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50)화 (50/149)

***

해가 질 때쯤 연합군의 병사들은 저마다의 진영으로 귀환했다. 낮 동안 있었던 한차례의 소동만 제외하면 내내 고요했던 미르미돈족의 진영 역시 소란스러움을 되찾았다.

목책을 쌓는 도중 접근해 오는 적의 별동대를 격파하는 정도의 전투는 몇 번 벌어졌지만, 전투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개전 첫날인 만큼 연합군과 테베 양측 모두 상대의 정확한 전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이 최우선인 탓이었다.

사활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서로를 툭툭 치는 정도의 전투였기에 사망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말이 쉽지 사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부상자도 적었고, 있더라도 대부분 경상이어서 돌아온 병사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나름대로 밝았다.

그 덕분에, 진영에 남아 있던 하인들이나 몇몇 병사들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들에게 오늘 낮 그들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평소 마구간에서 일하던 하인 역시 평소 친하게 지내던 병사에게 낮 동안 있었던 일을 떠들고 있었다.

“말이 줄을 끊고 날뛰었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 오는 말에 하인은 얼른 수긍했다.

“예, 그 난폭한 흑마 말입니다. 덩치가 큰 만큼 힘도 좋아서 도무지 평범하게는 제압할 수 없는 녀석이요.”

“물론 알고 있지. 큰일이었군.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어떻게 잡아넣긴 한 모양인데? 아무도 안 다쳤나?”

“한 명이 작은 부상을 입어 치료 중입니다만, 워낙 경상이니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그럼?”

그들의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무렵, 마침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파트로클로스가 대화의 내용을 스치듯 듣고 잠시 멈춰 섰다. 난폭한 흑마라면 곧장 떠오르는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이기에는 아까운 말이어서 길들여 보려 애쓰고 있지만, 무려 아킬레우스조차 반이나마 겨우 길들인 게 전부인지라 그 말은 사실상 진영의 대표적인 골칫거리였다.

심지어 워낙 크고 힘이 좋아 이전에도 한번 줄을 끊고 뛰쳐나왔던 전적이 있는 말인 만큼, 또 날뛰었다면 그건 제법 큰 사고다. 그런데 진영의 분위기는 그런 사고가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평화로웠다. 게다가 부상자가 한 명뿐이고 심지어 경상이라니, 흥분한 말이 갑작스레 혼자 진정한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결과였다.

의아하게 눈을 껌뻑인 파트로클로스는 이내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뒤로 은근슬쩍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은밀하게 접근한 만큼 둘 모두 파트로클로스의 접근을 눈치채지는 못했고, 그에 힘입어 그는 입을 다문 채 둘의 대화를 조용히 엿듣기 시작했다.

“그 아가씨 있잖습니까? 왕자님의 막사에서 지내신다던.”

“아, 알지. 포세이돈 님의 따님이라고 하던 그분?”

“예, 그 아가씨께서 날뛰던 말을 단번에 진정시켜 주셨지 뭡니까!”

“뭐?”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병사와 함께 파트로클로스도 의문에 휩싸였다. 뜬금없이 해인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미간을 좁힌 그는, 이어진 말에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해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단번에 진정? 그분이?’

반신이니만큼 키가 제법 큰 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해 그녀는 별로 튼튼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험한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자랐을 것처럼 생겼을 뿐이다. 그런 파트로클로스의 생각처럼 병사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을 것처럼 생기지는 않으셨던데?”

“응? 언제 보셨습니까?”

“이틀 전엔가, 우연히 먼발치에서 잠깐.”

“……뭐 그렇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정말이라니까요.”

“뭘 어떻게 하셨는데?”

병사의 질문이 곧 파트로클로스가 하고 싶던 말이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진지한 낯으로 집중했다. 하인이 말을 이었다.

“힘으로 제압하신 건 아닙니다. 사실 그 말이 마구 날뛰다가 줄을 끊고 나와서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처럼 아가씨가 계시던 방향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들 놀라서 아가씨께는 피하라고 외치고, 말을 잡으러 뛰어가고 그랬죠. 그런데 정작 그 말이, 아가씨를 보더니 갑자기 날뛰던 걸 멈추고 자리에 우뚝 멈춰 선 겁니다.”

“……응?”

“정말로요. 그분께서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이 돌연 얌전해졌습니다.”

그 말에 파트로클로스의 머릿속으로 또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처음 아킬레우스가 해인을 데려왔던 날, 성격 까다로운 말이 해인에게 친근감을 표했던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뒤이어 크산토스와 발리오스가 초면인 해인에게 보이던 이유 없는 호의도 생각이 났다. 파트로클로스가 새삼스러움을 느끼는 사이 하인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알고 보니 원래 말들이 아가씨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오늘 낮처럼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화내는 말은 난생처음 보셔서, 그런 말까지 자신을 보고 얌전해질 줄은 예상을 못 하셨다고 했습니다.”

“저런.”

병사가 웃으며 납득했다.

“하긴 포세이돈 님께서 말들의 신이기도 하시니, 따님이신 그 아가씨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법도 하군. 정말로 반신이셨던 모양이네.”

“안 믿으셨습니까?”

“아니, 전혀 안 믿은 건 아니지만 뭐……. 아무튼 본 적이 없어서 예상을 못 하셨다는 것도 그럴 만하군. 어느 누가 포세이돈 님의 따님 안전에 난폭한 말을 데려다 놓겠나?”

“그렇지요. 어쨌든 그 아가씨께서 안 가려고 버티는 말을 마구간까지 끌고 가 주셔서 무사히 묶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빨리 나섰더라면 다치는 사람도 없었을 거라고 안타까워하시던데, 오히려 이만해서 끝난 게 다행인 일이라고 말씀드릴걸 그랬나 싶습니다.”

거기까지 듣고서 모든 전후 사정 파악을 완벽히 끝낸 파트로클로스는 빙그레 웃었다. 안도감 섞인 웃음이었다.

하인의 이야기는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날뛰는 말을 해인이 모종의 능력으로 진정시켰다’로 짧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이 가져다주는 안도감은 문장의 길이에 비할 바 없이 컸다. 어쩔 수 없었다. 만약 해인에게 그런 능력이 없어 그녀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위기의 시발점이 되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면 포세이돈 님이 어떻게 나오셨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군…….’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럴 일은 없었고, 심지어 사고조차 원만하게 해결됐다. 거듭 생각해 봐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이쯤에서 엿듣는 것을 그만두고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럼 내가 대신 말씀드리지.”

“응? 어?”

“파트로클로스 님!”

언제부터 뒤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던 윗사람의 등장에 병사와 하인 모두 허둥지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몸을 낮추려는 것을 만류하며 파트로클로스가 말했다.

“지나가다 우연히 이야기가 들렸는데,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갈 수 없는 내용이기에 잠시 좀 엿들었네. 미안하게 되었군.”

“아닙니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니, 큰 피해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가씨에게도 자네가 고마워하고 있다고 전해 드릴 테니 걱정 말게나.”

“예, 예!”

답을 들은 그는 두 사람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 돌아섰다. 유유히 자리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둘은 잠시 후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욕하거나 무례한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모르는 사이 윗사람이 뒤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한편 그대로 몸을 돌린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막사 방향으로 향했다. 어차피 당일의 전투 후의 피해 규모와 요새 건설 진행 정도 등의 사항을 정리한 것을 건네줘야 했으니, 그 김에 방금 들은 이야기도 전해 주고 해인의 안부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가 막사 근처에 도착했을 때, 아킬레우스는 이미 리노스와 텔라몬으로부터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리노스와 텔라몬은 호위 목적으로 하루 종일 해인의 곁에 있었으니, 어쩌다 그 말이 날뛰는 장소까지 가게 되었는지부터 보고가 가능했던 것이다.

침착하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끝낸 둘은 그다음으로 곧장 고개를 숙였다. 물론 마구간까지 가 보자고 했던 것은 해인이었고, 결론적으로는 무사히 해결되었으니 그들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해인이 그런 사고에 약간이나마 말려들었다는 부분에서부터 일부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탓이다.

“죄송합니다. 뜻밖에 아가씨께서 일을 해결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해결되기는 했지만, 정작 저희들은 맡겨 주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셈이니 큰 죄입니다.”

그들이 말을 시작했을 때부터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아킬레우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됐어.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을 테고, 자네들 말대로 결국 해결된 일이니까.”

“……감사합니다!”

리노스와 텔라몬이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는 사이, 몇 걸음 떨어져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상황을 살피던 파트로클로스는 그제야 그들의 지척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 흑마가 날뛴 이야기 했던 거 맞지?”

아킬레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연한 색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서늘하게까지 느껴지는 선명한 눈동자를 보며, 파트로클로스는 손에 들고 있던 보고 사항들이 새겨진 점토판을 아킬레우스에게 넘겼다.

“지금 진영에서 그 이야기가 제법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전시에는 좀처럼 재밌는 일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새로운 사건이 있으면 다들 난리지.”

“그래?”

“사실 나도 아까 하인 한 명의 이야기를 잠시 듣다가 온 참이거든. 마구간을 돌보는 하인 같던데 아가씨한테 감사하고 있더라. 안 가려고 버티는 거 직접 데려다 넣어 주기까지 하셨다고, 덕분에 무사히 묶어 둘 수 있었다면서 말이야.”

“흠.”

건네받은 점토판을 대강 훑어보며 아킬레우스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모든 말들의 순종을 받아 낸단 말이지.’

해인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놀라운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납득이 갔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 함께 탔던 말의 태도나, 크산토스와 발리오스가 내보이는 친근감 같은 것들로부터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무의식중에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문득 그 말을 해인에게 선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들여 보려 했지만, 결국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그 시도는 사실상 실패였다. 그리고 그 실패로부터 비롯된 사고를 해결해 준 사람이 해인인 만큼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일은 없었나?”

아킬레우스는 점토판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 리노스가 얼른 대답했다.

“예, 그 일 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돌아와서는 피곤한 기색이셨고, 그 이후로 막사 안에 줄곧 계셨습니다. 여종과 함께요.”

“여종?”

“산책을 권하며 시중들 사람으로 누구를 데려올지 여쭸더니, 아침에 시중을 들었던 어린 여종을 말씀하셔서 데려왔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아이가 어리다 보니 아가씨께서 신경이 쓰이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킬레우스나 파트로클로스 모두 그가 말하는 그 어린 여종이 누구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해인이 아침부터 신경 쓰는 기색이었으니 결국 데려와 함께 다녔다는 말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리노스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수색은 철저히 했습니다. 감춰 둔 무기도 없고, 평범한 아이가 맞았습니다. 달리 문제는 없었습니다.”

텔라몬이 근처에 있는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눈짓하며 덧붙였다.

“예, 게다가 그 아이도 아가씨께 적대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오히려 뭐라도 하고 싶어 하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파트로클로스는 피식 웃었다.

“아가씨께서 잘해 주셨나 보군.”

“일은 전혀 시키지 않으시고, 거의 동생처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포로로 잡혀 가족들이 몸값을 내주지 않는 이상 풀려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모시게 된 사람이 건넨 호의에 감복해 굳이 일을 하겠다며 나서는 것은 어리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파트로클로스가 중얼거렸다.

“어린아이들이 그런 면에서는 편할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다음 순간, 잠자코 있던 아킬레우스가 끼어들어 말했다.

“모르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내심 여유로운 것일지는.”

“……음. 그러면 조사해 봐?”

“대단한 건 없겠지만, 그래도 같은 도시 출신의 포로들 위주로 한번 물어나 봐.”

“그래, 뭐.”

파트로클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그의 말대로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