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해인은 작게 침음했다.
사실 말들이 그녀에게 아주 유순하게 구는 것은 늘 있어 온 일이다. 지중해의 신인 동시에 말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포세이돈의 피가 몸의 반을 차지하고 흐르기 때문이었다.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만 봐도 설명이 쉬웠다.
말들이 자신에게 착하게 구는 것을 하루 이틀 봐 온 것이 아닌 만큼, 해인 역시 자신이 말들에게서 적게는 친근감, 크게는 완벽한 복종까지도 아주 쉽게 얻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는 있었다.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만큼 말은 교통수단이 될 수도 없었으므로, 어딘가 크게 도움이 되거나 중요하게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있어서 특별히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가다 승마를 할 때는 나름대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해인에게 있어서는 딱 그 정도의 사소한 부분이었다.
……그랬기에, 지금의 상황은 상당히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화내는 말도 마주치는 걸로 진정시킬 수 있는 거였구나.’
현대에서는 방금 전처럼 화를 내는 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태생적 능력의 효용성 정도를 새롭게 갱신하는 기분이 아주 색달랐다. 자리에 멈춘 말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인은, 다음 순간 말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을 알아보았다.
“……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말도 자신이 왜 멈춘 건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서였다. 몸이 시키는 대로 멈췄다가 뒤늦게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황망한 심정은 가시고 그 대신 어이가 없어졌다.
“머, 멈췄어.”
“왜 갑자기……?”
해인과 말이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는 사이 침묵은 조금씩 옅어졌다. 급박한 상황이 가라앉음과 함께 주변으로는 긴장이 풀려 버린 이들로부터 비롯된 웅성거림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해인은 살짝 시선을 돌려 사방의 반응을 살폈다. 저마다 말이 멈춘 이유를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해인과 말 사이에 오갔던 소리 없는 찰나의 소통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남들이 보기에 해인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해인은 직전까지만 해도 어린 여종을 챙기며 말의 예상 경로로부터 몸을 피하려 했을 뿐이었고, 실제로 그 순간까지는 그게 전부였다.
심지어 해인은 말이 움직임을 멈춘 직후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멍하니 바라보기까지 했다. 그 행동의 이유야 남들과 달랐지만, 겉보기에는 단순히 말의 행동에 놀란 것으로만 비쳐질 뿐이었다.
“아가씨, 저 녀석이 멈추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다른 곳으로 천천히 피하십시오.”
여전히 해인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리노스가 침착하게 속삭였다. 말을 맺은 뒤 그는 아예 몸을 완전히 돌려 해인을 등지고 흑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하인들에게 들리도록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얼른 다시 집어넣어! 언제 다시 날뛸지 모르니 지금 움직여야지.”
직전까지만 해도 앞뒤 안 가리고 날뛰던 말이었고, 심지어 하인 한 명은 이미 발에 차여 부상까지 입었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얌전해진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말에 하인들 역시 말이 갑작스레 멈춘 이유 따위를 궁금해할 때는 아님을 새삼스레 자각했다.
“예, 예!”
“아무나 끈 좀 가져와!”
그러나 상황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얌전히 서 있었던 것이 언제냐는 듯, 말은 하인들 몇몇이 다가와 손을 뻗자마자 다시 화를 내며 발을 굴렀다. 이미 한 명의 부상자가 생긴 이후였던 만큼, 말에게 접근하면서도 겁을 먹고 있던 하인들은 재빨리 말에게서 멀리 떨어져 눈치를 봤다.
그러는 사이 멀리 마구간 근처에 있던 텔라몬도 빠른 걸음으로 해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리노스를 힐끗 보고는 해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권유했다.
“아가씨, 저쪽으로 빠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해인은 대답 대신 머뭇거리며 말을 힐끗 바라봤다. 주변으로는 말을 다시 마구간에 넣으려는 하인들이 말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말은 보란 듯이 신경질을 내며 고개를 도리질 치고 있다.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은 광경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잠깐만요.”
“예?”
할 수 있음에도 못 하는 척하며 자리를 피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해인이 나서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주목이야 좀 받겠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망설이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이었다.
“너는 여기 잠시 있어.”
“네?”
“혹시 모르니까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해인은 칼리에를 돌아보며 작게 일러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뒤, 텔라몬이 권한 방향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노스의 곁을 스쳐 지나 말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모습에 잠시 굳어 있던 텔라몬과 리노스가 다급히 해인을 쫓아왔다.
“아가씨! 왜 그쪽으로 가십니까? 위험합니다!”
차마 해인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하고 리노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해인은 다소 멋쩍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단 말입니까? 다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아마 저한테는 얌전하게 굴 거예요.”
“예?”
텔라몬과 리노스가 나란히 당황스러운 낯을 했다. 그러는 중에도 해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은 별수 없이 해인을 바짝 쫓아갔다. 앞장선 해인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 태도였던 탓에 근처에 몰려 있던 하인들은 얼떨결에 자리를 비켜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 덕분에 해인은 이내 말의 지척에 올 수 있었다.
해인이 가까이 다가서자 그것을 발견한 말의 기세가 직전보다 한풀 꺾였다. 그 모습에 근처에 있던 이들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말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사람들 속에서, 해인은 말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하인들에게 말했다.
“다들 조금만 물러나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말이 순식간에 덜 난폭하게 구는 것을 바로 근처에서 본 탓에 그들은 토 달지 않고 얼른 거리를 벌렸다. 해인의 등 뒤에 서 있던 리노스와 텔라몬 역시 놀란 눈을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쏠리는 주목에 약간 난처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해인은 조심스럽게 말의 얼굴로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말은 조용히 해인을 바라보다 천천히 내밀어진 손에 이마를 기댔다.
해인의 행동에 주목하면서도 하나같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듯, 말의 반응에 주변에서 한꺼번에 작은 탄성이나 숨 들이켜는 소리 따위가 터져 나왔다. 도저히 못 들은 척하기 어려운 반응들에 해인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가씨, 이건…….”
뒤에서 지켜보던 리노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인이 그를 돌아보며 해명했다.
“그게, 저도 아까까지는 가능할 줄 몰랐어요.”
“예? 그럼…….”
“사실 저는 원래 말들로부터 쉽게 순종을 얻어 내요. 다만 별로 쓸 일이 없는 능력이다 보니, 그냥 그 정도가 전부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게다가 이렇게 화내는 말은 난생처음 본 거라서…….”
해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얌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아까 저를 보고 멈췄잖아요. 그걸 보고 제가 진정시킬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게 아가씨를 보고 그렇게 된 거였습니까?”
“네, 눈이 마주쳤거든요.”
설명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근처에서 그 대화를 들은 사람들은 새삼스레 그들이 보고 있는 여자가 반신이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들은 모두 얼마 전 ‘진영에 머무르는 아가씨께서는 포세이돈 님이 아끼는 따님이시니 무례하게 굴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해인의 눈 색이나 머리카락 색 등을 보며, 저 사람이 바로 그 바다 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대부분 눈치채기도 했다.
하지만 반신이라고 하면 항상 아킬레우스나 에우도로스 같은 체격 좋은 전사들만 봐 온 탓에, 해인 역시 반신이라는 것을 제대로 실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깨닫고 보니 비로소 상황이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지중해의 지배자인 동시에 말들의 신이기도 한 포세이돈의 자식이 말을 잘 다루는 건 별달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 가자.”
다수의 시선 속에서 해인은 작게 속삭이며 말을 마구간으로 끌고 가려 시도했다. 말은 조금 싫은 티를 냈지만, 이내 해인의 의도대로 마구간으로 터덜터덜 끌려가 주었다.
“어떤 걸로 묶으면 되나요?”
마구간으로 말을 밀어 넣은 뒤 해인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말에 원래부터 말을 돌보던 하인 몇몇이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
“저, 저희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니에요.”
별것 아닌 일로 감사 인사를 받으려니 머쓱해진 해인은 뒤로 슬쩍 물러난 뒤 근처에서 그들이 말을 다 묶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해인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만 말도 화를 안 내는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은 다시 묶인다는 사실이 몹시 못마땅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몸을 비틀거나 아까처럼 날뛰지는 않았다.
직전에 말이 줄을 끊어 냈던 것에서 얻은 교훈으로, 말을 묶은 줄의 매듭을 두 배 정도 더 단단하게 만든 하인들이 얼른 말의 곁에서 떨어져 나와 마구간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해인은 아까 전 말이 줄을 끊은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들려왔던 비명 소리를 문득 떠올렸다. 그녀는 하인들에게로 몇 걸음 다가가 입을 뗐다.
“저기.”
“예! 말씀하십시오.”
과하게 정중한 태도였다. 조금 부담스러워진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반걸음 정도 몸을 뒤로 물리며 물었다.
“아까 비명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서……. 혹시 누군가 다쳤었나요?”
“아, 한 명이 말의 뒷발에 맞아서 팔이 부러졌었습니다. 목숨에 지장은 없고, 치료를 위해 급히 옮겼습니다.”
“그랬군요.”
해인은 잠시 눈을 내리떴다. 말이 날뛰기 시작했을 때 조금 가까이 가 봤더라면 부상자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물론 해인도 말이 자신을 보자마자 뜬금없이 얌전해질 것이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유감스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제가 좀 빨리 나섰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아닙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약간의 틈도 없이 답이 돌아왔다. 아주 열렬한 태도였다. 해인은 멈칫하며 어색하게 답했다.
“아, 네…….”
그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마구간에 들어간 말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말을 힐끗 돌아본 해인은 어쨌거나 상황은 충분히 정리됐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리노스와 텔라몬을 돌아보며 넌지시 제안했다.
“……산책은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까 돌아갈까요?”
“예! 모시겠습니다.”
리노스가 재빨리 답했다. 텔라몬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서 있던 칼리에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칼리에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해인이 떠나려는 듯하자 방금까지만 해도 기가 살아 있던 말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금세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해인은 자리를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말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우연찮게 그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가씨?”
“……가요.”
갑작스레 시무룩해진 모습이 다소 어이없기는 했으나, 동시에 말 못 하는 짐승에게 건넬 법한 자연스러운 연민이 마음 한구석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언가 해 줄 만한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해인은 말의 시선을 애써 떨쳐 내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