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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45)화 (46/149)

해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내 아킬레우스가 환기하듯 피식 웃었다. 그는 분위기를 풀려는 듯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대도 알겠지만, 오늘부터 나는 출전해야 하니 병사 둘에게 그대의 호위를 맡겼어. 만약 막사 바깥에서 뭔가를 하고 싶다면 그들을 데리고 다니도록 해. 그리고…….”

그는 잠깐 말을 흐리며 생각하다 덧붙였다.

“여종들 중 마음에 드는 이가 있다면, 역시 함께 다니는 편이 여러모로 낫겠지.”

아까 전 해인이 걱정되는 것처럼 바라보던 그 여종을 떠올리며 한 말이 맞았다. 파트로클로스의 말대로 나이가 어려 보이긴 했지만, 해인이 편하게 느낀다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해인 역시 아킬레우스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해인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아이를 말하는 건가요?”

“마음에 든 게 맞아?”

“……어려 보여서 신경 쓰였던 것뿐이에요.”

“뭐, 그래.”

아킬레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수긍했다. 그 태연한 목소리에 해인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응시했다. 본인 입으로 출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 놓고 정작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시선을 느낀 아킬레우스가 짧게 물었다.

“왜?”

“음…….”

사실 해인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두렵지 않은 건지 궁금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아킬레우스는 이미 수많은 전장을 오갔을 테니 이제 와서 두려움을 느낄 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자신이 나서서 더 걱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해인은 한 걸음 물러나며 말을 아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 상대의 속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는 변함없이 여상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다만 팔짱을 낀 채 해인을 잠시 내려다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뒤편을 힐끗 응시했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잠시 그대로 한곳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다시 해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마침 저기 그대의 호위를 맡아 줄 병사들이 오고 있군. 아직 시간이 많으니 내가 소개해 줄 수 있겠어.”

그 말에 해인 역시 직전 아킬레우스가 돌아보았던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과연 저만치에서부터 병사 두 명이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병사 둘은 이내 지척에 다다르더니 아킬레우스에게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인사를 받은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설명했다.

“나와 파트로클로스가 어릴 때 우릴 호위하던 자들이야. 원래부터 전쟁터에 나가기보다는 누군가를 지키는 일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니, 그런 면으로는 실력이 확실하지. 변함없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 말에 해인은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다. 원래부터 누군가를 지키던 사람들이라는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온 탓이다. 그녀는 무례하지 않을 선에서 병사 두 명을 살펴보았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어릴 때 그들을 호위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 모두 겉으로 보기에 아주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몸은 단련되어 있었고 그로부터 드러나는 만만하게 보지 못할 기백이 존재했다.

“과분한 말씀을 해 주시는군요. 하지만 왕자님께서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곁을 지키겠습니다.”

둘 중 한 명이 웃으며 겸손하게 답했다. 그는 이내 해인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아킬레우스에게 하던 것만큼 깊이는 아니지만 충분히 정중하게 보일 만큼 고개를 숙였다. 곁에 있던 다른 병사 역시 함께였다.

“제 이름은 텔라몬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저는 리노스입니다.”

나이 지긋한 어른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받게 되어 버린 해인은 그만 순식간에 불편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손을 말아 쥐며 해인은 어쩔 줄 모르는 기분으로 답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해인의 목소리를 들은 그들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둘 모두 체격은 단단했지만 키는 이 시대 남성의 평균에서 약간 큰 정도였기에 해인과는 그다지 많은 차이가 나지 않았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들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해인은 약간의 의아함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두 사람 모두 아주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호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해인은 잠깐의 생각 끝에 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이 다른 것도 아닌 흐뭇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아주 기꺼운 존재를 보는 듯한…….

‘……왜?’

초면인 사이에 보일 법한 눈빛은 아니었다. 해인은 의문을 품었지만 그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는 못했다. 인사를 끝내자마자 그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럼 저희는 물러나 있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마저 말씀 나누시길 바랍니다.”

“후에 뵙겠습니다, 아가씨.”

다시금 아킬레우스와 해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그들은 어딘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그대로 재빠르게 멀어졌다. 멀어지는 두 인영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인은 그제야 비로소 그들이 보내던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다. 불과 몇 십분 전에 만났던 어린 여종이 말해 주고 간 소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 짓고 말았다. 정작 본인은 아킬레우스가 던지고 간 불씨로 인해 불이 붙어 버린 심지의 끝을 자를 수 없어 밤마저 새웠는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미 하염없이 앞서 나가고 있음을 여종에 이어 무려 두 번째로 확인받은 탓이었다.

한편 곁에 있던 아킬레우스 역시 진영 내에 어떤 소문이 도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이 보이는 행동의 원인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심지어 텔라몬과 리노스는 그를 어릴 적부터 봐 온 사람들이었으니 이런 일에 유난히 큰 관심을 보일 법도 했다.

어차피 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아킬레우스의 입장에서는 크게 나쁠 것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잡일을 하는 이들이 윗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늘 있던 일이었다. 단순한 소문에 불과한 만큼, 적정선을 지켜 무례해지지만 않게 신경 쓰면 포세이돈도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다닥 멀어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킬레우스는 짧게 웃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냥 조금 웃기기나 할 뿐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힐끗 내려다본 해인은 멀어지는 병사들을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변함없이 머릿속에 든 고민이 많은 듯했다.

“해인.”

그는 일부러 해인의 주의를 끌듯 이름을 불렀다. 멈칫한 해인은 이내 눈을 들어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아킬레우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확인했지?”

“네.”

“기억할 수 있나?”

“할 수 있어요.”

“이름은?”

“……이름도요.”

연달아 건네지는 질문에 해인은 대답하면서도 다소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그 표정을 본 아킬레우스는 당부하듯 말했다.

“그들 외의 사람들이 티 나게 접근한다면 주의하도록 해. 애초에 진영 내의 다른 미르미돈 병사들은 그대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을 테니, 그런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의심해야지.”

예상보다 진지한 말에 해인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순순히 수긍했다.

“그럴게요.”

그들의 관계는 어느 사이 제법 복잡해졌지만, 사실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면 포세이돈이 제안했던 거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래의 내용이 해인을 무사히 지켜 내고 그 대가로 수호를 약속받는 것이었으니, 아킬레우스의 입장에서는 방금 전처럼 여러 번 확인하고 당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해인의 답을 들은 아킬레우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방금 전의 말은 당연히 한 번쯤 해 두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해인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꺼낸 것이기도 했다. 생각이 많고 깊은 것은 사소한 행동에도 무게를 심어 주는 것이었으니 가치 있는 습관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지나치게 한 가지 생각에만 매몰된다면 그때부터는 좋은 일이 아니게 되는 법이다.

기나긴 밤 내내 그의 생각을 했으리라는 것은 물론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 독점은 늘 기꺼운 단어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하면 사람은 지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고민거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타인을 이렇게 신경 써 챙길 만큼 깊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 이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뜬금없지만 이전 팀블레에서 해인과 함께 잠시 외출했을 때를 잠시 떠올렸다. 주의를 환기시킨다고 생각하니 든 생각이었다.

그때처럼 산책이라도 다녀오면, 확실히 기분을 전환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한번 생각이 떠오르자 그때와 같이 직접 해인을 데리고 잠시 근처에서 쉬다 오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물론 팀블레에 있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진 만큼 해인도 그때처럼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있을 수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팀블레에 있을 때보다 날씨도 더 따뜻해졌으니 오히려 경계가 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다. 당장 출전이 눈앞인 마당이었고, 한번 시작된 전쟁은 끝나기 전까지는 쉴 수 없었다.

‘출전이 내키지 않는 건 처음이군.’

아킬레우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때마침 그들 가까이로 파트로클로스가 다가왔다. 지척으로 온 그는 묘한 표정으로 아킬레우스를 잠시간 응시했다. 해인이 나오자마자 아킬레우스가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그녀에게로 가 버린 탓에, 직전까지 대화하고 있던 자신은 졸지에 버림받은 꼴이 되었던 참이다.

물론 그렇다고 굳이 그 사실을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었다.

곧 전장에 나서야 하니 그 전까지는 마음에 둔 여자와 있고 싶은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전날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멀리서 그들을 관찰해 본 바, 분위기가 어색하긴 해도 서늘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출전하기 전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나라도 덜어 두는 게 이득인 법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아, 네, 안녕하세요.”

해인에게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파트로클로스는 친근하게 미소 지어 보인 뒤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직전까지 짓고 있던, 만들어 낸 미소를 거두고 표정을 굳히며 고했다.

“이제 준비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해인은 평상시에는 아킬레우스에게 늘 격의 없이 말하던 파트로클로스가 사용한 존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킬레우스 역시 파트로클로스의 바뀐 말투를 인지하며 시선으로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파트로클로스의 말대로 이제는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그러잖아도 방금 전 스치듯 떠올린 생각의 여파가 남아, 내키지 않는 출전에 대한 감정이 미세하게 잔여하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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