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몰아쉬며 가까이 온 하인은 그제야 해인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급한 마음으로 달려왔던 데다가, 텔라몬과 리노스에게 가려져 뒤에 서 있던 해인과 칼리에는 미처 못 봤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텔라몬이 해인의 앞을 막아서서 하인의 시선을 가리고 물었다. 하인은 흠칫 놀라더니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게. 말이 갑자기 날뛰어서. 그런데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으니, 저희 같은 하인보다야 병사분들이 힘이 좋을 것 같아 근처에 누가 없는지 찾고 있었습니다.”
“말?”
“예, 그 난폭한 검은 말 있잖습니까?”
뒤에서 말을 듣고 있던 해인은 고개를 잠시 기울였다. 말이 대체 어떻게 날뛰기에 아무도 진정시키지 못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텔라몬과 리노스는 ‘그 난폭한 검은 말’이라는 말만으로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했다.
“큰일이로군.”
“확실히…….”
자신이 이해를 못 한 것과는 별개로, 해인은 둘의 반응에 이 일이 심각한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급해 보이는 하인을 힐끗 본 그녀는 조용히 의견을 제시했다.
“……큰일이라면 두 분 다 가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의 발언이었으므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리노스가 난처한 듯 만류했다.
“아가씨, 하지만 저희가 맡은 임무는 아가씨의 호위입니다. 떨어져 있을 수도 없고, 아가씨마저 함께 가시는 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저는 뒤에 서 있을게요. 도와 달라고 했는데 무시하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 말에 텔라몬과 리노스는 짧게 고민했다. 사실 그들의 최우선 임무가 해인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달려가 봤을 만큼 큰 문제이기는 했다.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도 무시하고 가는 것 역시 옳은 일은 아니었다.
하인의 초조한 얼굴을 힐끗 곁눈질한 해인이 짧게 재촉했다.
“어서요, 네?”
“……알겠습니다.”
결국 그들 일행은 하인의 인도에 따라 소란의 근원지인 마구간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구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소란스러움도 비례하듯 커졌다. 해인은 한곳에 모여 있는 하인 몇 명과, 그 너머 마구간에서 날뛰고 있는 검은 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말들은 다른 곳으로 대피시킨 듯 넓은 마구간에는 오직 그 말 한 마리만 남은 채였다.
해인 일행과 만난 하인 말고도 다른 이들 역시 진영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던 병사들을 찾아 데려온 것인지, 다른 방향에서 병사 몇몇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상황을 살핀 텔라몬이 해인을 돌아보고 허락을 구했다.
“아가씨, 제가 잠시 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계셔 주십시오. 리노스가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럴게요.”
해인은 선선히 답했다. 답을 듣자마자 그는 다급히 소란의 근원지로 뛰어갔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해인을 힐끗거리며 눈치를 보던 하인도 재빨리 그 뒤를 따라갔다.
“위험하겠는데요…….”
사람들 틈으로 끼어든 텔라몬을 보며 해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곁에 서 있던 리노스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아주 성질 나쁜 녀석입니다.”
그는 설명하는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저 녀석은 팀블레로 향하기 전에 있던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오게 된 말입니다. 멀리서 보셔도 상당히 크지 않습니까?”
“음, 네.”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청동기 시대였으니, 포세이돈의 전차를 끄는 엄선된 말이나 크산토스와 발리오스 같은 신의 피가 흐르는 말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말들은 현대만큼 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날뛰고 있는 말은 리노스의 말대로 제법 덩치가 컸다. 아무래도 그 때문에 사람들이 진정시키는 데 더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께서도 아시다시피 왕자님께서는 남들보다 체격이 좋으시다 보니, 보통의 말을 타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 녀석은 크기도 그렇고, 힘도 그렇고, 여러모로 흔히 볼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말이지요. 때문에 일단 데리고는 있었지만…….”
리노스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이어 말했다.
“원체 사나운 탓에 왕자님께서도 아직 완전히 길들이지는 못하셨습니다. 사실은 아우토메돈이 말을 잘 다루는 만큼 먼저 맡았는데, 그조차 힘에서 밀린 탓에 왕자님이 직접 나서야 하셨습니다. 왕자님 말고는 반이나마 성공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정도면 심각하네요.”
“그렇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종종 저렇게 날뛰었는데, 그때는 다행히 왕자님께서 계셨기에 어떻게든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만……. 왕자님이 안 계실 때 저 녀석이 날뛰기 시작한 건 처음입니다. 바로 진정을 못 시킨 바람에 더 난리가 난 것 같습니다.”
“때가 안 좋았군요.”
“예, 정말로.”
리노스가 진심 가득한 낯으로 긍정했다. 계속해서 먼 곳의 소란을 지켜보던 해인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차라리 혼자 남겨 두고 알아서 진정하게 하거나, 아니면 지치게 되는 걸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리노스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도 해 본 적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쉽게 지치지도 않고, 저 녀석은 밧줄도 끊어 먹어서……. 지치기 전에 밧줄이라도 끊겼다간 마구간 바깥으로 나와 버리니 난리가 납니다.”
“아…….”
“한 번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덕분에 저 녀석도 진영 안에서 순식간에 유명해졌지요.”
여러모로 상상 이상이었다. 전부 길들여져 온순한 말들만 봐 왔던 해인으로서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수준의 성질이었다. 해인은 할 말을 잃고 다시 시선을 돌려 그 대단한 성격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칼리에 역시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해인이 입을 다문 것으로, 그들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어어, 어!”
“자, 잡아! 잡아!”
불시에 침묵을 가르고 갑작스럽게 범위가 커진 소란이 끼어들었다. 여러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겹쳐져 거친 소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위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아악!”
비명 소리와 거의 동시에 함께 들린 것은 둔탁한 타격음이었다. 눈으로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그 두 개의 소리만으로도 마구간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해인은 당황한 채로 눈을 크게 떴다.
뭉쳐 있던 하인들과 소수의 병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그런 사람들의 한가운데에서는 아까보다 더 자세히 모습이 보이는 말이 몸을 마구 움직이며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리노스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말을 묶고 잇던 밧줄이 끊어진 것이었다. 해인이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줄을 끊었나 봐요.”
“이런…….”
리노스도 할 말을 잃은 듯 탄식했다. 부상의 정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명 소리가 들렸으니 다친 사람도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일은 점점 더 커졌다. 신경질을 내던 말이 몇 번 발을 구르더니, 이내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름 아닌 해인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앞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걷어차서라도 치워 버릴 것처럼 달리는 바람에 막아섰던 사람들은 부딪히기 직전 죽지 않기 위해 옆으로 몸을 던져 피할 수밖에 없었다.
“리노스! 그쪽으로 간다!”
텔라몬이 사색이 된 채 외쳤다. 호위 임무 첫날부터 거대한 위기였다. 말이 달려 나가는 방향에 해인이 서 있는 것을 본 다른 하인들 역시 당황했다. 해인의 인상착의는 대략 알려져 있던 탓에, 저쪽에 서 있는 여자가 지휘관의 막사에서 지내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대부분 금세 짐작했던 탓이다.
어떻게든 말을 막아 보려고 뒤따라 달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찰나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짧은 사이 말은 훌쩍 가까이 와 있었고, 리노스가 다급하게 해인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거기까지 상황이 진행되는 데 걸린 시간은 아주 짧았다. 찰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급박해진 사태 속에서 리노스의 말대로 해인은 당연히 피하려 했다. 버티고 있어 봤자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건 고민하지 않아도 빤한 일이었다.
해인은 반사적으로 뒤에 붙어 있던 칼리에를 챙겼다. 그리고 다시 앞을 돌아봤을 때였다.
정말 갑작스럽게도, 해인은 그 순간 뜬금없이 동물과도 눈이 마주칠 수 있다는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어쩌다 위치가 맞아떨어진 건지도 모르겠지만, 달려오던 말과 단어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일어난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가씨, 어서……. 어?”
해인을 재촉하려던 리노스가 멈칫하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느껴지던 긴박함이 갑자기 한풀 꺾인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었다. 말의 뒤를 쫓아 달려오던 하인들 역시 점점 걸음이 느려졌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을 한 채였다.
“지금 이게…….”
해인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칼리에의 손을 쥐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손을 놓친 칼리에는 힐끗 해인을 올려다보고는 주춤거리며 곁으로 슬쩍 가까이 다가섰다.
사위가 묘한 침묵으로 채워졌다. 직전까지만 해도 터질 듯 급박했던 상황은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변한 채였다. 심지어 그 속에서 해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됐다. 결코 의도하지 않았기에 해인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무슨…….”
그녀는 황망한 표정으로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응시했다. 시선 끝에 위치한 건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거칠게 날뛰던 검은 말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그토록 날뛰던 말이 해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달리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린 순간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