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6 적응
사방이 밝아지고도 한참 막사 안에 머무르던 해인은 이내 바깥이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한 겹 걸러져 들어오고 있음에도 제법 거슬릴 정도로, 평상시와는 그 크기부터가 다른 소음이었다.
오늘이 출전 첫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해인은 소음 속에서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누워 막사의 천장을 응시했다.
전쟁에 출전하게 된 사람이 전혀 모르는 타인인 것도 아니고, 계약이 선행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나가서 얼굴 정도는 비쳐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해인이 생각하기에도,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아킬레우스에게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쯤은 건네는 게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기는 했다.
그리고 실은 예의의 문제를 떠나서, 출전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무게감이 해인을 걱정스럽게 만드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전날의 일만 없었어도 인간들 간 적절히 차려야 할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이미 진작 얼굴을 보고 조심하라는 말이라도 해 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도저히 태연하게 아킬레우스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음의 동요를 감추지 못할 것 같았다.
“왜 하필 출전 전날에 그런 이야기를 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해인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이 시대로 온 이후 몇 번 잠을 설친 적은 있으나, 오늘처럼 완전히 밤을 지새운 건 처음이었다.
어두웠던 하늘이 조금씩 밝아 오는 내내 눈을 뜨고 있어도 몸 상태는 기이할 만큼 멀쩡했다. 그러나 정신만은 갈수록 혼잡해져 두 배로 고통스러웠다. 눈을 감으면 잠들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복잡한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끝에 결국 지금에 이른 것이다.
결국 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그로부터도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여종이 막사 바깥에서 인기척을 냈을 때였다.
막사 입구의 천을 걷어 내고 안으로 들어오는 여종을 맞이하며 해인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제라도 눈을 감고 그대로 버텨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간단하게 세수를 끝내고 이제는 혼자 익숙하게 옷을 입은 해인은 여종의 손에 옷자락 정리를 맡겨 둔 채 잠시 넋을 놓았다. 막사의 끝을 초점 없이 응시하며 여전히 소란스러운 바깥의 소음 속에서 아킬레우스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것을 잡아낸 해인은, 그만 바로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침묵한 채 가만히 서 있고 말았다.
“아가씨, 아가씨?”
여종이 몇 번 반복해 부르고서야 해인은 겨우 눈앞의 기척을 알아챘다. 그녀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시선을 내렸다. 여종의 키가 자신보다 한참 작았던 탓이다.
“……아, 네?”
흐릿하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이 잡히고 여종을 시야에 담았다. 오늘 해인의 시중을 들어 주러 온 여종은 이전에 만났던 이들보다 제법 어렸다.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나이가 어려 그나마 온건한 대우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앳된 얼굴에는 포로로 잡힌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천진함이 남아 있었다.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게는 말을 낮춰 주세요, 아가씨.”
해인의 존대에 여종이 난처한 듯 이야기했다. 이전에도 다른 여종으로부터 똑같은 요청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못 들은 척하며 은근슬쩍 넘어갔던 것과 달리 해인은 이번에는 여종의 말대로 말을 낮춰 답해 주었다.
“……음, 그래.”
지금 눈앞에 있는 여종은 아무래도 얼굴에서부터 어린 티가 나다 보니 말을 낮추는 것에서 오는 거부감이 적었다. 게다가 이미 생각이 너무 많다 보니, 망설이며 고민하거나 사소하게 실랑이할 여유도 없었다. 여종은 자신에게 대답은 해 주고 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딱히 현실에 집중하고 있는 기색은 아닌 해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저어, 허리끈도 제가 매어 드릴까요?”
“그래 줄래?”
“네.”
근처 테이블에 두었던 허리끈을 가져온 여종은 그것을 해인의 허리에 두른 뒤 매듭으로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나 손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힐끗힐끗 해인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저기.”
“응?”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해인을 부른 여종은 해인의 반응이 유하자 조금 용기를 얻은 얼굴을 했다. 마침 허리끈을 다 묶었기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여종이 미처 숨기지 못한 호기심이 서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께서는 이 군대 지휘관의 부인이신가요?”
그리고 이 난데없는 질문에, 해인은 그만 불시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확 들고 말았다.
“……뭐?”
물론 질문에 불과할 뿐 사실이 아니니 적당히 넘길 수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심적 여유가 없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어떻게든 이 시대에 깊게 엮이지 않으려 애쓰는 마당에 다짜고짜 부인 소리를 듣게 된 것이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일은 연달아 일어났다. 해인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곧장 감지한 여종이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으려 들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아니야! 무릎 꿇지 마!”
그러잖아도 앳된 티가 나는 어린아이가 다짜고짜 몸을 숙이려 들자 해인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다급하게 그 몸을 붙잡았다. 해인에게 붙잡힌 여종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급하게 움직여서인지 괜스레 더 피곤한 기분이 든 해인은 한숨을 애써 삼키며 반쯤 무릎을 굽힌 아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물어볼 수도 있지. 그런 걸 무례라고 하지는 않아. 그냥……. 내가 놀라서 되물어 본 것뿐이야.”
“가, 감사합니다.”
너무 놀란 탓인지 오히려 복잡하던 머릿속이 갑자기 한결 정리된 것 같은 뜻밖의 효과가 있었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긴 해인은 복잡한 눈으로 여종을 내려다보았다.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못 이겨 이런 질문을 꺼낼 정도면,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아킬레우스와 자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뜻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게 왜 궁금했니?”
“그건…….”
“화내지 않을게. 네가 방금 전 내가 지휘관의 부인인지 아닌지가 궁금했던 것처럼, 나도 그냥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뿐이야.”
“그냥, 저는 그냥 다들 말이 달라서요. 누구는 아가씨께서 지휘관의 부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그냥 연인이라고만 하거나…….”
말끝을 흐리며 여종이 눈치를 살폈다. 화내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사적으로 미소 지어 주면서도 해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그냥 서로 좋아 어쩔 줄 몰라 같은 막사를 쓰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심지어 침대도 하나였다. 그런 오해 섞인 소문이 돌아다닌다 해도 할 말은 없는 것이다.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가씨?”
“아니, 아니야……. 말해 줘서 고마워.”
해인은 중얼거리듯 답하며 고민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해 봤자, 상황을 보아하니 그조차도 소문이 될 것 같았다. 옳은 말을 했다고 해서 남들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수의 입에 오르내리며 이상한 치정 관계까지 덧붙여질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지휘관이 그 여자를 억지로 붙잡아 놓고 있다거나…….’
스스로 한 생각이었음에도 해인은 그만 소름이 돋고 말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는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잘은 모르지만, 지휘관과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이 진영 내에 돌아다니는 건 전시에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 될 것이다. 얹혀 있는 입장으로 그런 상황의 시발점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 입으로 아킬레우스와 그런 종류의 사이라며 공언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선택지부터가 문제다. 부부와 연인 중 양자택일이라니, 지나치게 과한 난관이었다.
해인의 복잡한 속과는 별개로, 해인이 정말로 화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고맙다고까지 말하자 여종은 그제야 확실하게 안심한 티를 냈다. 비록 처음 꺼냈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듣지 못했지만, 일련의 사건 탓에 본인도 자신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는 그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저기, 그러면 저는 테이블을 좀 정리할게요.”
“……아, 그래.”
그 기색을 알아차린 해인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고를 엄두가 안 나는 마당이었으니, 이대로 아무런 대답 없이 여종을 보내는 세 번째 선택지가 상책인 것 같아서였다. 여종이 슬금슬금 움직여 테이블 위의 천과 청동 대야를 정리하자, 가까이 다가간 해인은 의자에 걸쳐진 천을 집어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이런 걸로 인사하지 않아도 돼.”
“네에.”
여종은 손을 움직이면서도 힐끗거리며 해인을 훔쳐보았다.
특이하게 생긴 것은 맞지만, 동시에 자신이 살아오며 본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절로 시선이 붙잡혔다. 그 탓에 손이 다소 느려졌지만, 해인이 곁에서 조금씩 도와준 덕에 오히려 정리는 혼자 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끝났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무거울 텐데 혼자 들고 갈 수 있겠어?”
이전에 왔던 다른 여종들과는 달리 눈앞에 있는 아이는 앳된 얼굴 탓에 거리감이 오히려 적었고, 해인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짧지 않게 대화가 오가기도 해서 그사이 친근감이 조금 싹을 틔웠다. 해인이 청동 대야를 비롯한 여러 짐들을 바라보며 묻자 여종이 다부진 어조로 대답했다.
“네! 올 때도 혼자 들고 왔어요.”
“아, 그렇지…….”
위선 같은 걱정을 한 것 같아 해인은 다소 머쓱해졌다. 그사이 여종은 짐들을 품에 끌어안고 꾸벅 허리를 숙여 절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응…….”
대답하면서도 해인은 무심코 여종과 함께 막사의 문까지 걸어갔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여종을 대신해서 천을 걷어 주기까지 했다. 자신이 시중을 들어 줘야 할 아가씨가 오히려 자신을 도와주는 듯하자 여종은 당황한 나머지 어색한 동작으로 걸어 나왔다.
“조심해서 가.”
“네……! 감사합니다!”
해인은 여종이 완전히 등을 돌리고 나서야 깊이 숨을 내쉬었다. 더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서늘하지도 않은 오전의 공기가 비강을 스치고 나갔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이방인이고,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마당이지만, 그럼에도 저 정도로 어린 아이까지 타인의 눈치를 보며 시중을 들고 대가 없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별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멀어지는 작은 등을 한동안 지켜보던 해인은 불현듯 뺨 위로 와 닿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고개를 움직인 찰나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지금 바깥에 나와 있었다. 여종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좀처럼 바깥으로 나올 마음을 먹지 못했는데, 방심한 사이 그만 스스로 걸어 나오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장소에서 해인을 이렇게 시선이 느껴질 만큼 바라볼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아.”
아니나 다를까, 느껴지던 시선 끝에 위치한 건 어김없이 아킬레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