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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42)화 (43/149)

어차피 무슨 말을 꺼낼지도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해인은 기꺼이 그러겠다는 듯 침묵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짙은 푸른색 시선을 마주하며 아킬레우스가 진지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끌렸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는 눈에 띄고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어. 그렇지만 이제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해. 나는 그대와 제법 긴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매 순간마다 조금씩 더 눈을 떼기 어려워진다고 느꼈고…….”

아킬레우스는 단어를 고르듯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덧붙였다.

“……그래, 느끼는 걸로 끝나지 않고 심지어 다른 일을 하면서 그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적도 있어. 테베에 도착한 이후로는 내가 없을 때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어서 파트로클로스에게 캐묻기도 했지.”

해인은 황망해져서 입을 약간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 정도까지 체면을 버리고 솔직하게 나올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말을 잃은 해인을 응시하며 아킬레우스는 무심코 테이블을 몇 번 두드렸다. 표정도 여상했고, 그리 크지 않은 소리를 내는 가벼운 힘이었지만, 그럼에도 손끝으로는 미처 감추지 못한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아 가고 싶어. 그건 그대와 함께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일렁이는 주홍색 불꽃으로 어스름하게 물든 물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며 해인을 담았다. 스스로의 감정을 한 치의 숨김도 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이의 눈은, 자신을 투명하게 내보이는 동시에 해인의 아주 깊은 내심마저 간파할 것만 같았다.

“……불가능하겠지. 바로 어제, 그대가 알려줬던 것처럼.”

거기까지 듣고서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숨을 내뱉었다. 언제부턴가 줄곧 긴장하고 있었던 듯 손끝이 저릿해져 왔다. 그와 동시에 마음 역시 무거워졌다.

아킬레우스의 말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지난밤의 그 기나긴 설명을 통해 해인이 바랐던 것들 중 하나는 분명 아킬레우스의 감정을 잘라 내는 것이었으며, 상대는 그런 해인의 생각을 진작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주 앉은 순간부터 최대한 침착하고자 했지만 그와 같은 사실을 직접 듣게 되자 평온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엄밀히 따졌을 때 고의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자 한 셈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낱낱이 듣게 되니 생각 이상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있을 틈은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그녀의 의도를 따라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동시에 그가 순순히 그렇게 해 줄 이유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해했으니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말을 할 것이었으면 이토록 길게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밀고 나갈 줄은 알았지만, 그건 끝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그대는 내가 과장해서 말하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 이건 내가 처음 마주하게 된, 끝이 정해진 일이야.”

말을 맺은 아킬레우스가 짧게 자조했다.

“한 가지 일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그리고 많이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중얼거리듯 말한 그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앉아 있던 맞은편의 사람이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자, 불꽃이 만들어 낸 긴 그림자가 해인의 위를 덮었다. 상대의 감정, 혹은 본인의 감정에 약간 압도되어 있던 해인은 흠칫하며 허리를 곧게 폈다.

“그래도 덕분에 결론은 내렸지.”

아킬레우스는 몇 걸음 움직이더니 테이블을 옆으로 밀어 버리고는 해인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래에서 위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평상시의 눈높이와 반전된 시야에 당황한 해인은 반사적으로 만류하듯 손을 들었다.

“들을 테니까, 그냥 일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킬레우스가 해인의 손을 그대로 낚아채 잡아서였다.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가느다란 손을 힘주어 쥐며, 아킬레우스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끝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대가 날 좋아하는 것까지 바라지도 않을 거야. 다만 나는 그대가 좋고, 그 사실을 이제 와서 부정할 생각도 없다는 걸 알아 둬.”

“아킬레우스.”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말리는 기색으로 이름을 불렀다. 되짚어 보면, 그건 처음으로 통성명을 했을 때 이후로 처음 불러 보는 이름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아킬레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해인은 그런 생각을 떠올릴 틈이 없었다. 다만 그녀는 아킬레우스를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이미 늦어 버린 것 같지만, 그렇더라도 그냥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여기서 무언가 말을 덧붙이면 그 순간 정말 걷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느껴진 탓이다. 하지만 만류는 통하지 않았고, 아킬레우스는 두 번째로 듣게 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되새기며 속삭였다.

“나는 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는 자신이 잡고 있던 해인의 손 위로 고개를 숙여, 손등에 입을 맞췄다.

“끝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이제 와서 내 삶을 지금까지 이끌어 온 내 방식을 바꿀 수는 없지. 그런 방법 말고는 모르거든.”

손등 위로 입술을 댄 채 말을 이은 탓에 음절마다 숨결이 닿아 왔다. 잡고 있던 해인의 손끝이 긴장한 듯 굳어졌지만, 아킬레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굳은 손끝을 온기로 녹이려는 듯 조심히 쥐며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해인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동시에 진심의 무게를 증명하듯 깊이 가라앉은 시선이었다. 똑바로 눈이 마주치자 해인은 불현듯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얼어붙었다. 사방의 작은 소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앞에 있는 이에게 모든 감각이 집중되는 듯했다.

그 가운데 아킬레우스는 그가 생각했던 모든 말들의 마지막 문장을 내뱉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손을 천천히 놓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뜻밖에도, 성큼성큼 걸어 막사 밖으로 나가 버렸다.

덕분에 혼자 남을 수 있게 된 해인은 한동안 침묵 속에 잠겼다.

문득 이른 아침 때 아니게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던 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해가 진 이후부터 아킬레우스가 두 번째 회의를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의 몇 시간 동안, 그 불안감이 형태를 갖춰 가던 것도 생각이 났다.

그때, 혼자 앉아 생각을 거듭하며 해인은 몇 가지의 가정을 골라 두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처음 꺼내 든 예언과 관련된 이야기는 해인이 떠올린 모든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짐작이 틀렸던 건가 싶었는데, 사실 그 예언 이야기는 뒤따라올 본론을 잘 설명하기 위한 서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마침내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 해인은 그만 어이 없이 숨을 내뱉었다.

“……본인의 인생이 달린 예언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다니.”

작게 소리 내서 중얼거려 보자 아까보다도 조금 더 어이가 없어졌다. 멍하니 앉아 눈을 깜빡이던 해인은 고개를 돌려 옆으로 치워진 테이블을 힐끗 응시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그녀는 결국 머리를 짚었다.

서론으로 써 버린 예언 이야기를 제외하면, 남은 본론과 결론은 해인이 몇 시간 동안 떠올렸던 가정들 중 일치하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고백이다.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자신에게 고백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게 과도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착각은 아닌지 검토해 본 이후로도, 여러 가지의 가정들 중 가장 높은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던 차였다.

사실 어젯밤 해인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 그가 보였던 태도에서부터 막연하게 짐작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저 높은 가능성을 가졌을 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과, 이미 일어나 눈앞의 현실이 되어 버린 일의 차이는 컸다.

아킬레우스가 가진 감정의 싹을 잘라 내고자 했던 해인의 시도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 막 일어났을 때, 아킬레우스와 눈을 마주하고 문득 불안감을 느꼈던 건 아마 그 사실을 본능이 알아차린 탓이었을 것이다.

간혹 본능은 이성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을 잡아내는 법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눈을 본 순간, 저건 결심한 사람의 눈이라는 사실을, 지금의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눈임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아침부터 아킬레우스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것이고, 그런 자신의 결심을 해인에게 설명하기 위해 무려 인생이 걸린 예언을 단순히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서론으로 써 버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기어코 해인이 자신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게 바로 그가 바랐던 일이었다.

“이건, 좀…….”

해인은 작게 중얼거리며 양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몇 번 마른세수를 거듭하면서도 복잡한 머리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망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까 전 아킬레우스가 예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 말을 듣고 있던 해인이 가장 먼저 떠올렸던 생각은 하나였다.

아킬레우스는 정말로 전쟁 중 죽는다.

사실 팀블레에서부터 생각은 했었다. 그가 연합군에 참전해 있다는 사실부터가 해인이 현대에서 알고 있던 이야기와 일치했으니, 높은 확률로 그의 죽음 역시 실제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그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예언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그것은 이제 단순한 짐작이 아닌 확신이 되고 말았다.

본인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대상의 신뢰와는 별개로 때가 되면 찾아오는 게 운명이었다. 크로노스와 포세이돈이 운명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운운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이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에, 해인은 그 단어의 무게를 아킬레우스보다 조금 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그가 받은 예언대로 살다 갈 것이다. 커다란 영광을 얻고, 그 대신 단명하게 되는 게 그의 운명이었다.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 돌파하고자 했지만, 그 끝은 결국 실패일 것이다…….

그래서 착잡했다.

“대체…….”

상대의 죽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과 함께, 해인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작게 싹튼 어떠한 감정의 싹을 알아차렸다.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을 만큼 존재감이 선명했다. 아직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정말 기이할 만큼 뚜렷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해인은 손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손바닥에 닿은 얼굴은 확연히 열이 올라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달아올라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열감을 손으로 느끼며 해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현대로 돌아갈 테니 이 시대에는 정을 주지 않는 게 옳은 일이지만, 사실 영생을 누리는 신조차도 매 순간 언제나 현명하게 굴지는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이상 해인 역시 그 어리석음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결국 그날 해인은 내내 잠들지 못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 역시 그날 막사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해인은 어떠한 방해도 없이 잠들지 않고 줄곧 깨어 있을 수 있었다. 전날까지 타인의 온기가 함께 머물렀던 침대에 혼자 누운 해인은 막사의 문을 대신하는 두꺼운 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을 투과한 엷은 빛이 막사 안으로 스며든다.

바닥 위로 곧게 직선을 그리는 희미한 빛을 가만히 지켜보다, 해인은 날숨과 함께 눈을 내리떴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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