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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46)화 (47/149)

아킬레우스의 답을 들은 뒤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무구들을 준비해 두겠다며 자청했다. 사실 그런 것은 부관이 나서서 할 필요는 없는 종류의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짧은 여유를 조금 더 줄 테니 대화를 마무리하라는 파트로클로스 나름의 배려였다. 그는 그대로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향했다.

그사이 해인은 난데없이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 같은 감각에 움직임을 멈췄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킬레우스가 이제 와서 전장에 나서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리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여상한 태도 때문이다. 누가 보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당사자를 두고 괜히 나서서 걱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적당히 말을 아껴야겠다는 판단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의 표정과 말투가 모두 진지해지고, 아킬레우스 역시 그에 호응하는 듯하자 제삼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시에 긴장감이 엄습했다. 해인은 아주 짧은 고민 끝에 그 원인을 알아냈다.

……출전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반사적으로 연상되는 죽음 때문이다.

물론 아킬레우스가 벌써부터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해인에게는 그렇게 추측하는 나름의 근거도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 같은 것에 유명하다는 표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킬레우스의 죽음은 분명 유명했다. 심지어 해인은 미래에 전해지는 그의 이야기가 실제와 제법 비슷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직접 확인한 후였다.

몇 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거짓이 거의 섞이지 않은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건,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아킬레우스의 죽음은 다수에게 있어 대단히 큰 충격과 깊은 인상을 남기는 사건이 된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찾아온다면 그만큼 크고 중요한 전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예를 들자면, 미래에 전해지는 이 전쟁이 ‘트로이 전쟁’ 인 만큼, 트로이라거나…….

어쨌든 해인이 이름조차 못 들어본 테베는 아닐 것 같다는 소리였다.

‘아니, 그렇지만 결국 소용없는 이야기잖아. 오늘은, 당분간은 아니더라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니 결국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실감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해인은 이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다소 뜬금없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분명 언젠가 오게 될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게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으니, 벌써부터 매여 있을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애써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감정을 감추는 것은 평소와는 달리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해인.”

그런 탓에, 해인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도 한 발 늦게 답하고 말았다.

“……네?”

“내가 걱정되나?”

아킬레우스는 굳이 돌려 말하지 않고 물었다. 바로 곁에 있는 이의 염려를 알아보는 것은 그처럼 수없이 전장에 나서 본 자들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직설적인 물음에 해인은 순간 멈칫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오늘의 전투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걱정되느냐고 물었고,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으니, 넓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해인은 잠깐의 생각 끝에 답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에 아킬레우스가 가볍게 웃었다. 물론 해인의 염려는 예상 못 한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타인을 걱정하는 것을 어렵게 여길 사람이 아니다. 오늘 아침 있었던 일처럼,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처음 본 여종에게 유난히 친절하게 대하던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도 떠올렸듯 과한 것은 없는 것만 못한 법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잠깐의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파트로클로스에게 들었으니 그대도 알겠지만……. 어차피 며칠 정도는 토성이나 목책을 쌓느라 본격적인 전투는 없어.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그건 해인의 성격을 고려하여 혹시 모를 짐을 덜어 주고자 꺼낸 말이었다. 진영에 남아 내내 걱정하다 과하게 심력을 소모하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때문에 약간은 달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어투였다.

하지만 해인은 침묵하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킬레우스의 말대로 파트로클로스에게 한차례 공성전에 대해 설명을 들었기에 알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가 방금 한 말은 의미 없는 발언이었다. 해인은 회의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들었으니 알죠. 수성하는 입장에서 공성 측이 요새 만드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걸요.”

“……음.”

“규모가 크지 않다고 해서 전투가 아닌 것도 아니잖아요…….”

아킬레우스는 할 말이 없어졌다. 해인이 이쪽으로 이해가 빠르다고 했던 파트로클로스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물론 파트로클로스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로만 들었지 직접 겪은 적은 없던 탓에 무심코 병법을 처음 배우게 된 소년 정도의 수준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어. 미안하군.”

아킬레우스는 빠르게 실책을 인정했다. 사과를 들은 해인은 피식 웃었다. 다소 어이가 없었을 뿐, 기분이 크게 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대화로 때 이른 불안감과 약간이나마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해인의 답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아예 솔직하게 나왔다.

“사실 걱정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아. 그대가 내게 신경 쓴다면, 나로서는 좋은 일이지. 하지만 과하게 마음 졸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은 무형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똑바로 응시해 오는 시선을 마주 보며 해인은 침묵했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흔히 그랬던 것처럼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물빛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눈에 띄게 선명하고 강렬했다. 그리고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는 찰나의 순간, 속도를 달리하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난제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로 솔직하게 부딪쳐 오는 감정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화는 끝나셨습니까?”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침묵은 잠시 후 타인의 개입으로 깨졌다. 다름 아닌 파트로클로스였다. 그가 아킬레우스에게 존대를 쓰는 것이 적응되지 않았던 해인은 멈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았다.

“파트로클로스.”

“준비는 해 두었으니 들어가셔서 무장부터 하고 나오십시오. 아가씨의 곁에는 제가 잠시 있겠습니다.”

합당한 말이었으니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화가 끝난 것도 아니었고, 드물게도 해인이 똑바로 눈을 마주쳐 오고 있던 찰나였기에 아킬레우스에게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그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고는 해인에게 가볍게 눈짓한 뒤 막사로 향했다. 파트로클로스는 본인의 말대로 해인의 옆에 남아 있다가, 아킬레우스가 막사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

“제가 아킬레우스에게 존대를 쓰는 게 낯선 모양이시군요.”

직전까지의 무거운 분위기가 아닌 평상시의 파트로클로스였다. 고작 사람 한 명 없어진 것만으로 금세 평소 봐 오던 익숙한 모습이 된 상대를 보며 해인은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것 같은 그 표정에 파트로클로스가 씩 웃고는 설명했다.

“지금은 그의 권위를 존중해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평상시에는 편하게 대한다지만, 아킬레우스는 엄연히 제 윗사람이지요. 게다가 곧 전쟁터에 나가야 하니, 지휘관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가요.”

해인은 신기하다는 듯 답했다. 온화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그런 해인을 보면서도, 파트로클로스는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분명 의미 없는 고민은 그만두기로 했다지만, 막상 아킬레우스를 보내고 해인과 나란히 남게 되자 또다시 인간적인 호기심이 고개를 든 탓이다.

‘……어제는 대체 무슨 대화를 했기에 아킬레우스가 본인 막사를 탈출해서 내 막사로 쳐들어온 걸까.’

하지만 그런 걸 물어보려고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이 해인 곁에 남아 있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해인에게 그런 일을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실례다. 눈을 굴려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파트로클로스는 애써 호기심을 억눌렀다.

뒤이어 그들이 사소한 주제로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었을 때쯤, 아킬레우스가 막사에서 나왔다. 그것을 확인한 파트로클로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된 해인은 별수 없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아킬레우스는 당연하다는 듯 그들에게로 걸어왔고 그가 제대로 무장을 끝냈음을 확인한 파트로클로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준비해야 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안 늦게 갈 테니 걱정하지 마.”

“예.”

대답과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에게도 인사를 남기고 나서 자리를 벗어났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점점 뛰듯 속도를 내어 사라지는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해인은 아킬레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대를 청동기로 분류할 수 있는 만큼 아킬레우스가 입은 갑옷 역시 주된 재료는 청동인 듯했다. 다른 광물도 섞여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대부분 햇빛을 받아 불그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것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데다 현대 기준으로도 꽤 체격이 큰 사람이다 보니, 아킬레우스는 곁에 서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그는 평상시 자신이 유지하던 거리보다 반걸음 정도 더 떨어진 곳에 선 채였다. 아직 쓰지 않은 투구를 따로 손에 들고, 그는 자신을 돌아보는 해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심하고, 혹시 진영 바깥으로 나갈 거면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진영 안은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상관없지만 병사들과 같이 다니도록 하고.”

“……그럴게요.”

“아마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두고 가려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서.”

아킬레우스가 가볍게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해인은 아까 전 공성전 이야기를 했을 때에 이어 또다시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전쟁터로 나갈 사람이 안전한 후방에 있을 사람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하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었다.

“전장에 나갈 사람이 뒤에 있을 사람에게 할 말로 어울리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해인은 얼굴 위로 남은 웃음기도 지웠다. 그리고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조용히 속삭이듯 덧붙였다.

“당신이야말로 조심하세요.”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순간마다 그랬으면 했다. 아무리 주의해도 결국 그 끝은 정해져 있을 테니 무운을 비는 말도 어쩌면 공허하겠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려의 말은 작은 목소리였으나 아킬레우스는 그 문장의 음절 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두 새기듯 들었다. 그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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