었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가치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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