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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47)화 (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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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진영은 조용해졌다. 진영을 지키는 일부의 병사들, 그리고 잡일을 하는 하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쟁터로 향한 탓이다.

막사의 문 바로 옆에 놓은 의자에 앉은 해인은 낯선 적막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서 지낸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고작 조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낯설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의외였다. 늘 귀환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이 세상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올려다본 하늘은 그림처럼 깨끗했다. 지구를 차지한 인간들이 보다 편안한 삶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기 이전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현대에서도 날씨가 좋을 때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기는 했다.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있었던 섬만 하더라도 주변 풍경은 몹시 아름다웠다.

하지만 현대에서 보던 것과 이 시대의 것은 분명 무언가 달랐다.

해인은 환한 햇빛 탓에 시린 눈을 가늘게 뜨며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아마도 이곳의 하늘은 아직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자, 오롯한 신들의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시대에 온 첫날 보았던 밤하늘의 달이 문득 떠올랐다. 기묘하게 느껴질 만큼 선명하고 밝게 빛나던 달도, 달의 여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자신의 영역이었던 것에 인간이 발을 내디딘 순간 어떤 기분이셨을까.’

얼굴도 모르는 달의 여신을 잠시 떠올린 해인은 이내 젖히고 있던 고개를 내렸다. 줄곧 태양 빛을 보고 있던 탓인지 눈을 감자 눈꺼풀 위로 짙은 잔상이 떠다녔지만, 해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 모든 과정이 해인으로서는 별로 지루할 것 없는 시간들이었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사색을 하느라, 아킬레우스 한 명에서부터 파생된 온갖 복잡한 고민에서 한 발자국 멀어질 수 있어 마음 역시 조금이나마 편안했다.

하지만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눈에는 그 반대로 보였던 게 문제였다.

해인이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부터, 텔라몬과 리노스는 서로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가씨.”

결국 그들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해인을 불렀다. 침묵을 깨고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해인은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대답했다.

“네?”

“그, 혹시 무료하시면……. 진영 안이라도 한번 산책하시겠습니까?”

해인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산책이요?”

“예!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 기분 전환도 하실 겸 어떠십니까?”

제안은 둘째 치더라도, 해인은 자신의 어머니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어른의 과한 존댓말에 금방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애초에 무료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난데없이 산책을 권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저는 괜찮은데…….”

사양하고 싶었던 해인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주 본 두 사람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만큼의 의욕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다.

‘……왜 저렇게 보시는 거지.’

해인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켜봤던 왕자님이 훌륭하게 장성하여 전쟁터에서 높은 전공을 올리는 와중에, 어디선가 데려온 여성을 갑자기 곁에 두고 몹시 아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들을 불러 자신이 없을 때 그녀의 호위를 부탁한다며 일을 맡긴 상황인 것이다.

아무리 봐도, 해인은 미래 왕자비가 될 사람인 것이 정황상 확실했다.

아킬레우스뿐만 아니라 그의 최측근인 파트로클로스의 태도만으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는 건 그들을 향한 아킬레우스의 신뢰를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 신뢰에 제대로 보답하기 위해, 그들은 물리적 위험뿐만 아니라 혹시 모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도 해인을 빼내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해인과 두 병사의 기묘한 대치는 잠깐의 침묵 후 결국 해인이 물러나는 것으로 종료됐다. 두 병사는 거칠 것이 없이 열정적이었지만, 해인은 그 모든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럼 주변만 조금 돌아보고 올 수 있을까요?”

“예! 모시겠습니다.”

“아니, 시중을 들 여종부터 불러야지!”

크게 대답한 텔라몬을 곁의 리노스가 툭 치며 타박했다. 속삭인다고 한 것 같았지만 해인에게도 충분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해인은 또 당황하고 말았다.

“아가씨, 누구를 부르면 되겠습니까?”

“음, 그게.”

해인은 부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둘 모두 여종을 부르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걸렸다. 시대상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이런 면에서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고민하던 해인은 문득 여종들 중 마음에 드는 이가 있다면 함께 다니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것이라고 말했던 아킬레우스의 말이 떠올라 멈칫했다.

‘……이 두 분과 아킬레우스까지 세 명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네.’

세 명이 하나의 이야기를 한 이상, 그대로 행동하는 게 아무래도 이로울 것 같다. 결론을 내린 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누구를 부를 것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사실 아킬레우스의 말을 떠올렸을 시점부터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오늘 아침 저를 도와줬던 아이를 데려올 수 있을까요?”

해인은 유난히 어려 마음이 쓰이던 여종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고 머리카락 색은 갈색이었어요.”

그 말에 텔라몬이 어째서인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 오늘 아침 시중을 들었던 어린 나이의 여종이요. 갈색 머리칼이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포로들을 관리하는 이에게 말하여 데려오겠습니다.”

그는 말을 맺은 후 곧장 등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해인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남아 있는 리노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텔라몬과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는 채였다. 해인의 시선을 받은 그는 아주 온화한 목소리로, 마치 비밀이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사실은 왕자님께서 아가씨가 원하는 것이 있거든 전부 해 드리라고 말씀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니 원하신다면 안 될 일이 없지요.”

“아, 네…….”

해인은 조금 도망치고 싶어졌다.

여러 의미로 편하지만은 않은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멀리서부터 텔라몬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곁에는 작은 체구의 여종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얼굴을 식별할 수 있는 거리에 이르자 해인은 어렵지 않게 여종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오늘 아침에 막사에 왔던 그 아이가 맞았다.

“데려왔습니다, 아가씨. 이 아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네.”

텔라몬이 여종의 등을 밀어 앞으로 보내며 말했다. 해인은 작게 대답하며 여종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앳된 얼굴의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해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찾아주셨다고 들었어요, 아가씨.”

아이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이미 포로로 잡혀 버린 이상 가족이나 친척이 몸값을 내주지 않고는 풀려날 수 없다. 그런 마당에 차라리 높은 신분의 누군가를 시중드는 일을 맡게 되면, 진영에서 잡일을 하는 것보다야 훨씬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그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침에 겪어 본 바에 따르면 눈앞의 아가씨는 실수를 저질러도 타박하지 않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몹시 아름다웠으니, 그럴 주제가 아님은 알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도 좋았다.

“이름이 뭐니?”

물론 그 시선을 받는 해인은 다소 해탈한 상태였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는 법이라고, 가급적이면 이 시대의 규칙에서 크게 엇나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자신을 낮추는 게 익숙해 보이는 어린아이를 보면 기분이 절로 이상해지는 것이다.

“저는 칼리에라고 합니다!”

“그래, 칼리에. 다시 보게 돼서 반가워.”

“감사합니다……!”

대체 어디에 감사 인사를 들을 만한 부분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해인은 괜히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텔라몬과 리노스의 주장대로 곁에서 시중을 들 여종까지 데려왔으니 남은 것은 비로소 산책이었다. 일행은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기준으로 가볍게 근처만 원을 돌듯 둘러보고 오기로 한 뒤 움직였다.

앞장선 텔라몬의 등을 보며 걷던 해인은 문득 어이가 없어져 조용히 헛웃음을 지었다. 현대였으면 겉옷만 챙겨 혼자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순히 진영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네 명이 몰려다니고 있다.

물론 이곳은 아군의 진영이긴 하지만 동시에 전쟁터의 후방이고, 여자 혼자서는 안전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니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별것 아닌 일에 들어가는 수고가 너무 많다는 감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괜스레 머쓱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걸음을 옮겨 움직이자 홀로 앉아 사색하던 때와 같이 복잡한 고민들이 환기되는 효과는 있었다. 텔라몬과 리노스가 주의 깊게 해인과 보폭을 맞추고 있었기에 걷는 것도 힘들일 것 없이 여유로웠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 때였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의 저 앞쪽에서부터, 공기의 흐름을 타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란이 전해져 왔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던 해인은 귓가를 스친 무시하지 못할 만큼 큰 고함 소리에 곧장 걸음을 멈췄다.

“앞에서 무슨 일이 있나 봐요.”

그 말에 텔라몬과 리노스 모두 반응했다. 그들도 같은 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예, 저도 방금 들었습니다.”

“아마도 마구간이 있는 방향 같군요.”

위치는 짐작하더라도,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텔라몬과 리노스는 괜히 소란스러운 곳으로 향했다가 호위 대상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피하고 싶었으므로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리노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을 꺼내던 순간이었다.

“아가씨, 저쪽은 텔라몬이 확인하고 오도록 하고, 아가씨께 위험할지도 모르니 저희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게…….”

“앗! 거기 계신 분들! 좀 도와주십시오!”

소리가 들린 방향에서 달려오던 하인이, 그들 일행을 발견하고는 간절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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