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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44)화 (4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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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했던 회의를 거쳐 비로소 첫 출전 당일이었다. 진영 안의 공기는 전투를 앞두었을 때 특유의 긴장감과 흥분으로 무거웠다.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병사들 역시 몇 시간 후 전쟁터로 나갈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그 가운데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막사 근처에서 출전 준비 여부에 관해 부관 메네스티오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 사항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지시를 내리던 그는 불현듯 부관들의 등 뒤로 여종 하나가 청동 대야와 천을 한 아름 끌어안고 자신의 막사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여종은 아킬레우스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킬레우스는 그 모습에 잠깐 더 시선을 준 뒤 이내 눈길을 돌렸다. 소지하는 무기도 없고, 타인에게 상해를 입힐 만한 기세도 없다. 무엇보다 들고 있는 짐들을 보아하니 해인의 시중을 들러 가는 모양이었다.

“숙부님?”

아킬레우스의 지시를 점토판 위로 기록하고 다음 사항을 보고하려던 메네스티오스가 아킬레우스의 시선이 다른 곳에 향해 있음을 확인하고는 그를 불렀다. 아킬레우스는 메네스티오스를 돌아보며 답했다.

“별거 아니야. 계속해.”

“……예.”

의아함을 미처 감추지는 못했지만 메네스티오스는 순순히 들고 있던 점토판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사이 여종은 이내 고개를 들고는 조금 더 눈치를 보다가,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후 재빨리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종이 사라졌음에도 아킬레우스는 어느새 직전까지 유지하고 있던 집중을 잃고 말았다. 보고를 이어 가는 메네스티오스를 앞에 두고서, 그는 전투와는 하등 관련 없는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대로 자긴 했을지 모르겠군.’

그저 고요하게 머무르다 돌아가고자 하던 해인을, 자신이 기어코 폭풍우 치는 바닷속으로 붙잡아 끌어들였다는 자각은 하고 있다. 어젯밤 스스로 자리를 비워 준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단순히 그가 없다고 해서 해인이 아무렇지 않게 잠자리에 들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늦게 잠들었다면 일어나 있기에는 좀 이른가.’

힐끗 태양의 위치를 확인해 시간을 가늠하던 아킬레우스는 이내 다른 가정을 떠올렸다. 해인이 생각이 많은 편이라는 것쯤은 이미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최소한 해결이 될 때까지는 내내 거기에 얽매여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어쩌면 아예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숙부님?”

“아.”

아킬레우스는 짧은 탄식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오늘따라 이상한 지휘관의 태도에 메네스티오스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숙부님, 괜찮으십니까?”

때마침 그들 근처로 다가오다 그 질문을 듣게 된 파트로클로스가 놀란 얼굴로 끼어들었다.

“무슨 문제 있어?”

“그게.”

설명하려는 메네스티오스를 막으며 아킬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 문제도 없어.”

둘의 시선이 단번에 아킬레우스에게로 쏠렸다. 그는 짧게 숨을 내뱉더니 덧붙여 말했다.

“메네스티오스, 보고 잘 들었다. 이제 가서 말했던 것부터 처리해.”

“예…….”

메네스티오스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는 않았던 탓이다.

‘……뭐, 그래도 부지휘관께서 오셨으니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

파트로클로스를 힐끗 본 메네스티오스는 전문가를 믿기로 하며 순순히 몸을 돌렸다. 다만 미심쩍은 얼굴은 숨기지 못한 채였다.

그가 떠나고 잠깐의 침묵 후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방금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전장에 나가야 할 지휘관의 모습으로는 걸맞지 않다는 것 역시 알았다. 그는 빠르게 시인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내 실수야.”

“아, 다른 생각.”

아킬레우스의 해명에 상황을 이해한 파트로클로스는 짧게 감탄했다. 그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곧 전장으로 향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가 집중을 잃었다면, 원인은 뻔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이전에도 자신과 대화하다가 해인을 보고는 집중을 잃었던 아킬레우스를 떠올렸다. 물론 지금은 해인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지 않지만, 파트로클로스는 지난밤 난데없이 찾아온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의 막사를 반쯤 뺏겼던 사람이었다.

“그래……. 뭐.”

멀쩡히 본인 막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을 했으니, 무슨 일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해인과의 사이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하지만 무슨 문제지? 다퉜을 리는 없는데.’

만약 다퉜더라면 지금처럼 아킬레우스가 적당히 이상한 수준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어젯밤 보았던 아킬레우스는 무언가에 대해 화가 났거나 불만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앓던 이라도 뺀 듯 후련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해인이 화를 내는 것도 상상이 안 됐다. 만날 때마다 늘 차분한 어투로 조용히 말하고, 가볍게 웃는 모습만 본 탓이다. 사실 상상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고운 외양을 하고 있다지만, 그는 해인이 바다 신의 자식임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건 제삼자인 파트로클로스가 혼자 궁금해해 봤자 당사자가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사정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의미 없는 고민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킬레우스가 지금처럼 이전에는 한 적 없는, 그의 의무에 다소 반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제껏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매일이 새로울 법했다.

‘겪은 적 없는 일은 더 크게 느끼는 법이지.’

무엇보다 파트로클로스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존재했다. 지금처럼 종종 넋을 놓더라도, 막상 전장에 발을 딛게 되면 그때부터만큼은 그의 지휘관이 절대로 집중을 잃지 않으리라는 확신이었다. 지금처럼 별일 없을 장소에서 가끔 딴짓하는 것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잠시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대화의 주제를 환기했다.

“……병사들 사기가 높아. 팀블레에서 큰 승리를 거뒀던 영향이 남은 거겠지.”

“잘됐네.”

상황을 넘어가려는 의도가 보였던 탓에 순순히 말을 받아 주던 아킬레우스는 다음 순간 멈칫했다. 파트로클로스의 어깨 너머로 막사의 천이 걷히는 것을 발견한 탓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 천을 걷어 낸 사람이 해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천을 걷어 내고 한 걸음 바깥으로 나온 해인은 여종을 내려다보더니 무어라 말을 건넸다.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딘지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은 표정은 잘 보였다. 고개 숙이며 답한 여종이 떠나고도 해인은 그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중드는 것도 꺼려하시더니 뜻밖이군. 저 여종이 마음에 드셨나?”

아킬레우스의 시선을 따라간 파트로클로스가 그 광경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좀 어린데……. 하긴, 오히려 어려서 편하게 느끼시는 걸지도 모르겠네.”

“흠.”

아킬레우스는 멀어지는 여종을 짧게 곁눈질하고 다시 해인을 보았다. 한눈에 봐도 다소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다. 그가 아는 해인의 성정대로, 생각이 많아 잠 못 이룬 낯이었다.

예상한 바였고, 전혀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킬레우스는 동시에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은은한 만족감을 자각했다. 어쨌든 해인이 밤 내내 했을 생각이라고는 전부 자신에 관련된 것이었으리라는 사실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그때였다.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꽤 되었는데, 내내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여종에게만 신경 쓰던 해인이 문득 아킬레우스가 있는 방향으로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아킬레우스는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았으니 상대가 그를 본 이상 시선이 마주치는 건 더없이 쉬웠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그러나 전날 일을 벌여 놓은 이상 오늘 아침엔 해인의 얼굴을 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아킬레우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막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해인의 앞에 섰다.

“해인.”

아킬레우스가 다가오는 짧은 시간 동안 해인은 심각하게 갈등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못 본 척하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차피 막사의 주인도 아킬레우스였다. 게다가 이미 눈이 마주친 후였으니 사실은 못 본 척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몇 시간 만에 그들은 다시 서로를 마주하게 됐다. 자리를 피할 수는 없어도 눈만은 마주치고 싶지 않던 해인이 시선을 비껴 피하는 것을 아킬레우스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둘만은 고요했다. 침묵이 길어지고 분위기가 정말로 이상해지기 직전, 비로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못 잔 얼굴이네. 피곤해?”

길던 침묵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아주 여상한 목소리였다.

“……네?”

깨진 침묵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던 해인은 다음 순간 어김없이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랐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전 멀리서 보고 있을 때와 같이, 그는 한 번도 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피하지만 않는다면 아킬레우스는 곧장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인이 다시 눈을 피할 수 없도록 손을 뻗어 뺨을 감쌌다. 한 손만으로도 얼굴 전체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의식해서 힘을 빼며 엄지손가락으로 해인의 눈가를 쓸었다.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

“잠깐…….”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 물러나는 것을 잊은 해인이 당황하며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더듬거리며 손을 들어 아킬레우스의 손목을 잡아 밀어내려 하는 찰나, 아킬레우스가 확신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아마 나 때문일 테고.”

해인은 그만 멈칫하고 굳었다. 손을 아킬레우스의 손목 근처에 올려 둔 그대로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보자, 아킬레우스는 보란 듯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미련 없이 떨어졌다.

할 말이 없어진 해인은 어쩔 수 없이 침묵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찔한 기분이 든 해인은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놓으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대로 휩쓸려 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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